*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희랍어 '아라'의 번역어. '아라'는 불변사로 결정적인 추론을 지시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의 결론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간 친밀하게 살펴보았던 키워드들을 생각해보라. [잘못된 걸음], [유죄판결], [의], [율법], [삐뚤어짐], [거저주심], [죽음], [다스림]. 이 모든 것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당신의 머리속에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가?
*믿음직스러운 삶 : 개역성경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생명'이라 되어 있다. 이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생명'이 너무 추상적인 단어로 생각되어 의도적으로 '삶'이라 고쳐봤다. 그렇다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의는 신실함이고, 약속에 충실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약속에 충실하고자 하는 삶'인 것이다. 근데 너무 길잖아?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운 삶'으로 줄였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부터 계속 이렇게 생각해왔다.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 앞에서 믿음직스러워지는 삶이 의로운 삶이라고.
*흘려들음, 잘들음 : '불순종(파라코에스)'과 '순종(휘파코에스)'의 번역이다. 요즘은 순종을 좋은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다들 자기 주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비굴함 정도로 여긴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 말씀에 순종했다가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는가? 그러나 순종에 대한 두 가지 오해는 짚고 넘어가자.
먼저, '순종'이라는 말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순종이라는 태도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중요한 점을 빠뜨린 것이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사람은 틀릴 수 있다. 또한 배신할 수 있다. 그러나 틀릴 수 없고, 배신과 무관한 분이 계시다면, 그 분에 대한 순종은 옳다. 그 분은 절대. 사람이 순종하기에 마땅하다.
게다가 순종은 생각없이 '무조건 따르라'는 말도 아니다. 굴종이 아닌 것이다.순종의 본래 뜻은 '아래서 들음'이다.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말은 순종에 대한 말이었다. '휘파under+쿠오listen'. 순종은 '잘 듣는' 것이다. '경청'이다. 그 이후 들은 것을 잘 생각해보고 그 들은바에 충실하고자 하는 맘과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믿음(신실함)이다. 그러니 순종있고, 믿음있다. 순종은 신실하기 위해서 잘 듣는 것이다. 그러니 순종은 강요가 아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설득되어감이다. 고개를 끄덕임이다. 진실을 듣기에 그렇다.
온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힘있는 음성으로 날 부드럽게 불러주시니 그 발 아래서 들어야 한다. 그 분은 믿을만한 분이시고 그 분의 말숨은 듣을만하다. 그래서 언어가 있다. 언어는 진리를 전하는 도구요. 진리 자체이신 아버지가 말숨으로 우리를 설득하신다. 우선 듣자. 잘 듣자.
반대편에 불순종이 있다. 불순종은 흔히 '행동안함'으로 생각하지만, 단어의 본래 의미는 '흘려들음'이다. 제대로 듣지 않고 흘려듣는 것이 불순종이다. '파라around+쿠오listen'. 즉 대강 듣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숨에 귀 막지 않았다. 흘려들었지. 들었던 내용의 핵심이 흐트러지는 것은 곧 행동의 빗나감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불순종의 시작은 아담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인류의 인격 삐뚤림이 시작되었다. 퍼즐 보글보글의 빗나간 첫번째 구슬 마냥. 판이 온통 꼬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당신도 하나님의 말숨을 흘려듣고 있지는 않는가? 불순종이다. 당신의 삶도 흐트러지고 빗나가게 된다.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을 뒤집는다. 한 사람이 이 절대적인 한 분의 말숨을 '잘 들어서' 하나님 약속에 충실한 믿음직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 믿음직스러움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겟세마네를 생각해보라.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다시 듣는다(기도한다). 자신의 생각을 전력으로 피하고(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 말숨을 전심으로 따른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로운 판결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럽게.
*하나님 아래 놓이게 되다 : '카티쎄미'. '카타'는 아래요, '티쎄미'는 놓다. 아래 놓임은 곧 재판에서의 판결이다. 죄인과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판결되는 것이다. 이전에 살폈던 유대 법정 내용을 참조.
*깊고도 넓게 들어오다 : '파레이세르코마이'. 파라around+에이스into+에르코마이come/go. '깊도고 넓고도'라는 말이 율법의 범위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넣었다. 넓게는 사람들의 관계. 깊게는 인간 심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서로의 관계가 기준없이 삐뚤어졌을 때, 율법은 그것을 바로 잡는다. 그 기준은 자신의 마음이 삐뚤어졌음을 비춰보는 거울도 된다. 인간의 관계와 내면에 대하여 율법은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 외부적인 방법, 율법을 통해서는 사람의 삐뚤어짐이 해결되기는 커녕, 이 삐뚤어짐의 문제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임을 발견할 뿐이다. 공부하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과중한 숙제 부담으로 그 맘을 바꿀 수 있겠는가?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분다 한들 청년의 웃옷을 벗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와 다른 무언가 특별한 조치 없이는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뿐이다. 배에 대한 것도 아니고, 건물에 대한 것도 아닌, 바로 인간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깊도고 넓게 들어온 율법이 알게하는 것이다.(어느 아이가 ㄴㄷ을 가르쳐줬다. 노답. '율법은 인간이 노답임을 알게한다')
*대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림 :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대비, 대조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인간의 삐뚤어짐의 '대가'로 들어온 것이 죽음이다. 인간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대가 중의 대가다. 사형제도를 생각해보라. 죄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죄가 너무 커서 돈으로 지불이 안되니까 목숨으로 지불케 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이 사형제도를 당해도 마땅할만큼 삐뚤어졌다고 말한다. 우리 맘이 정말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타인을 저주하며, 자신의 생존만을 구하며, 때로는 간음을, 때로는 미워하는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 우리 맘이다.(로마서 3장에서 이미 이 부분을 다뤘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도 대가를 치룰, 아니 그 이상으로 삐뚤어진 사람들이다. 정말 그 아이 말이 맞다. ㄴㄷ.
그럼 노답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은혜다. 이 은혜라는 말을 풀어서 '대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라 했다. 대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의를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매매와 대가로 가득하여 송장냄새 풀풀나는 세상에, 마치 운석마냥 대가없는 것이 떨어지고, 거저 주는 것이 떨어졌다. 이것은 죽을 자들에게 떨어진 새로운 판결. 의. 그 의가 예수를 통해서 왔다. 대가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를 온통 지배했고, 우리는 그것을 봤다. 십자가에서. 그리고 대가의 끝판왕인 죽음마저도 뒤집는 것을 봤다.
한쪽에는 삐뚤어짐과 대가로서의 죽음이 그리고 다른 편에는 의와 거저 주어진 생명이. 이것이 바울이 대비하는 바이고, 이 가운데 예수가 계시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맘 속 깊은 어딘가에서 들리는, 이것이 옳다는 소리침. 매매가 아닌 거저가. 죄인이 아닌 의인이. 내가 아닌 예수가. 죽음이 아닌 생명이! 그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 잘 들어야 하는 소리다. 그러니 경청하라! 예수의 역사가 말하고, 우리 내면이 말하는 그 소리에 순종하라! 우리 내면의 소리는 미세하여 일상 속에서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소리는 쩌렁쩌렁하다. 예수의 역사가, 거저 주시는 하나님 다스림을 온통 말하고 있다. 그 다스림이 오늘도 있다. 그러니 어서 뛰어 들어라.
*오는 시대의 삶 : 위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바의 결론을 내겠다고 했다. [잘못된 걸음], [유죄판결], [의], [율법], [삐뚤어짐], [거저주심], [죽음], [다스림]. 이런 말들은 앞에서도 했던 말들이고, 오늘 본문은 사실 어휘들간의 관계를 세밀하게 재정리했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단어가 들어와있다. 이것이 결론이다. '조에 아이오노스'. 사실 '조에'는 어제 나왔다. 일반적으로 생명, 삶이라 번역하는 말이다. 그런데 '조에 아이오노스'는 오늘 처음 등장했다. 이 말이 개역성경에는 '영생'이라 번역되어 있다. '오는 시대의 생명'이다.
낡은 시대는 끝난다. 새시대는 시작된다. 마치 정치권의 캐치 프레이즈 같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새시대는 어떠한 시대가 될 것 같은가? 돈 따라, 명예 따라, 권력 따라 다스리는 모습은 낡은 시대의 모습이다. 청산해야 할 인류의 부끄러운 과거다. 단언컨데, 새 시대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하는 것과 같이 '도덕적 설득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 보기에 믿음직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따라가기에 죽음 조차도 발목잡을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 오는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당신의 발목을 살펴보라.
11395日. 듣고(耳) 들어(耳) 새로운 시대를 따라가는(求) 오늘!
(구할 구(求)는 털가죽옷 모양을 본뜬 것이다. 가죽옷을 입은 이가 이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