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어짐 : '삐뚤어짐'을 '죄'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 과녁에서 벗어남이 본래 의미. 이 삐뚤어짐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왔다. 삐뚤어진 인격이 곧 죄인이지. 삐뚤어진 인격은 하나님께 닿지 않고, 하나님께 닿지 않으니 죽음이다. 혹시 '퍼즐 보글보글'이란 게임을 아는지? 위에는 색깔 구슬들이 있고, 아래에서는 각도를 맞춰서 하나의 구슬을 쏜다. 같은 색깔의 구슬군에 맞추면 구슬들이 와르르 떨어진다. 죄는 삐뚤어짐이다. 구슬을 삐뚤게 쏜 것이다. 망했다. 과녁을 빗나간 구슬은 게임에서의 생명과 맞바꾼다. 죽는 것이다. 사람은 이 땅에 나서 마땅히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이 '인격'이요. '참 인간됨'이요, '하나님을 드러냄'이니 곧 '영광'이다. 인간은 다양하나, 그 다양함은 이 한 목표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지 않고서 다양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격의 삐뚤어짐이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꿰뚫고 들어왔습니다 : 인격이 삐뚤어져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고, 이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다. 삐뚤어짐이 들어온 것과 죽음이 들어온 것이 동사가 미묘하게 다르다. 삐뚤어짐은 '에이스.에르코마이come into', 속으로 들어온 것인데, 죽음이 들어온 것은 '디아.에르코마이go through', 꿰뚫고 들어온다. 즉 죽음의 창이 인간을 꿰뚫고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치명상을 입었다. 삐뚤어진 인격을 가지고서 죽음에 찔려 소멸될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치에 넣고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엘로게오'를 파자하면 'en+logos' 다. '말씀 안에', '이치 안에' 라 풀 수 있다. 죄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언명이 있고서야 알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있고서야,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이 그 언명에서 어긋난 삐뚤어짐으로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즉 죄를 알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라는 말 자체가 과녁에서 벗어남인데, 이것은 과녁을 전제한다. 올바른 기준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 없이는 죄도 모른다.
그 올바른 기준, 과녁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의 언명이 있어야, 자신이 율법에서 어긋남을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던 시절이다(율법은 모세 때부터 주어졌다). 당연히 이 시절에는 율법이 없으니 삐뚤어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인류는 죽음의 창에 찔려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이것은 본문의 첫번째 구절과 상충한다. 한 사람의 삐뚤어짐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다 말했는데, 율법이 없어 삐뚤어짐을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도 죽었다고? 왜?
*벗어난 걸음, 떨어져 나감 : 바울은 '한 사람의 걸음'을 말한다. 이 한 사람은 인류의 첫번째 대표, 아담이다. 이 아담의 잘못된 걸음 때문에, 인류는 죽음에 갇혔다. 잘못된 걸음이라 풀어놓은 말은 개역성경에서 '범죄'라 번역한 단어다. '파라바시스', '파라프토마' 두 단어를 쓰는데, 먼저 것은 '벗어난 걸음', 뒤엣 것은 '떨어져나감'이라는 의미다.
아담이 잘못 걸었다. 목적지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향했다. 첫 자리에서 각도가 틀어지니 세월이 흘러 마지막 시대의 사람이 인격 틀어진 정도는 극심해졌다. 아담의 잘못된 걸음으로 인해, 모두가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왜 아담의 잘못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 묻는다. 바보야. 인류는 하나다! 홀로 존재하기를 시작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니? 최초의 인류로부터 인격이 틀어지기 시작해서 이것이 오늘 너에게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인류가 모두 연결되었다는 말이요, 이 인격 삐뚤어짐의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오늘 너에게도 있다는 말이 아니냐?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이루실 분의 모형 : 아담은 모형이었다. 모형이라는 말은 '포장은 같은데 내용은 다르다'는 말이다. 모델하우스를 생각해보라. 실제 집과 스케일이 같다. 외견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속 알맹이는 다르다. 모델하우스에서 주거할 수 없다. 모델하우스를 보고서 생각해야 하는 건 진짜 집이다.
마친가지로 아담과 같은 스케일의 일이나, 아담과 속알맹이가 전혀 다른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이제 막'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는, '멜론토스'라는 말이 'be about to'로 가까운 미래가 현실로 달려오는 듯한 늬앙스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 한다는 것이다. 모형 아닌 실제가, 마치 카드 게임에서 마지막 패를 뒤집으므로써 판 전체를 역전시키듯.
*거저주심, 선물 : 개역성경에는 전자를 '은혜', 후자를 '선물'로 번역했다. 둘다 거저 주는 것이라, 의미상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 고민했다. 이 바울의 구분을 염두하며 그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거저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왜 거저주셨는가?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이다. '한 사람'에 의해 죽음이 들어왔는데, 이 인류 최악의 참사를 뒤집어 '많은 사람'에게 풍성히 흘러넘치게 하고자 그 분은 거저주신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은...
예수다. 그래서 그 분은 선물이다. 포장과 내용물이 있다. 그 분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 포장을 찢는 일이 십자가다. 그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 겉을 상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의 몸을 찢으면 찢을수록 그 선물의 알맹이가 그러난다, 가치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그 드러난 선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의(義)'다. 의가 무엇인가? 아담 이후로 궤도를 벗어난 많은 사람에 대한 판결을 뒤집는 일이다. 1) 그들이 법정에서 옳게 판결되고, 2)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되며, 3) 예수의 신실함을 따라, 4) 새로운 시대를 사는 일이다.
*다스림 : 오늘 본문은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담 이야기.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최초 명령은 '다스리라'였다(창세기 1:28). 이 '다스림'은 자기 멋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그 세상의 아름다움을, 부여받은 창조적 능력으로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종이다. 청지기다. 지구라는 대저택의 집사다. 또한 하나님은 친히 그 종의 손을 붙잡고 함께 세상을 가꾸시는 진정한 왕이시다.
이것이 무참히 깨졌다. 아담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잘못된 걸음'을 걸었을 때, 그 분과의 관계와 약속된 미래와 하나된 세상이 산산조각났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창조된 세상에서 소외와 소망없음과 분열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는 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최초의 직위가 복권됨을 볼 수 있다. '다스림'. 아담의 과오과 뒤집히고,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다시 세상의 아름다움을 소망하며, 하나됨을 누리게 된다. 본래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제대로된 걸음을 걷게 된다. 어째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세상의 9회말에 터진 역전 만루 장외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