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이 : '화목'이라 번역된 말을 말을 풀어보았다. 희랍어 '카타.알라게'에서 '카타'는 '나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한 것'이고, '알라쏘'는 '이전과 다른 상태로 변화시키다.'의 의미. 그래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이. 사랑은 '서로'를 전제하고, 이전에는 찢어졌다가 달라졌으니 '하나됨' 아니겠나.
단지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화목이 아니고 화해가 아니다. 무관심을 화목이라 할 수 없을테니까. 싸우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서로 사랑하기에 하나인 사이. 그 사이에 무언가 오고감이 익숙한 사이. 하나님과 그러한 사이. '관계'라는 말도 '사이'로 바꿔보았다.
*하나님의 진노 :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기'전의 상태는 진노다. '하나님의 진노'라 하면 얼굴 찌뿌릴 사람이 있는가? 인격이 망가지고, 사람 구실 할 수 없는 자에게 진노하지 않는 아버지야 말로 참 아버지가 아니다. 이 진노는 술먹고 아들을 패대기치는 성질냄이 아니다. 걱정이다. 안쓰러움이다. 사랑이다.
개판치던 아들, 아버지의 화만 돋구는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와 사랑으로 교제하며 변화된다 생각해보라. 이제 그는 더이상 진노의 대상이 아니다. 본문의 그림이 딱 그렇다. 아버지의 걱정이 풀린다. 얼곧은 사람이 나타났기에, 그로부터 얼바른 사람들이 생겨나기에, 진노의 대상들이 이제는 믿음직스럽다. 의롭다.
그림을 하나 더 떠올리자면, 출애굽의 그림이다. 이집트에서 인간답지 않게 살다가 그 피 안에서 구출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맘을 상상해보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스라엘, 너는 내 맏아들이다!''였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이.
*피 : 출애굽 그림을 더 생각해보자. 피는 다름아닌 어린양의 피다. 곧 예수의 피. 완전한 인간이 부당하게 죽었다는 그 사건.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분의 말씀이 실로 이루어지는 순간. 그 피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예수께서 온 몸을 메가폰 삼아 온누리를 진동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
'죄'는 발음이 '하마르티아' 인데, '피'는 '하이마티(dat.)'다. 그래서 '그 피로 죄 사했다'는 표현 같은 경우 비슷한 발음이 두 번 반복된다. 발음부터가 죄와 피는 밀접한 상관이 있다. 고대 근동의 계약 장면을 상상해본다. 양 편에 계약 당사자들이 있고 그 사이에 제물된 생명이 온통 피를 쏟은채 죽어있다. 이것으로 계약은 생명을 건 약속이 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속을 맺었다.(창세기 15장) 그 약속의 내용은 요약하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피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마침내 고대의 언약이 그에게도 이뤄진 것이다.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사람의 새로운 출생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부자지간인, 세상을 새롭게 하는 광야길로 들어선, 살아서 돌아온 언약의 제물을 따라가는 사람된 것이다.(제물이 언약의 첫번째 결과물이라니! 그 분이 하나님이라니!)
*구원 : 두 번째 문단에서 보면 구원의 뜻이 드러난다. '지상을 떠나 하늘에 있는 어딘가로 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은 장소 이동이 아니다. 희랍어로는 '소조'인데, 기본뜻은 '유지'다. '보존'이다. 하나님 형상의 유지, 보존.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보존하려면 인간은 지금의 처참한 상황에서의 도약이 필요하다. 인격의 변화, 참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참 인간다움은 하나님다움이다. 타락의 밑바닥에서 하나님께 이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어디 갈 것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신다. 사람은 세상의 미래다. 사람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지는건 시간 문제다!
장소이동의 의미로 생각하면 '더욱 더 구원 얻다' 라는 말은 상상할수도 없다. 덜 떨어졌다는 것인가, 더 올라갔다는 말인가? (덜떨어지다?) 가긴 어딜 가는가? 장소가 아니라 인격이 올라가고 떨어진다. 인격이 하늘에 닿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구원은 우리가 참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인격의 변화를 동반한다. 분명하다.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진입했다. 완전한 인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나도 죽었음으로). 그리고 그의 '다시사심'으로 더욱 그러한 사이가 깊어진다(나도 다시 살았음으로). 하나님과 생사를 함께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이 깊어지다 못해 이젠 기쁘다! 기쁨의 이유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사람과 사랑으로 기뻐한다. 이러한 사람 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으로 기뻐할 때 '세상을 바꿔야지 바꿔야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달라져있는 것이다! 하나님 세상에 내고자 하시는 사람이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