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으로, 날까지(pros, 향하여), 함께(dia, 통하여) : 바울은 다시 출애굽 이야기로 문장을 구성한다. 약속에 신실함으로 이 출애굽은 시작된다. 즉, 가짜 왕이 다스리는 현시대라는 시간, 악한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출애굽하는 것이다. 왜 출애굽하느냐? 그저 나 하나 편하고자 함이 아니다. 세상이 더럽고 치사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내가 딛고 있던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엇인가? 진정한 공동체의 꿈이다. 타락이 뒤집히는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의 모든 죄과의 용서다. 몸의 새로워짐이다. 세상이 에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약속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래서 이 출애굽의 목적지는 하나님이다. 그 분은 우리의 가나안이다. 그 분은 약속 믿고 나간 이들의 최종 목적지, 반드시 만나야 할 아빠. 그래서 출애굽은 아빠 찾아 삼만리다. 약속은 아빠를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죄가 용서되고, 네 맘이 새로워지고, 너와 같은 사람들과 한 몸을 이루게 되고, 그들의 몸이 새로워진다는 모든 약속들은, 아빠를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누군가 부활은 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다.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해도 죽지 않는 몸을 얻음이다. 모세를 뛰어넘음이다)
'너에게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줄 것이요, 마침내 아빠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지금 있는 냄새나는 아비규환의 자취방을 떠난다. 집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해도 놓고 떠난다. 아빠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 부르시는 걸 알면, 다 두고 맘의 자리도, 몸의 자리도 떠난다.
*그 예수를 통하여 : 그렇게 약속 믿고 떠나온 자리는 광야다. 아무 것도 없는 자리다. 아무 것도 없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무 것도 없어야 절대이신 그 분이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등수가 있어야 빛나는 내 성적이 아닌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된다. 그래도 그 분은 계신다. 오히려 여럿 있는 것이 그 분을 가린다. 그래서 새긴 우상들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가리고 혼란만스럽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아빠 만나는 모든 준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나간다. 그 준비는 광야에서 이뤄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광야 여정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나, 바위에서 솟은 물, 마라의 쓴 물에 떨어지는 선택된 나무, 구름 기둥, 불기둥, 돌판에 새겨진 말씀,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난 싹...그 왕의 통치는 광야를 온통 가득 채우고,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 은혜로, 은혜 안에 : 그리고 그 왕의 통치는 '은혜'라 불린다. 모든 것을 '거저'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다스림에는 매매가 없다. 가족끼리 돈주고 사고 팔지 않듯, 하나님 가족의 통치에는 매매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거저만이 있을 뿐이다. 가르침으로 맘을 새롭게 하심도, 공동생활에 필요한 모든 먹거리와 환경도,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심도, 몸의 새로워짐도 모두 거저 얻는다. 그래서 은혜다. 그 안으로 거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약속 믿고 나온 사람들은 거저 들어가 거저 그 안에 서 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다스림 속에서 거저 산다. 노래하고 거저사는 하나님의 각설이랄까.
*하나님 드러나심 소망하며 : '영광'을 드러남으로 고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다스림 안으로 들어왔는가? 약속을 믿어서라 하지 않았나? 신실함이 출애굽의 시작이라 하지 않았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드러나심 바라며"다. 수미상관이다. 신실함은 약속에 충실한 것이요, 약속에 충실한 것은 그 약속한 이를 믿는 것이며, 그 약속한 이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제 내 눈 앞에, 세상 앞에 드러나길 바라는 것. 다시 말해, 아빠 만나기 바라는 것.
*압제, 견딤, 시험, 인정, 소망 이룸 : 환란이라 되어 있는데, 기본 의미는 press, '압박'이다. 약속을 믿고 예수의 광야 통치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안에 압제가 있다? 파라오의 통치는 더이상 이스라엘에게 닿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스라엘을 압박한단 말인가? 그 압박은 실로 파라오보다도 강력하다. 사람 맘의 거짓됨에서 솟구치는 압박이다. 몸의 욕구에 의해 시들어가는 진실됨이다. 이 거짓된 맘과 거짓된 욕구를 따르는 사람들의 영향속에 사는 것 역시 압박이다.
그러나 이것을 견디라 한다. 견딤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풀무질이기 때문이다. 맘의 거짓됨을 일소하고, 몸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세상을 회복시키는 도구삼는 여정이 광야길이다. 이것은 곧장 광야 시험으로 연결된다. 이 '시험'이 바울이 정교하게 짜놓은 문장의 중심에 있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이 아니라, 광야에서의 시험이다. 1) 먹고 사는 문제(몸) 2)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테스트해보는 문제(맘) 3) 세상 권세에 절하는 문제(세상)
이 시험에 빠지고 싶은 몸과 맘을 견디고, 세상권세에 굴복하지 않아서, 시험에서 통과했다는 인정을 받으라는 것이다. 파라오는 떠났으나, 니 맘과 몸에, 그리고 도처에 파라오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그 파라오를 이기는데,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내 힘만으로 하느냐? 아니다. 나도 힘내어, 하나님도 힘내어. 내 안과 밖에 파라오의 흔적만 있냐? 예수의 흔적도 있다. 내 안에는 성령이, 내 밖에는 예수의 역사가 있다. 그러니 이길 수 있다.
그럼 소망을 이룬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 몸과 마음의 욕구를 넘어선 더 큰 분이, 작아진 나를 통해 나타난다. 그간 숱하게 넘어졌으나 내 안에 있던 진실된 맘이 바라고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를 통해 옳으신 한 분 드러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창조하신 '인격'의 본래 모습이다.
* 이 소망이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몸과 맘을 죽여, 세상에 하나님 드러내고자 하는 이 소망'이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아마 이런 동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동네 사람 모두가, 자신의 몸과 맘을 드러내려고자, '하나의 옳은 뜻'이 아닌, 자기 자신만 높이려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래서 매일 이것 저것 자랑하고, 배려라고는 조금도 모르며, 무언가를 많이, 높게 쌓는 일에 열중하고, 누군가 보다 높아질 생각만 한다. 그 결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이 생기고,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태에서, 어떤 이들은 떵떵 거리며 잘 사는데, 도시 구석에는 노숙인들이 즐비해있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람들은 날마다 공허해한다. 당신은 이런 동네에 살고 싶은가?(여러분의 동네는 어떠한가?)
바울이 편지를 쓴 동네가 그러했다. 로마. 카이사르를 신이라 숭배하며, 지중해 온 전역을 식민지 삼아 끊임없이 전쟁하며 짓밟고, 생명과 관계된 것은 하나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온통 빼앗아 지배계층들이 모든 생산물자를 독점하여, 도시를 살찌우는. 역설적으로 줄곧 인구문제와 식량문제에 허덕였던 로마가 바로 그런 동네다.
이런 도시 속에서 위에서 말한 소망을 붙들고, 시험에서 견디며, 여자든, 노예든, 아이든 할 것 없이 모두를 인간답게 대우해주며,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가족처럼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손가락질 당했다. 너희들이 바라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비웃음 당했다. 나중에는 비웃다 못해, 사자 우리에 집어넣고, 검투사들의 칼에 찔러 죽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이 뿌리신 씨알들의 소망은 꺽일 줄 몰랐다. 뿔이난 로마의 자칭 신들은,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 죽이기 시작했는데, 신이라 자처하던 10명의 로마황제(A.D.54~305)에 의해 무려 300만의 소망 가진 이들이 죽임 당했다.
로마서가 쓰이던 시기는 A.D 56. 네로 황제에 의해 박해가 이미 시작된 시절이었다.
로마에 살던 소망 가진 이들이 '이 압제', '이 견딤', '이 인정'. '이 소망' 이라고 한 것은(앞에 관사가 계속 붙은채로 병렬 되어 있어, 우리 말의 '이'로 살려보았다)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단어들이었다.(이this-저that-그it 순으로 멀어진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압제, 견딤, 인정, 소망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삶에서 보는, 느끼는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압제가 있었고, 실제로 견뎠으며, 실제로 인정받고자, 소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니다. 단어는 소망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 압제로 시작되었던 단어의 꼬리물기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몸의 안과 밖에서 총제적으로 시작되었던 압제의 결말은 사랑이었다. '압제'에서 시작되었던 단어들은 '견딤'과 '인정'으로 역전되어 '하나님 사랑'에 이른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숨결, 즉 성령에 의해 마음에 부어진 것이다. 숨과 숨이 닿았다. 숨과 숨이 닿으면,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느낄 수 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지니 분명 가까운 것이다! 압제를 뒤집어 사랑으로 역전시키는 그 맘이 성령, 곧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요, 이 맘으로 사는 자. 부자유친이다. 아빠와 가깝다. 숨으로 서로 연결되니, 아빠와의 만남이 정말 '코' 앞이다!
11390日. 압제 받는 이들이여, 함께 소망하며 소리 높이자.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