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거스르는 상황 중에도 소망을 바라보며 : 영어로는 against hope, in hope. 더 간결하게 우리말로 풀 수가 없을까? '역(逆)소망 중에 견(見)소망하며' 하면 라임은 맞지만, 뭔가 억지스럽다. 더 좋은 것 있으면 제보바람.
소망은 바라보는 것이다. 미래상이다. 종말론이다. 소망을 거스르는 상황 속에서도 뚫어봄(覺)이다. 그래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소망은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현재를 관통하고 미래로 던져진다. 바울의 문법을 잘 보라. 믿음은 '과거'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소망은 그 말씀을 근거로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다. 마치 투수와도 같다. 하반신은 믿음이다. 말씀의 마운드 위에 굳건히 세우는 것이다. 포수 미트를 바라보는 것이 소망이다. 바람이 불고, 컨디션이 안좋아 제구가 안되는 날이라도, 포수 미트를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향해 힘껏 휘두르는 현재가 있다. 하체가 튼실하고, 던지려는 곳을 정확히 보고 있을 때, 투구동작에는 망설임이 없다.
아브라함은 제구가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볼을 던질 수 없는 지경의 상황이었다. 몸이 이미 죽었다는 표현은, 남자로서 구실을 다했다는 말이고, 그의 부인 역시 폐경기가 지나도 한참 지나서, 이 둘의 만남과 생명출산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통해서 씨알이 시작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과거사실을 믿었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갈망했다. 그러한 그의 현재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른 말로는, '힘내어'였다.
*힘내어 : 하이데거는 "사람은 던져진 존재"라 했다. 자신의 뜻따라 이 땅에 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의 출생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이 땅에 내던져진 채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사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러한 인간이 힘을 내어 살 수 있겠나?
'힘내어'라는 단어를 고르다가, 충수염이 걸렸을 때가 생각났다. 배가 뒤틀려 죽을 것 같았던 곳은 서울이었다. 우리 집은 수원인데, 도저히 못 걷겠어서, 공중 화장실에서 몇 시간을 엎어져 있었다. 그러다 집에는 가야겠어서,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걸어오는데, 한걸음 한걸음이 정말 힘들었다. 조금 걷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진짜 힘을 냈다.
어느날 충수염 환자로 던져져 불안과 공포를 느끼던 내가, 힘을 내어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지가 소망이다. 내가 그냥 던져진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어 던져졌음을 뚫어 보고 있으면, 힘을 낸다.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도 힘을 낸다. 그래서 '역(逆)소망 중에 견(見)소망' 하는 사람만이 진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비교할만한 건 아닌데, 우습게도 나는 그 시절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생각이 났다. 힘을 내는 예수.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충격적인 사실은, 힘내는 또 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믿는 바에 힘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도)약속하신 바를 힘내어 이루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사람은 믿는 바, 곧 말씀에 힘내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힘내어 이루신다. 둘 다 힘을 낸다. (개역성경에는 '믿음에 견고해져서'와 '능히'로 번역되어 있으나, 희랍어는 같은 단어다. '듀나미스'. 힘이다) 이 관계가 '의'다. 옳다! 그가 말씀하신다. "너 힘내고 있어? 나도 힘내고 있어!" 그야말로 믿음직한 관계.
*그래서 "그에게 의가 선언되었습니다." : 정리해보면, 아브라함이 소망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바라며, 현실 속에서 힘을 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의가 선언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의가 선언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전에 살펴본 '의'의 네 가지 용례를 살펴보면,
1) 아브라함의 이전 삶과는 상관없이 그가 '법정'에서 옳다 인정받은 것이요,
2) 하나님과 함께 힘내는 '하나님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요,
3)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신실함을 가지고, 약속을 이루셨다는 말이요,
4) 이제 약속이 성취되는 오는 시대가 열렸다는 말이다.
아직 아브라함에게는 1), 2) 만이 해당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3), 4) 까지도 해당된다. 이 3), 4) 가 아브라함이 보고 있던 미래상이다. 소망이었다. 힘 낸 이유였다.
*이제 막 선언을 받을 우리 : 왜 선언을 받았다 하지 않고, 선언을 막 받을 것이라 했는가? 오늘 우리는 의의 신분에 대한 세 가지 차원을 살펴봤다. 먼저, 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둘은, 그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는 것이다. 셋은, 이러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실에 힘내는 것이다. 약속 성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 미래의 소망 마저도 이루어질 그 날이다.
이 날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마치 이스트가 들어간 빵이 부풀어오르듯, 현실 속에서 미래가 갑자기 터져나온 것이다. 마치 다윗과 같다. 왕으로 임명 받았으나 도망자 신세였던 그와 같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새로운 왕권이 온 이스라엘에 가득 찼다. 마치 예수와 같다. 세례 받으실 적에, 하나님 아들임이 선언으나,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삶을 사셨다. 우리의 삐뚫어짐(죄) 때문에 그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당한 것은 분명 옳은 일이었으나, 제자들 마저도 그를 버려두고 도망갔다. 그러나 그가 옳았다는 것이, 그의 의가 빵이 부풀듯 터지듯 세상에 알려졌다. 부활이다. 그가 왕이다.
그래서 그 예수를 믿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가진 의는 숨겨진 의. 그들은 이면적 유대인이다. 그러나 이것이 분명하게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온다. 어떤 날인가? 우리의 부활이다. 현시대의 마지막 밤이다. 언약 성취의 최종국면이다. 우리의 의를 위해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힘 내시는 일이다.
그래서 선언을 받았으나, 선언을 받을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이 일이 남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곤두박질치고, 이제 선언을 받은 이들이, 다시 그 선언을 '막 받으려 한다.'
이 어찌 모든 이가 믿고, 살아, 소망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11389日. 나도 힘을 낸다. 생각은 잇고, 몸은 끊는다. 생각을 몸으로 돌려받을 때까지 잇고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