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 : 개역성경에는 '후손'이라 되어 있으나, 본래 단어의 의미는 두 가지다. 1) 씨 2) 후손.
류영모, 함석헌 선생이 쓰시던 '씨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말이라 생각하여, 고쳐봤다. 씨알이라는 말은 생명을 품고 있어, 잘 길러져야 할 민중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씨'는 절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뿌려졌다는 것이요. '알'은 생명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민중을 뜻하는 말로 쓴 것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썼다. 바울은 그의 독특한 표현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가 '그 씨알'이라 했을 때, 그것은 한 사람만을 가리킨다.(갈3:16을 보라) 그래서 그저 '씨알들' 하지 않고, '그 씨알'이라 하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씨알,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을 받아 그 생명 온누리에 틔워내기 위해 가장 먼저 썩어진 최초의 씨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이렇게 생각하면, 바울이 왜 '아브라함과 그 씨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씨알'이라 썼는지도 분명해진다. '이나'라는 말은 어느 한 쪽을 빼놓아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신실함이 곧 예수의 신실함이기 때문이다. 신실함은 언약에 충실함이다. 아브라함이든, 예수든 한 언약, 같은 언약이다. 그 언약은 무엇인가? '세상을 상속받으리라'
*세상을 상속 받으리라 : 지금 무엇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돈? 명예? 미디어? 이 모든 것들을 장악한 지체 높은 사람들의 인맥? 우리는 이러한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당연히 안다. 이것을 알게 하는 정신은 무엇인가? 옳은 것을 알게 하고, 때로는 그것에 저항하게 하는 그 마음은 어디서 왔는가?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인가? 사람이라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히틀러에게 세상을 맡길 수 있나? 아무나에게 맡길 수 없지. 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바로 그러한 마음 가진 사람에게 상속한다. 그렇다면, 옳은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전체를 살리는 마음이다. 전체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햐 하는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 명예, 생존을 전체를 위해서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함으로 전체를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 전체를 잊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살리기 위해 죽는 것이다. 바로 이 마음으로만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 마음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면, 전체가 산다.
현실을 돌아보면, 이 그리스도의 정신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세상을 붙잡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는 사람이다. 진정한 인간다움이 거기에 있음을 알기에, 믿는 이는 죽음으로 생명낳는 그 씨알의 삶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맡기셨다. 그래서 이들은 인류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을 비추는 등대요, 세상을 보존해나가는 의인 열사람이다. 그들은 숨어 있으나, 세상을 보존한다. 신의 사명을 살아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부활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상속받으리라'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언짢게 들린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 길이 참으로 인간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도 그리스도를 따르면 된다. 그 길은 어느 모로 살펴보아도 그릇된 것이 하나 없다. 함께 전체를 위해 죽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살아나자는 것이다.
*알맹이 없는 : 개역성경에는 '헛것'이라 되어 있다. 비어있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알맹이가 무엇인가? 알맹이라는 말은 앞서 언급한 씨알이란 말과도 잘 들어맞는다. 생명이다. 본질이다. 내용이다. 이것이 빠지면 내용없는 빈깡통이 된다. '신실함이 알맹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믿었는데 배신당한다는 말이다. 꽃뱀이다. 작전주다. 사기다. 거짓이다. 인종, 학벌, 직업, 계층, 성별에 상관없이 그 옳으신 뜻에 신실하게 살아 왔는데, 오히려 율법에 속한 유대사람만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아마도 처음 예수 공동체가 생겨나던 당시,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율법 따르지 않고, 신실함을 따랐다가 하나님께 배신당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실상은,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 중에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오히려 하나님의 화를 불러오고"), 율법을 독점해버리면, 율법 밖에서는 율법을 어긴 일도 생각할 수 없으므로, 우리 말고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도 없다고 할 것이다.
*믿음으로부터...이르는 것입니다 : 희랍어 전치사들이 순서대로 놓여있다. 바울의 머리속에는 지금 출애굽 여정이 그려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시작은 '~로 부터'다. 출발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율법지킴이나, 가문이나, 계층이나, 인종으로 되지 않고, 믿음으로만 된다. 약속에 신실함으로만 된다. 이것 말고 다른 시작은 없다.
그 신실함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은 광야의 여정과도 같다. 먹고 사는 문제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며, 세상 권세에 절하지 않기로 하는 삶이 어디 쉽겠는가? 그러나 그 과정에는 '은혜를 통해서' 이뤄진다. 거저 주시는 가르침과 돌보심이 그 광야 길에 있다. 과정이다. 그러니 지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어디에 도달하는가? 가나안이다. 언약 이뤄짐이다. 그렇게 첫번째 씨알을 따라갔던 씨알들에게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 씨알 하나가 죽어 여러 씨알이 되고, 이들이 하나님 주신 약속의 땅인 세계 위에서, 전체를 섬기는 새로운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이 함께 살아난다. 함께 살아, 함께 살아남!
이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은 신실함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율법이 아니다. 특정 계층에 소속됨도 아니요, 특정 글자에 매임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 그 분께 신실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만나서, 그 분께 신실하고자 할 때만이 이 위대한 출애굽은 발걸음을 뗀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어제 아브라함에 대해서 논했던 것을 참조할 것. 한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다민족의 조상. 즉, 아브라함과 연결된 하나님의 가족은 다민족이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 : 하나님을 만났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던 것이다. 이 죽은 자들이 누구인가? 이 없는 것들이 누구인가? 언약에 신실하기 이전, 너와 나의 모습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다. 100세가 넘은 할아버지를 통해서 언약을 따라 새로운 생명이 생겨났을 때, 그리고 그 생명을 죽이라 말씀하신 그 분을 따라 손에 칼을 쥐었을 때,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은 살리시고, 부르신다. 그러니 그 분의 소리가 들리면, 그럼 살아나서 걸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믿고서, '그렇게' 했다. 약속 이뤄짐을 믿고 가나안으로 걸었다. 하나님이 그러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따라갔다. 그 분의 언약 이뤄질 것이 그의 삶의 방향 되었다. 이 '그렇게'가 신실함이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하나님의 다민족 가족에 참여한다. 이 경계없는 가족이 전체를 위해 고난 받는다. 세상을 상속받는다. 그리고 완전히 살아, 완전히 있게 된다.
11388日. 세상이 점점 다민족 공동체를 이룰 수 밖에 없게끔 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 많이 들어온 것은, 경제상황으로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연결된 이들은, 피부색에 관계 없이, 신실함만이 요구된다. 11층 아저씨들에게 말을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