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묻는 것은, 다윗이 말한 이 복이 유대사람에게만 속한 것이냐, 모든 사람의 복이냐의 물음이다. 이 복은 용서의 복이요, 죄 덮음의 복이다. 이 용서와 죄 덮음에서부터 인격은 소생한다.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새로움이다.
용서의 반대는 무엇인가? 정죄다. 죄를 묻고 따져 들어가서, 너 진정 죄 있다고 못받는 것이다. 물론 잘잘못을 가릴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용서의 결말로 끝나지 않으면, 잘못한 사람의 인격은 못박힌채 피흘린다. 죄를 규명하려는 것은, 사람 살게 하기 위함인데, 죄를 규명하다 사람을 죽여놓으면 본래 목적을 잃은 처사가 된다. 인권 운동가가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구하고자, 부자들을 살해해서는 '인권'을 위해 싸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죄하는 일에만 정신팔려서 사람 죽는 것 모르면, 자기 잘났다는 소리 밖에 안되는 것이다. 용서다. 끌어안음이다. 여기에 인간다움이 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 있다고 했다. 즉, 인간은 삐뚫어지고 왜곡된 면모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을 향해서 용서와 덮음을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인간에 닿아 있으나, 인간을 넘어선 존재요. 타인의 잘못을 끌어안는 그 힘을 우리 속에 불어넣어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의 용서와 죄 덮음을 가리켜 다윗은 '복'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 복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말한 복처럼, 흘러간다. 용서받은 이가 용서하며, 서로가 서로를 깨끗케 한다. 용서가 사람을 타고 퍼져가며, 피리된 사람들을 통해 용서의 화음이 온세계를 진동시킨다. 노동과 대가로 숨쉴틈없이 짜여진 이 세상 속에서, 창조주의 호흡으로 진정한 인간다움을 노래한다. 신의 용서다. 인간의 용서다.
문제는 이 복을 독점하려 했었다는데 있다. 물은 흘러야 맑고, 고이면 썩는데, 하나님의 복은 모든 사람에게 순환되지 않으면, 계급 삼기 좋고, 특권 되기 쉽다. 그 분이 권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복을 독점하려던 자들은,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유지하고자, 이 복이 인격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복의 살점을 찢고, 피흘리도록 찔러 죽였다. 그 복은 스스로 이 부당한 죽음을 당하므로, 모든 민족에게 이 복을 해방시켰다. 하나님의 용서. 더이상 아무도 그 복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중간에 아무런 권위도 거치지 않고, 사람은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간다.
*신실함 : 그래서 신실함이다. 믿은 및이다. 하나님께 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감이다. 믿어 용서 받는 것이다.
('믿음'을 이 단어로 번역했는데, 몇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어서 써둔다. 우리는 무언가를 글자로 표현할 때,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정(精)과 동(動)이다. 즉, 고정되어 있는 명사로 표현하거나, 움직이는 동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해서, 우리의 정신 속에서 명사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무엇이고, 동사는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엇이 된다. 그러나 정신 밖으로 나와 몸을 통해 경험하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정하기만 한 것이 어디있으며, 동하기만 한 것이 어디 있는가?
믿음도 그러하다. '하나님께 믿음을 갖는다' 라고 명사로 풀어놓으면, 움직이지 않는 불변의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 신실하다' 라고 동사로 풀어놓으면, 하나님께 갖는 태도와 행동에 강조점이 있다. '믿음', '신실함', '미쁨', 약속에 충실함' 모두 같은 의미인데, 이렇게 명사냐, 동사냐에 따라 다가오는 늬앙스가 달라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읽는 이가, 이 단어의 뜻을 몸으로 알고 있어서, 고정된 글자 속에서 움직이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이 과정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여러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고쳐서 생각으로 씹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믿음'이냐, '신실함'이냐 매번 고민을 하다가 쓴 것이니, 단어가 나올 때 꼭 고쳐 씹어보시길 권면드린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그 신실함을 의로 여기셨다" : 만약 유대사람이라면, "아브라함에게 있는 그 '할례'와 '율법지킴'을 의로 여기셨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이 '복'이 유대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근거로, 바울은 창세기의 맥락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인용한 저 사건이 벌어진 때가 창세기 어느 부분인가? 15장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맘으로 믿고 몸으로 충실하려는 그를 자신의 가족이라 인정해주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대사람의 할례는 창세기 몇 장인가? 17장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할례받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 할례는 나중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가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의롭다 선언하시는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복을 할례의 울타리가 가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 말들은 유대사람들은 잘못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의 편지에는 반유대주의의 흔적이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유대사람들이 할례로 가두어 놓은 하나님의 복이 그 전모를 드러내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이 드러났고, 그 모든 사람에는 유대사람도 포함된다! 그래서 모두를 위해 할례가 아니라 신실함이다. 약속에 충실함이요, 몸과 맘으로 예수를 따름이다. 이 길 뿐이다. 하나님께 닿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하나되어 조화를 이룬다. 참된 사랑과 용서의 근원을 경험한다.
*확인 도장 : 그렇다면 할례는 무엇인가? 확인 도장이다. (개역성경에 '인'이라 번역되어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면, 달리기 1등부터 3등까지 손등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 도장 받은 사람들은 공책을 상으로 받는다. 도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정'이다. '너 인정 받았다'의 표식이다. 만약 어떤 아이가 집에서 도장을 파와서 손등에 찍고 나타나면, 그 아이는 정말 달리기를 잘했다고 인정받은 것인가? 유대인들은 이 도장이 있냐 없냐로 문제를 몰고 가지만, 이것은 표식에 지나지 않다. '할례는 신실함으로 얻은 의'가 중요한 것이다. 달리기 2등한 아이가, "저 도장 못받았는데요?" 하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손목에 아무 문제 없이 도장을 찍어준다. 그러나 도장을 위조한 아이가, 저도 달리기 잘했는데요? 한다면?
게다가 이제는 인류가 하나님의 의를 확인하는 그 도장 찍는 방식이 바뀌었다! 새로운 도장에 관해서는 바울이 뒤에 언급할 것이다.
*아브라함 : 아브라함도 재해석된다. 유대사람들은 모든 민족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미래를 생각했지만, 미래는 그들의 그림보다 컸다. 하나님의 그림 속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사람만의 조상이 아닌, 모든 다민족의 조상이 된다. 다민족의 조상에 관한 내용은, 이 흥미로운 영상을 참조하면 좋겠다.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의 조상이기도 하고,
자신이 할례받지 않았을 적의 신실함의 발걸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할례자들에게도 신실함이 요구되고,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신실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신실한 자들의 조상이다. 혈통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 신실함으로 묶인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