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새롭게 이해해야겠습니까? : 개역성경에는 "무엇을 얻으리요" 로 되어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 '얻다'는 표현은 없다. '에우리스코'라는 단어를 쓰는데 의미는 find. 영어성경대로 '발견되다'. '인식되다' 라는 말이 맞다. 바울은 '신실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다'고 말한 이후, 그럼 아브라함의 위치는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브라함~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 유대사람들은 아브라함이야 말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의 전형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상을 두고 있는 것은 유대사람들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율법이 아닌,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다고 해도, 아브라함의 지위는 여전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가족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을 버린 집안의 자식이었고,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이 무언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저' 부르셨기 때문이다.
*노동과 급여 : 노동력을 '팔고', 그에 대한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 이것은 어느 사회나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당연이 통용되는 이 사실 때문에 분배에 차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차등은 착취를 낳고, 인간은 그 아래 송장처럼 깔린다. "사회를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적인 피라미드가 치솟는다"는 도널드 크레이빌의 말은 옳다. 지금도 이 거대한 경제적 피라미드를 위해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흙벽돌을 굽고, 소수의 사람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호의호식하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이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팔고 대가를 받는 방식은 진리를 운용하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노동과 급여 방식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율법은, 분명 본질상 그러한 것이 아님에도, 오염되고 왜곡되어 사회의 일반원리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특정 목록을 힘써 일하므로, 하나님의 가족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마치 노동과 급여와 다를 것이 무어냐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율법을 해석하는 각기 여러 파당들이 있었는데, 그 파당들은 자신들이 해석한 율법을 목록화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얻는 길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급여로 만들어 버렸다. ('급여'라 고친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삯'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으나, 요새는 아이들이 이 말을 잘 모르더라)
노동-급여 사이에는 용서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공평으로 돌아갈 이유도 없다. '해야 하는 노동'과 '받아야할 대가'만이 있을 뿐이다. 컴퓨터가 그렇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바이러스가 된다. 바이러스는 몰아내야하는 일이지, 컴퓨터를 운용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지금 이스라엘의 율법이 이와 같다. 노동하고 대가를 받는다. 이외의 것이 필요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필요 없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급'이라는 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께서 끝내 시험에서 극복하셨던 것이(마태복음 4장), 생계 수단에 목매는 것이요, 자신의 정당성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요, 폭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상급'이라 부르며,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은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노동과 급여 관계로 왜곡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은혜 : '거저'는 '은혜'라는 말의 본 뜻이다. 이 '은혜'라는 단어는 체제전복적인 단어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과 '급여' 사이에는 '거저'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런데 그 끼어들 자리 없는 곳에 은혜가 떨어지면, 노동과 급여 관계는 무너진다. 누군가는 노동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착취하여 누리는,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 있는 곳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마음이 상한 자가 위로를 받으며, 부드러운 사람이 땅을 다스리고,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만족하게 된다. 이 모두는 노동과 급여 관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부터 이유없이 흘러나오는 것으로만 '거저', 즉,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음을 뜻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류영모 선생의 말에 따라, 인간은 피리가 되어야 한다. 피리는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소리가 나는 악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면, 하나님이 우리를 연주하신다. 은혜의 가락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간다. 거저에서 거저로 연결되어, 타락을 해결한다. 그래서 '거저'는 '신실'에서만 나온다.
*계산 : 바울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존경하는 왕, 다윗도 그러했음을 예로 든다. 다윗의 말에서 '계산'이라 번역된 부분을 주목하라. '노동과 대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은 나에 대해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지 않는데, 내가 오늘 누구를 계산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