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 : '법'이란 단어를 고쳤다. nomos라는 말을 쓰는데, 뜻이 광범위한 단어다. 유대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를 가리킬 수도 있고, 유대 밖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체계, 질서를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용례는, 우리말의 "니 말이 법이냐?"의 '법'과 같다. 우리는 누군가와 무엇이 옳은지를 놓고 다툴 때, 옳은 것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나도 옳다 인정하고, 동시에 너도 옳다 인정해야하는 것은 무엇이 기준인가? 나여도 안되고, 너여도 안된다.
자식에게 거짓말하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부모의 근거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거짓말 한 번도 안해본 부모는 없기 때문에, 분명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그 무언가에 기대어 말해야 한다.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기준. 인간을 넘어서 있는 기댈 수 있는 근거.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하나님 앞에서'. 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가리켜 바울은 '법'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선조들은 이 말을 법(法)이라 번역했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은 모든 인간을 넘어서 있는 올바름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말하는, '법아(法我)를 찾자'는 외침은, '모든 인간을 넘어선 기준과 근거를 찾자'는 말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찾자'는 것과 같은 울림이다. 다만, 오늘날의 불교는 이 法을 제정하신 이에 관한 말이 없고, 여여(如如)하다 하여 '법계가 그저 있다'고 한다는 점이 창조를 말하는 성경과 다르다.
*자랑스러운 글자들 : 하나님 앞에서 정당성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 주신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율법들의 세부항목들을 만들었다.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물음>에 보면, 가장 최적의 시간과,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가장 중요한 일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냐는 왕의 물음에, 모든 시간, 날, 월, 년 계획을 짜서, 그대로 실천하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각 유대 분파들은 율법의 세부규정들을 글자로 박아놓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이라 외치며, 그 글자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것을 준수하는 것이 개역성경 본문의 '자랑'과 '행위'의 의미이다.
그러나 어떤 분파에 소속되어, 특정 글자들을 자랑하며,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정당성(義)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불교에 속하여, 불경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려는 것으로도 안된다는 것이다. 아프게 말하자면, 기독교에 속하여, 성경 글자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려는 것으로도 안된다는 것이다. '안된다는 말'은, 법이 아니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 인정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이르는 준비만은 될 수 있다.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 말한 바대로, 당사자를 만나지 못하고 읽는 편지는, 후견인 선생의 기능을 할 뿐이다.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의 인격에 신실함 : '믿음의 법'을 푼 것이다. 위의 말을 이어서 하자. 그럼 무엇으로 되는가?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옳다. 믿음은 무엇이냐, '믿'은 '및'이다. 미치는 것이다. 다다르는 것이다. 법을 제정하신 이에 닿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 왕이시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그 분께 닿을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리움이다. 닿아야 하나 닿을 수 없는 한 분을 그리는 것이다. 그 분을 그리워하며 그린 것이 글자다. 인간의 모든 글자가 한 분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왔다면 과장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유대사람들에게 떨어진 계시는 그리움에 대한 회신이다. 그리움의 대상을부터 온 답장이다. 이 답장을 들고서 유대사람들이 집배원이 되어 뛰어나간다. 보냄을 받은 집배원은 곧 '사도'다. 사도들이 온누리로 가져온 '하나님의 말'은 곧 예수요, 이 예수를 맘으로 받고, 몸으로 따르면, 곧 하나님의 숨결이 그들 안에 들어와 진정으로 만나주신다. 말과 숨으로 대면하는 한 분 하나님. 실제로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간 믿음을 계속 '신실함'으로 풀어왔다. 인격과 인격의 조우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인격 앞에 대면하지 않고는, 어디에 속해있든지, 어떤 글자를 붙잡는지, 어떤 노력을 붓던지가 소용없다. 오히려 힘 빠진다. '믿음의 법'. '법'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요, 그것은 '믿음'으로 되는데, 믿음은,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의 인격에 신실하게, 충실하게 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과 피조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 바울은 그림을 계속 확장해왔다. 아브라함에서, 출애굽 어린양으로, 지성소에서 벌어지는 희생제사로, 그리고 당시 글자들을 붙잡고 있던 이스라엘 분파들의 현실로, 유대와 이방민족들의 반목으로, 그리고 그림은 더욱 커져서 여기까지 왔다. 창조의 그림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유일신' 신앙이라며, 신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 중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얼 빠진 일'이다. 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얼은 영이다. 영이신 한 분에게서 세계가 나왔다. 그래서 세계를 관통하는 진리도 하나요, 세계를 이루는 질서도 하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니라, 모든 곳에 걸리는 한 분이 계신 것이다. 온 세상이 그 한 분의 영으로 가득하다. 팔레스타인 사막의 지역신으로서의 유일신이 아니다. 만유의 주님으로서 한 분이시다.
이 만유의 주님이 온 민족을 부르신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이다. 집나간 아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신다. 그렇다면,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 이 부르심을 거절한채, 글자를 탐독해봐야 소용없다.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를 먹으며 성경을 죄다 외운다 하더라도,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는한 소용없다. 그래서 믿음은 부자유친이다. 아버지와 친하기 위해, 아버지께 돌아감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둘째 아담이다. 글자 보다 사람이요, 그에게 세상 전체를 에덴으로 새롭게 할 권한이 있다.
*율법의 폐기처분 :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가 어떤 부분은 과했는 줄 안다. 글자를 읽지 말자는 소리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바울도 이 걱정을 했다. 믿음을 얘기했다가, 사람들이 기존의 글자들을 다 폐기처분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그의 당당한 말을 들어보라.
그러면, 신실함 때문에 율법이 폐기처분될까요?
결코 그렇게 될리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건히 세울테니까요.
하나님과 친밀해졌기 때문에 율법이 소용없어질까? 아니다. 글자가 있는 이유는 '소통'과 '사랑' 때문이다. 편지를 생각해보라.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것으로 사람과 소통한다.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한 분 하나님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소통과 사랑을 이룬 이들이 글자를 버릴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글자에 얽매이지 않고, 글자를 다스린다. 그들이 글자를 증명하지 않고, 글자가 그들을 증명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얻고, 글자는 그들로 인해 정당성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