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피 안에 있는 그 믿음직함 : 이것은 직역이다. '안에 있는(en)'이라는 말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했는데, 이 부분은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그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의 피'라 함은 특정 사건을 가리킨다. 십자가 사건. 해골 언덕에서 그는 피를 흘렸다.
그런데 그의 피 안에 '믿음직함'이 있다. '믿음직함'은 이전에 '약속에 충실함', '신실함', '믿음'이라 번역했던 것을 고쳐본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 속에서 예수의 믿음직함이 드러난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믿음직했다. 즉, 그가 약속을 이룰 것이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 "다 이루었다" 말한 것을 생각해보라. 하나님 보시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직스러웠던 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웠던 그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예수를 법궤덮개 앞에 세움 : 법궤덮개는 '시은좌', '속죄소'라는 말로 번역되던 말이다. 법궤를 덮는 뚜껑이다. 뚜껑과 그 위에 그룹들을 통째로 금으로 만들어 떨어지지 않게 한 금덮개다. 이 금덮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성소가 있고, 그 성소 안에 지성소가 있으며, 그 지성소에 법궤가 놓이고, 그 법궤 위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레위기 16:2를 확인할 것)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이 법궤덮개 앞에 나아가서, 이스라엘 전체의 죄 용서를 구하며, 제물의 피를 일곱번 뿌린다. 바로 이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이 한 점으로 모이고, 하나님의 용서는 이 한 점으로부터 모든 것을 역전시켜 다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수면 위에 파문이 생기는 영상을 리와인드시켜서 하나의 물방울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그 물방울이 떨어져서 호수 전체에 파문을 만들어가는 그림이다. 첫 장면의 파문이 죄와 복수라면, 나중 파문은 의와 용서다.
개역성서에는 법궤덮개를 '화목제물'로 번역했는데, 바로 법궤에 뿌려지는 피가 화목하게 하는 제물의 피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죽여 피뿌리고 화목을 이룬다. 괜히 죽지 않고, 화목을 위해서. 아무데서나 죽지 않고, 바로 이 한 점에서 죽는다. 법궤덮개 앞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에서 출애굽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성전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하나님의 의를, 예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로 달려오는 과거와 미래의 죄 : '이전에 지은'이라 번역되어 있는 단어('프로깅노마이')는 '이전에'라는 특정 의미 뿐만 아니라, '앞으로'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렇게 번역한 것은,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은 과거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경선 선생은 "예수를 믿고서 지은 죄들은 하나님이 모두 물으신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물으시고도 용서하실 것이다. 죄를 짓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시간이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내가 현실에서 죄짓게 하는 모든 족쇄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법궤 앞 한 점, 십자가에서 말이다.
죄 지은 것 때문에 마음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이 구절을 본다면, '아, 죄를 지어도 되는구나'라 결코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시간을 지으신 이가, 나를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 새롭게 하시는 이임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그 앞에 죄인으로서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있으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선언 : 하나님의 의를 선언하시는 것이, 법궤덮개 앞 예수께서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온통 쏟으신 이유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 '의'의 네 가지 의미를 배웠다. 1) 법정 2) 예수의 신실함 3) 약속이 이뤄짐 4) 새 시대
1) 이 모든 일들이 법궤를 덮음으로서 시작된다. 덮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 아래 십계명이 들어있다. 율법이다. 그 율법을 덮는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빗나가는지를 고발하는 것이라 했다. 그 고발문서를 덮는다. 고발문서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다른 기준을 적용하게 된것이다. (흔히 '죄를 덮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2) 법궤덮개 위에서,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이 제물이다. 제물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 충실히 죽어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피를 법궤에 뿌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라는 충격파가 그 한 점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울 수 있었으며, 어린양 제물로서 하나님 약속 지킴의 포문을 열어재낄 수 있었던 것.
3) 그래서 어떤 일이 이뤄졌는가? 그 제물의 믿음직함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시작된다. 먼저는, 신실한 제물을 맘으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따르면,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한 씨앗으로 부터 많은 이를 얻는 것 ) 둘째는, 이 제물을 따라 제물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온누리에 삶의 터전을 얻게 될 것이다.(약속의 땅) 셋째는, 이렇게 죽음으로 넘기워진 자들이 하나님의 말과 숨으로 산다.(복과 저주의 기준됨) 이들의 삶 속에서 옛 시대는 절단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
이것으로 타락이 뒤집히고, 바벨이 역전된다. 그들을 통해 천(天)과 지(地)가 하나가 되어, 하늘의 뜻이 땅의 뜻이 된다. 마침내 뜻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 하늘도 땅도 새로워지고, 마침내 이들은 이 새로워진 세상을 유업으로 받는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고발을 덮고 그 위에 피를 뿌린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예수다. 하나님의 옳으심이다.
*그의 의가 현시대를 뚫고서 바로 지금 :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있어 이렇게 풀어보았다. 크로노스가 수평적인 연대기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이다. 시간위의 시간이다. 본래 카이로스의 의미는 공간적인 것으로 "틈"이라는 의미다. 즉, 기존의 공간에 균열을 내어 더 크고 새로운 차원을 엿보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새로운 차원의 틈이 여리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 했다. 당신이 자진해서 제물된 한 사람의 신실함 앞에, 신실함으로 반응할 때, 바로 그 때, 새로운 시대가 당신의 시간을 뚫고 돌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서 확인했던 '그 날'의 정체.
*예수의 신실하심으로 출애굽한 사람들 : 바울은 단지 'ek(from)'라고만 써놨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출애굽으로 보인다. 예수의 신실하심을 따라, 생명 위해 죽음을 뚫고 전진하는 출애굽.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과, 이러한 사람들의 의로움을 선언하셨다. 이러한 의로운 사람들이 생겨나야, 아브라함 언약이 이뤄졌다 말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예수가 죽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예수를 짊어지고 제물 되려는 이. 이 하나님 약속을 이뤄드리기 위해 믿음직스럽게 사는 이. 예수의 신실함을 신실함으로 따르는 이. 오늘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새로이 태어나는 오늘이다. 하나님 의롭고, 그러한 사람들이 의롭다. 예수 때문에 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