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 : 이 단어로부터 시작되어, 앞으로 4장까지 새로운 내용이 시작될 것이다. 과거와 달리 무언가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율법'이 갖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주목하라. 율법과 별개이면서도, 율법과 연결되어 있다. 즉, 연결되면서도 새로운 것이다. 아마 부활몸이 그럴 것이다. 기존의 몸과 연결성이 있어, 서로 악수하고 포옹 할 수 있으되, 기존의 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몸.
*하나님의 의 : 여러가지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다층적인 의미가 결합되어 하나의 단어를 이룬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의라는 의미체계가 무너지고, 뜻이 손실된다.
1) 재판에서 승소함
-의는 기본적으로 재판의 그림이다. 지난 시간 유대법정 그림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 법정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것'을 가리켜 '의'라고 한다. 오른편에 선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전에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옳고, 나머지 민족들은 모두 왼편의 피고석에 서있다 생각했던 반면, 앞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이스라엘을 포함한) 율법과 양심에 비추어 죄인임이 판명되어, 피고석에 서있음을 폭로했다.
2) 새로운 시대로 들어감
-유대사람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현시대요,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다. 이 오는 시대를 '영생'이라 번역해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 것은 현시대의 일이 아니라, 현시대의 마지막에, 오는 시대의 시작에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의'는 새 시대의 시작, 오는 시대로 들어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더불어 현시대가 쫑나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끝이자 시작이다. 그래서 의는 새시대의 선언이 된다. 시간 쪽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미래가 현실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즉, 현시대와 오는 시대가 중첩되는 것이다. 자신의 맘에서 현시대를 끊어내고 새 시대를 사는 자. 의인이다. (그리고 그의 맘에 믿는 바대로, 세상 마저도 새로워지는 그 날이 온다)
3) 예수의 믿음직함으로 인해
-아래에 따로 설명함.
4) 하나님의 가족됨
-재판에서 옳다 인정받고, 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다. 결론적으로 '의'라는 단어는 소속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다. 이전에는 유대 사람들만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가족이라 인정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으니 그 길은 '약속에 충실함'으로 걷는다.(새로운 길이면서도, 원래 처음부터 이러한 길이었다) 즉, 약속의 충실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즉,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 것이요, 새로운 시대를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이 모든 뜻을 한자로 옳을 의(義)를 썼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다. 위에는 양이, 아래에는 내가 있다. 양은 제사의 제물이요, 예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아래에 아(我)는 나다. 자기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양과 내가 만나 '옳다'라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나는 최신 서양 문물을 통해 의라는 단어 의미를 배웠건만, 성서를 처음 접하여 번역했던 우리의 선조들은 대체 어떠한 사고 체계로 이 단어를 선정했단 말인가? 어떻게 이리도 훌륭히 의미를 담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 서정범 교수의 어원사전을 보니, 우리말 '믿음'에서 '믿'은 '묻', '및'과 같은 어원이다. 모두 '말'(言)에서 온 글자들이다. 그래서 말을 묻고, 믿어, 마침내 다다르는 것이다.(어디에? 말의 근원에!) 오늘 본문에는 같은 어원의 글자들이 한 문장 안에 들어있다. '믿'도 나오고 '및'도 나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라 되어 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바가 중요해질 것이요,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심을 믿으면서도, 그가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따라야 한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의미에 가까워보인다. 이렇게 해석했을때, '의(義)'라는 단어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재판에서 이기고,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가족된 인류 대표다. 바울이 말한대로 '둘째 아담'이다. 그가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시공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재꼈다. (현시대에 오는 시대를, 가나안에서 온세계로, 이어서 세상이 새로워질 결말을 남겨두고) 그래서 모두가 의롭게 될 수 있다. 어떻게? 의는 약속에 충실함으로만 얻는다. 즉, 그가 약속에 충실했기에, 우리도 약속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말이다. 기회만 던저주지 않았다. 자신의 숨을 주어 우리를 도우신다. 그래서 그를 따르면 우리도 의롭다. 약속에 충실할 수 있다! 피고석에 있던 모두가 재판에서 '옳다' 판결을 받는 반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무엇인가? 아브라함 약속이다. 한 사람으로부터 여럿이 생겨나서, 삶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말과 그에 합한 삶으로 사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브라함 약속의 정체이다. 그리고 이 '약속'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출애굽시킨 이유다(출 2:24). 따라서 이 약속은 곧 공동체의 약속이다. 이 악으로 창궐한 세상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타락을 뒤집는다. 참 인간답게 산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약속을 정말 지켰나? 이 약속과 약속 지킴에 있어, 그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제, 출애굽으로 그림이 넘어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벌어진 어린양 사건 :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속' 이란 말을 고쳐본 것이다. 구속은 '몸값 내어줌'인데, 이 몸값 내어줌은 추상적인 무언가, 의미로만 남아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실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제 사건은 출애굽의 그림 안에서 이해된다. 즉, 예수는 출애굽 그림에서 어린양의 배역을 맡았으며, 그는 십자가에서 실제로 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어린양이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이들이 출애굽하여, 삶의 터전을 얻고, 하나님의 말숨으로 사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가장 결정적 사건이 바로 어린양 죽음이다. 이것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벌어졌다. '온 인류를 빗나가게 하는 악'에게 종노릇 하던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에 몸과 맘으로 신실하여' 자기 자신을 온통 죽음에 내어놓는 한 사람을 보고서, 악으로부터 벗어나 출애굽한다. 빗나갔던 이들이 방향을 틀어 과녁으로 곧장 날아간다. 가장 먼저 어린 양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께 미쳤다. 아빠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 죽임당한 양을 머리위에 짊어진다. 의(義)다.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아버지의 물음 앞에 약속에 충실함으로 답하고 살아간다. '믿-및-묻'이다. 맘과 몸이 진정한 인간다움 삶으로 나아간다. 새 시대를 산다. 영생이다. 아빠 찾아 삼만리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곧장이다. 삼만리도 한걸음이다.
*둘로 찢겨짐 : '차별이 없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약하다. 바울이 모든 인사말에 반복하는 은혜와 평화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은혜는 힘입어 사는 것이요, 평화는 싸움이 없는 것인데, 싸움이 없는 것은 니 편 내 편이 없다는 것이요, 하나를 이룬다는 말이다. 차별없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중심의 세계재편이다. 돈 중심, 명예 중심, 쾌락 중심, 힘 중심, 내 목숨 중심, 생존 중심에서 출해굽 하여 새 중심으로 나아간다. 온누리에 니 편 내 편이 없는 거대한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 그 중심이겠는가? 힘을 주시는 한 분 뿐이다. 그래서 그 분의 의가 예수 안에서 드러났으니, 나도 그 의에 참여한다. 따라서 그 의를 가지고 모인 공동체에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분열과 파당이 없다.(예수를 따른다면서도 이러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삶과 죽음 사이의 생이별도 그 경계가 무너진다. 생과 죽음이, 하늘과 땅이 만난다.
*뚜렷이 드러내다 : '영광에 이르다'라는 말을 고쳐보았다. 영광은 '눈에 드러나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따라 자신의 맘과 몸에서 출애굽한 이들이, 하나님의 말과 숨을 따라 살며, 진정한 인간다움을 이 땅에 공동생활로 구현해낸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몸을 가진 보이는 삶으로 뚜렷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먼저 추려진 글자들이 당신과 나다.
*삐뚤어짐 : 죄. 이전에 '빗나감'이라 했던 것을 다시 고쳤다. 처음과 끝이 관통되었는데 삐뚤게 뚫린 것이니,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의미가 들어 맞는다. 그리고 잘못하고 있는 이에게, '너 삐뚤어졌구나'하지, '너 빗나갔구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 표현이 더 낫다.
죄는 빚과 같은 의미라 한다. 그런데 죄라는 의미의 '하마르티아'는, 피의 여격 '하이마티'와 발음이 많이 닮았다. 혹시, 죄는 빚지는 것이며, 이것은 피로 값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의 일반이었던 것은 아닐까?
11381日 : 하나에서 시작하여 하나로 돌아갈 사람이, 하나와 셋을 팔아먹어서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