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1~7 
  하나님의 뜻을 통해 메시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가족 디모데는 코린토스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게, 더불어 아카이아 전역에 있는 거룩한 이들 모두에게 (편지합니다). 은혜가 여러분에게 평화도 하나님 우리의 아빠로부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찬양하리라
하나님 즉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아빠,
불쌍히 여기는 이들의 아버지이자
모든 파라클레세오스의 하나님,
그는 곁에서 우리 어려움의 모든 것에 대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도 곁에서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에 의해 우리 자신들이 도움받았던 바로 그
파라클레시오스를 통해 돕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메시아의 겪음들이 넘치듯이, 그처럼 메시아 예수를 통한 우리의 파라클레시스도 넘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곁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파라클레세오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 파라클레세오스는 우리도 겪고 있는 여러분의 겪음들의 견딤 안에서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겪음들에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처럼, 마찬가지로 파라클레세오스에도 연합하는 이들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8~14
  즉 우리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족 여러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우리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결과 우리는 이 사는 것마저도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 안에 그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신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셨고 끌어내실 것입니다, 그분을 향해 그가 여전히 또 끌어내실 것이라고 우리는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우리에 대해서 간구함으로 함께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로 거저 주신 것이 많은 얼굴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통하여 우리에 대해 감사드려지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부심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형상과 함께 하는 그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과 깨끗함(대낮의 심판)으로, (즉) 살몸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로, 우리는 코스모스 안에서 몸을 위로 하여 살아갑니다, 여러분을 향해서는 더 넘치도록 (그리 합니다). 즉 우리는 여러분이 위로부터 깨닫는 것들이나 알게 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랍니다, 텔로스까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여러분들도 메로스로부터 우리를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분의 자부심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주 우리 예수의 날에 우리를 그리 여기듯이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15~22
  그리고 바로 이러한 확신으로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갈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두번째 기쁨을 갖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하여, 그리고 다시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여러분에서부터 유대로 보냄받기 위하여. 그래서 이것을 계획하는데 내가 가벼움을 사용했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계획한 것들이 내가 살몸을 따라 계획한 것이겠습니까, "네"가 나와 함께 "네"가 되고, "아니오"가 나와 함께 "아니오"가 되게끔 하려고?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로고스는 여러분들을 향해 "네"도 "아니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여러분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아들인 그이는,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통해서, "네"와 "아니오"가 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이는 그 안에서 "네"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인 한, 그이 안에서 "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이를 통해서 그 "네"가 하나님께 우리를 통한 뚜렷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이는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메시아를 향해 확고히 걷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름부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 찍으시고 그 숨결의 보증을 우리의 가온들 안에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3~2:4
  그런데 바로 저는 증인으로 그 하나님을 요청합니다, 바로 나의 호흡에,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을 아끼기에 코린토스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신실함을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쁨과 함께하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이미 신실함으로 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을 심판(판단)했습니다, 다시는 슬픔으로는 여러분에게 가지 않겠다고. 즉 내가 여러분을 슬프게 만든다면,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나로 인해 슬픈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가지 않고서 내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슬픔을 갖고자, 하지만 나는 여러분 모두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속해있다고. 즉 나는 많은 어려움과 가온의 눌림으로부터 많은 눈물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만드려고 그런게 아니고, 다름 아닌 이 사랑을 여러분이 알게 하려고 말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향해 더 넘치도록 가진 그것을.

고린도후서 2:5~11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슬프게 했다면, 그가 나를 슬프게 했던게 아니라, 부분으로부터는(내가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에 의한 그 처벌이 그러한 자에게 충분합니다, 그 결과 이와 반대로 더욱 여러분이 기꺼이 파라클레시스 하십시오, 넘치는 슬픔에 그러한 이가 취하지 않도록. 이런 이유로, 나는 여러분이 그를 향해 사랑으로 지배하길 파라클레시스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을 위해 내가 썼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여러분의 시험, 모든 일에 헤아리는 이들인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이에게 거저 살게한다면, 나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즉 거저 살게했던 내가, 만일 내가 누군가 거저 살게 했다면, 여러분 때문에 메시아의 얼굴 앞에서, 그 사탄이 많은 것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생각들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2:12~17

  그런데 나는 트로아스를 향해, 메시아의 복음을 향해 갔고, 그리고 문이 나에게 주 안에서 열렸는데, 나는 나의 가족 디도를 발견하지 못한 나의 숨결로 (인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떨어져 마케도니아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때에 우리를 개선행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메시아 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그이 앎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로의 거저가)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메시아의 향기가 우리입니다,
  구원받은 이들과 멸망당하는 이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이들은 한편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냄새요,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삶으로부터 삶으로 향하는 냄새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것들을 향해서 충분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는 많은 이들과 같지 않고,
  오히려 백주대낮의 심판으로부터 (있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메시아로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6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들을 함께 세우기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부터나 우리를 향해서 어떤 추천하는 편지같은 것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편지는 여러분이고, 그 편지는 우리의 가온들에 새겨졌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알게 되고 읽힙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의해 섬김을 받은 메시아의 편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먹이 아니라 편지가 아니라 삶의 하나님의 숨결로 새겨졌습니다, 돌판들에가 아니라 살몸의 가온 판들에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확신을 우리가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산정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충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새 언약의 섬김이들로서 문자로가 아니라 숨결로 충분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죽이지만, 숨결은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7~11

  그런데 만일 돌들에 기록된 문자들 안에서 죽음의 섬김이 영광 안에서 되었더라면, (그 결과 이스라엘 아들들도 모세의 그 얼굴을 향해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의 폐지된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숨결의 섬김은 얼마나 더 영광 안에 있게 되겠습니까? 판결의 섬김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섬김은 더욱 많은 영광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즉 바로 그 부분 안에서 영광스러웠던 것은 영광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압도하는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만일 폐지되었던 것도 영광을 통해 있었다면,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한 것으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2~18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파레시아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놓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아들들이 그 폐지된 것의 끝을 향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들은 굳었습니다. 즉 바로 이 날까지 바로 그 베일이 옛 언약의 읽음에 머물러 벗겨지지 않은 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시아 안에서 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모세가 읽혀질 때마다 베일이 그들의 가온 위에 덮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를 향해 몸을 돌리기만 하면, 그 베일은 반드시 벗겨집니다. 그런데 그 주는 숨님이십니다. 그런데 주의 숨결 (계신) 곳에 자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베일이 벗겨진 얼굴로 주의 영광을 (거울보듯) 마주하며 바로 그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신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배자이신 숨님에서부터 그러한 것 같이.

고린도후서 4:1~6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섬김을 갖습니다, 우리가 자비 얻은 것을 따라 나쁨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끊었다 말하고, 우리는 온갖 속임으로 걷지 않으며,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참의 드러남과 함께 우리를 세웁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쉬네이데시스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그 복음마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 받은 이들 안에서 가려진 것이며, 그들 안에서 이 현시대의 신이 신실하지 못한 생각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메시아(그이는 하나님의 형상인데)의 영광의 복음의 광휘를 빛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 예수를 주로 선언하는 반면, 우리 자신들은 예수를 통해 여러분의 종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어둠들로부터 빛이 빛추리라"고 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온들 속에 빛을 발하셨습니다, 메시아 얼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깨달음의 빛을 향하여.

고린도후서 4:7~12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지만 짓이겨있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쫓김 당하지만 버림받지 않으며, 아래로 던져지지만 멸망당하지 않으며, 모든 때에 그 예수의 그 죽으심을 몸에 짊어집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이 우리의 몸들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면서 예수를 통해 넘겨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 또한 우리의 죽을 살몸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죽음은 우리 안에서 일하는 반면, 그 삶은 여러분 안에서 일합니다.

고린도후서 4:13~18

  그런데 우리는 그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을 갖습니다, 이 기록을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신실했다, 이 때문에 내가 말도 했다."

  우리 역시 신실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말합니다, 다음을 알면서(보면서) 말입니다, 그 주 예수를 일으키신 이가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며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세우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통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 흘러넘쳤던 '거저'가 넘침들의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에 이르도록 넘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쁨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밖에 있는 사람은 닳아가고 있고, 오히려 우리의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부터/다시)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어려움의 짧은 순간은 넘어섬을 따라 오는시대 넘어섬으로 우리에게 영광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들여다보지 않게 하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카이로스를 위해 있지만, 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밑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땅에 속한 이 장막의 집이 멸망당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하늘에 밑도 끝도 없는, 손으로 짓지 않은 집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즉 우리는 이 안에서 슬퍼하며, 우리의 살 곳 즉 하늘로부터 덧입는 것을 갈망합니다, 실로 만일 우리가 덧입었음에도 벌거벗은채로 발견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즉 이 장막 안에 있는 우리는 눌려있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벗기를 바라기는 커녕 덧입기를 바랍니다, 이는 이 죽은 것이 그 삶에 의해서 삼켜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것을 향하도록 창조해서 만들어 내신(κατεργαζομαι)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그 숨결의 그 보증(αρραβω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6~10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서 민중 안에 있으면서 주로부터는 민중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실함을 통해서 걷고 있지, 뵈는 것을 통해서 걷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담하고 또한 훨씬 좋게여기고 있습니다, 이 몸으로부터 민중에게서 떨어져있는 것과 주를 향해 민중 안에 있는 것을. 이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영예롭습니다, 민중 안에 있던지, 민중 바깥에 있던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딱 맞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이 그 실천을 향해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좋음이든 열악함이든 되돌려받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5:1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님의 그 두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반면) 나는 여러분의 양심들 안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시 우리 자신들을 여러분과 함께 세우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우리에 대해 자부심 가질(자랑할) 계기를 주려는 것입니다, 이는 얼굴로 자랑받는 이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가온 안에서 자랑받는(자부심 갖는) 이들을 향해서는 아닙니다. 즉 우리가 정신 나갔다면, 하나님께 그러합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여러분에게 그렇습니다. 즉 메시아의 사랑이 우리를 함께 세웁니다, 우리는 다음을 판단했습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럼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5:16~6:2
  그 결과 우리는 그 때로부터 어떤 것도 살몸을 따라 알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메시아를 살몸을 따라 깨달았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금 어떤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만일 누군가 메시아 안에 있다면, 새 피조물입니다. 옛창조의 것들은 비껴갔습니다, 보십시오 새창조의 것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있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메시아를 통해 화해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그 화해의 섬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 계셨고, 코스모스를 자신과 화해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잘못된 걸음들을 그들에게 산정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 화해의 로고스를 놓았던 분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는 사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파라클레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여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 비뚤어짐을 알지 못하는 이를 우리를 위해서 비뚤어짐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더불어 여러분을 파라클레시스합니다, 그 하나님의 거저를 헛됨으로 받지 마세요, 그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받을만한 카이로스에 내가 너에게 귀 기울였다
     그리고 구원의 날에 너에게 도움을 주었다."

  보십시오, 지금이 잘받을만한 카이로스,
  보십시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6:3~13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넘어짐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이 섬김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함께 자신들을 하나님의 섬김이들로 세우며, 많은 견딤 속에서, [눌림들 속에서, 사명들 속에서, 죄여듬들 속에서], [다침들 속에서, 투옥들 속에서, 폭동들 속에서], [고됨들 속에서, 잠못잠들 속에서, 굶주림들 속에서], {순수함으로, 깨달음으로, 긴 호흡으로, 손내밈으로}, {숨님으로, 시치미 떼지 않는 사랑으로, 참에 속한 로고스로,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있습니다). 오른손들과 왼손들에 있는 이 의의 도구들을 통해서, 영광과 수치를 통해서, 중상모략과 좋게 말듣는 것을 통해서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 이끄는 것같지만 참되고, 무지한 것 같지만 알고 있으며, 죽은 것 같지만, 보십시오, 살아있고, 징계를 받고 있지만 사형선고 받지는 않았으며, 슬퍼보이지만 그러나 늘 기뻐하며, 거지같지만 그러나 많은 이들을 부유하게 하며,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을 확실히 가졌습니다.

  우리의 이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코린토스 사람들이여, 우리의 가온이 이미 넓어졌습니다. 우리 안에서 여러분들은 짓이겨지지(고전 4:8)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내장들 안에서 여러분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정당한 삯을,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넓게 하십시오.  

고린도후서 6:14~7:1
  여러분은 어울리지 않는 쟁기를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매는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 즉 의와 무법(아노미)이 (함께 하는 것이) 대체 무슨 교제입니까? 어둠을 향한 빛으로 대체 무슨 코이노니아입니까? 그런데 벨리알을 향해서 대체 무슨 메시아의 화음이 있습니까,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하는 신실한 이에게 대체 무슨 몫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림자 숭배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함께 놓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듯 말입니다.

"나는 그들 안에 살 것이고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고, 그들은 나의 씨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들 가운데로부터 나와라 그리고 경계지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씻기지 않은 것에 들러붙지 말아라.
바로 내가 너희를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로 될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은 나에게 아들들과 딸들로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들을 가진,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니 우리 살몸과 영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이 합시다, 하나님의 두려움 안에 (있는) 거룩함을 우리의 끝으로 가져옵시다.

고린도후서 7:2~16
  여러분들은 우리를 차지하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불의하게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멸망시키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이득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판결선고를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우리의 가온들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 함께 죽기와 함께 살기로 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많은 파레시아가 여러분을 향해 있고, 나에게 많은 자부심이 여러분들을 위해 (있습니다). 나는 이미 파라클레시스로 가득해왔고, 우리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기쁨으로 지금은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즉 우리가 마케도니아 안으로 갔을 때 우리의 살몸은 그 어떤 안정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어 우리 밖으로는 싸움들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짓눌린 이들을 파라클레오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파루시아로 우리를 파라클레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파루시아로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파라클레오되었다는 파라클레시스로, 그는 우리에게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슬픔과, 나를 위한 여러분의 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

  만일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지금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후회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바로 그 편지입니다, 만일 내가 잠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나는 기쁩니다, 여러분을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생각바꿈으로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을 따라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있는 슬픔은 후회없는 구원으로 향하는 생각바꿈을 일(창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현시대)의 슬픔은 죽음을 만들어냅니다.

  즉 보십시오, 바로 이 하나님을 따라 (했던) 슬퍼하기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열심을 만들어냈는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변호(변증)를, 오히려 분함을, 오히려 두려움을, 오히려 갈망을, 오히려 열심을, 오히려 의로운 처벌을 (만들어냈습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분은 스스로를 이 문제 앞에서 결백한 이들로 세웠습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썼다면, 그 불의한 이 때문도 아니고, 불의한 일을 당한 이들 때문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향해 있는 우리를 대신하는(위한), 여러분의 그 열심을 드러내는 것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파라클레시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파라클레시스에 더욱 넘치도록,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는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러분 모두로부터 그의 숨결이 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내가 그에 대해 좀 자랑했던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참 안에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디도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은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장들이 여러분을 향해 더욱 넘치도록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그 모든 헤아림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떨림과 함께 그를 맞아주었던 것처럼. 나는 여러분 안에서 모든 것을 대담함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고린도후서 8:1~7
  그런데 우리는 여러분에게 다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마케도니아의 에클레시아들 안에서 바쳐진 그 하나님의 거저를, 왜냐하면 즉 많은 어려움의 입증 속에서 그들에게 속한 그 기쁨의 넘침과 깊음을 따라 (있는) 그들에게 속한 가난이 그들에게 속한 '꼬이지 않음'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넘쳤기 때문입니다. 즉 잠재력을 따라, 내가 증언합니다, 또 잠재력을 지나서, 그들은 많은 파라클레시스와 함께 더욱 기꺼운 이들이었고, 그들은 우리의 그 거저와 거룩한 이들을 향한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갈망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리고 우리가 바란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통해 (그들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디도를 파라클레시스 하도록 말입니다, 이는 디도가 그처럼 시작했듯 그처럼 그가 여러분을 향해서 바로 그 거저를 끝으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넘치듯 말입니다, 신실함으로 말씀으로 깨달음으로 모든 열심으로 그리고 여러분으로부터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이는 바로 그 거저 안에서 여러분이 넘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8:8~15
  나는 명령을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열심을 통해 여러분의 그 사랑도 자녀다움을 입증하는 중 입니다. 즉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메시아 예수의 그 거저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때문에 넘치던 이가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바로 그이의 거지됨으로 넘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이것에 관해 깨달음을 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그 행하기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작년부터 그 뜻한 것을 여러분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행하기를 끝으로 가져오십시오,

  바로 그 뜻한 것의 열정처럼
  그 가진 것으로부터 끝으로 가져오기

  왜냐하면 만일 그 열정이 앞에 놓인다면, 가진 것에 따라서는 그이는 잘 받으시지만, 갖지 않은 것에 따라서는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편함은 다른이들에게 있고 여러분에게는 어려움이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공평으로부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카이로스에 여러분의 그 넘침이 그들의 모자람을 향하여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그 넘침도 여러분의 모자람을 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공평이 됩니다.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많은 이가 넘치지 않았고
  적은 이가 모자르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8:16~24
  그런데 거저가 있습니다, 디도의 가온 안에 우리를 대신한 바로 그 속도냄(조급함)을 주신 하나님께 말입니다, 왜냐하면 디도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파라클레시스를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하는 것에 더 속도를 내어 더 기꺼이 여러분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함께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에게 모든 에클레시아들을 통한 복음 안에서 칭찬이 있습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에클레시아들에 의해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이로 선출되었습니다, 우리에 의해 섬겨진 바로 그 거저와 함께, 바로 그 주의 영광과 우리의 열망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을 놓았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우리에 의해 섬겨지는 바로 이 막대함으로 비난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면전에서 온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전한 것을.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리의 그 형제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를 우리는 여러 차례 열정이 있다고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을 향한 많은 확신으로 더욱 열심이 있습니다.

  디도에 대해서는, 그는 나의 동료이자 여러분을 향한 동역자(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에클레시아의 사도들이자, 메시아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보임과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자랑을
  우리가 (여러분 앞에) 내보이는 그들에게,
  즉 에클레시아들의 얼굴을 향해 (보여주십시오)!

고린도후서 9:1~15
  즉 한편으로는 그 거룩한 이들을 향한 그 섬김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쓸 것이 제게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 대신 내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자랑한 그 열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이아인들이 작년부터 준비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심(젤로스)이 '그들의' 흘러넘침들을 자극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이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여러분 대신(위해) 내가 했던 우리의 그 자랑이 이 부분에서 텅 빈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이 여러분들을 준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나와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이 가서 여러분들이 준비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무척 부끄럽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여러분에 대해서 이러한 놓임으로 말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형제들을 파라클레시스할 사명(필요)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먼저 여러분에게 나아가고 여러분이 좋은 말로 사전에 약속한 것을 사전에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준비가 다음과 같은 좋은 말로 되었습니다, 탐욕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심히 뿌리는 이는 조심히 거두리라,
  그리고 좋은 말들로 뿌린 이는 좋은 말들로 거두리라.

  각각은 그 가온에 가져온대로, 고통으로부터나 '해야 하기 때문'으로부터가 아니라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마 16:22) 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모든 거저를 여러분을 향해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모든 시간 모든 자기만족을 여러분들이 갖고서 모든 좋은 일을 향해 여러분이 넘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듯 말입니다.

  그가 흩뿌린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의 의가 그 시대에 이르도록 머문다."

  그런데 뿌리는 이를 씨로 채우시는 이는 먹음을 향한 음식도 채우실 것이고,  여러분의 그 씨를 넘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의의 출생들을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꼬이지 않음을 향해 흘러넘치게 사는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공적 업무의 섬김이 그 거룩한 이들의 모자람들을 흘러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흘러 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섬김의 이러한 입증을 통해 그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며 (있습니다),
  여러분의 같은 말(동의)의 그 아래 놓임으로,
  메시아의 복음과 연합의 꼬이지 않음을 향해, 그들 곧 모두를 향해,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을 위한 기도로 여러분을 고대합니다, 여러분을 향해 그 넘어던지시는 하나님의 거저를 통해. 그 말할 수 없는 그의 선물로 감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11
  1) 그런데 바로 나 바울이 메시아 예수의 겸손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여러분을 파라클레오합니다,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여러분 안에서 낮추지만, 떨어져 있으면 여러분을 향해 대담합니다. 2) 그런데 나는 요구합니다, 같이 있을 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담해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 확신은 우리가 살몸을 따라 걷고 있다고 산정하는 어떤 이들을 향해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산정한 확신입니다. 3) 왜냐하면 우리는 살몸 안에서 걷지만 살몸을 따라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4) 즉 우리의 이 전투의 무기들은 살몸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요새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께로의 잠재력들이고, 5) 우리는 산정들과 모든 찬양받는 높은 것을 하나님의 깨달음을 따라 무너뜨리며, 모든 사유를 메시아의 헤아림 쪽으로 사로잡으며, 6) 그리고 의로 판결할 준비 안에서 우리는 모든 흘려들음(불순종)을 차지합니다, 여러분의 헤아림이 흘러넘치는 한 말입니다.

  7) 얼굴을 따라 있는 것들을 여러분이 보고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메시아께 속한 사람으로 설득되었다면,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다시 산정하십시오, 자신이 메시아께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렇다는 것을. 8) 왜냐하면 만일 내가 우리의 그 엑수시아에 관하여 좀 넘치게 자랑할 것이라면(그것은 주께서 집짓기를 위해 주신 것이지, 여러분의 멸망을 위해 주신게 아닙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9) 이는 내가 그 편지들을 통해 여러분을 두렵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함입니다. 10) 그들이 말합니다, '이 편지들은 한편으로는 무겁고 힘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의 파루시아는 약하고 그 말씀은 별시덥지않다.' 11) 이러한 자는 다음과 같이 산정하십시오, 떠나있을 때 편지들을 통해 했던 말과 함께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그러한 우리는 '일'로도 곁에 있는 것이라고.

고린도후서 10:12~18
  12) 왜냐하면 우리는 감히 안에서 판단하거나 스스로 함께 세우는(추천하는) 어떤 이들과 함께(비교하며) 스스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안에서 스스로를 측량하고(measure out) 스스로를 스스로와 함께 판단하며 *깨닫지 못합니다. 13) 그런데 우리는 그 측량들(measure)을 향해 자랑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우리에게 나눈 그 자의 측량을 따라 자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14) 즉 우리가 여러분을 향해 이르지 못한 이들이라서 스스로 넘어서 뻗어나간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메시아의 그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15) 우리는 그 측량없음들을 향해서는 다른 이들의 고됨 안에서 자랑하지 않는 반면, 우리는 (다음을) 갖고 있습니다, 1)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의 신실함의 증가의 소망이 우리의 그 자에 따라 넘침에 이르도록 커지는 것을, 16) 2) 여러분을 넘어서 뻗어나감들을 향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그런데) 다른 이들의 자 안에서 그 준비들을 향해 자랑하는 것은 갖지 않습니다. 17) 그런데 자랑하는 이는 주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18) 왜냐하면 스스로를 함께 세우는, 바로 그 사람은 입증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함께 세우시는 사람이 입증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1~6
  1) 나의 다소 어리석음을 여러분이 좀 버텨주길 바랍니다. 오히려 나를 버티십시오! 2)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에게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을 한 남자에게 알지 못하는 처녀로 메시아 곁에 세웠습니다. 3) 그런데 나는 뱀이 하와를 그의 모든 노력으로 하와를 완전히 속인 것같이, 여러분의 앎들도 메시아에게로의 꼬이지 않음에서 떨어져 망쳐 버리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왜냐하면 만일 한편으로 온 사람이 다른 예수를 전한다면, (우리가 전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이질적인 숨결을 받았거나, (여러분이 받지 않았던) 이질적인 복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전하게도 버티고 있습니다. 5) 즉 나는 나를 저 대단히 위대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산정합니다. 6) 그런데 만일 내가 말로는 능숙하지도 못하다해도, 오히려 깨달음으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모두 안에서 여러분에게로 나는 드러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7~15
  7) 여러분들이 높아지게 하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선물로서 그 하나님의 복음을 나는 여러분에게 알렸던 것이 내가 비뚤어짐을 만든 것입니까? 8) 나는 다른 에클레시아들을 나는 갈취해서 여러분의 섬김을 향한 봉급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 있으면서 (돈이) 모자랐어도 누구도 무기력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9) 왜냐하면 나의 그 모자람을 마케도니아로부터 온 형제들이 넘치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려고 생활했고 생활할 것입니다. 10) 메시아의 참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바로 이 자부심이 아카이아의 지역들에서 가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11) 그래서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아십니다. 12) 그런데 내가 하고 있던 것을 나는 해나갈 것입니다, 이는 자랑하는 이들 안에서 우리처럼 인식될 목적으로 '계기'를 원하는 이들의 계기를 끊어버리기 위함입니다. 13) 왜냐하면 그러한 이들은 거짓사도들이고, 속이는 일꾼들이고, 메시아의 사도들로 겉모양이 바뀌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14)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사탄이 빛나는 천사로 겉모양을 바뀌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니 크지 않습니다, 만일 사탄의 섬김이들도 의의 섬김이들처럼 겉모양이 바뀐다해도 말입니다. 그들의 일들을 따라 그들에게 속한 그 결말이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16~21
  16) 나는 다시 말합니다, 누구도 내가 현명함없다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가령 여러분들이 나를 현명함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내가 다소 좀 자랑할 것을 위함입니다. 17)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나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함없음 안에 있는 것처럼, 바로 그 자랑의 모자람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살몸을 따라 자랑할 때, 나도 자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명한 여러분들은 현명함없는 이들을 즐거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들은 만일 누군가 여러분들을 노예삼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잡아먹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취하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들어올리려고 해도, 만일 누군가 얼굴로 여러분을 치려한다 해도 말입니다. 21) 내가 존경없음을 따라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했을 때 처럼 말입니다. 누군가 감히 해보려는 그 연약함 안에서(의 말하기를), 그 현명함없음 안에서 나도 감히 말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22~33
그들이 히브리인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의인들입니까? 내가 미친척하며 나를 위해서 말해보겠습니다.

고생들로 내가 넘치며,
재앙들로 내가 넘치며,
갇힘들로 내가 도를 넘어섰으며,
죽음들로 빈번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나는 다섯 번의 마흔에서 하나 뺀 태형을,
나는 세번 채찍으로 맞았고, ,
한번은 내가 투석형을 당했으며,
나는 세번 난파되었고,
바다 밑바닥에서 밤낮을 보냈습니다.

길떠남들이 빈번했는데,
강물들의 위험들로,
혁명가들의 위험들로,
유대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이방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도시에서의 위험들로,
광야에서의 위험들로,
바다에서의 위험들로,
거짓형제들 안에서 위험들로,

고생으로 그리고 고됨으로,
잠못듬 안에서 빈번하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들 속에서 빈번하게,
추위와 헐벗음으로.

이외의 것들은 떼놓더라도,
나에게는 조임이 날마다 있는데,
그것은 모든 에클레시아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누군가 연약하다면, 나도 연약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걸려 넘어진다면(σκανδαλιζω),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만일 자랑해야만 한다면, 나의 그 연약함에 속한 것들을 나는 자랑하겠습니다. 하나님 즉 주님이신 예수의 아버지가 아십니다, (그는 시대들에 이르도록 말 말해지실(찬양받을) 분입니다),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마스커스에서 지역 총독인 아레타 왕이 나를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의 그 도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창문을 통해서 광주리로 그 성벽을 통해 내려가서 그의 손들로부터 달아났습니다.

고린도후서 12:1~10
  1) 자랑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이익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 나는 14년 전에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을 압니다, 나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 살몸의 바깥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셋째 하늘까지 붙들렸던 그러한 사람을. 3)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살몸으로부터 떨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4) 그가 그 낙원 안으로 붙들렸고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는 것을, 그 말들은 사람에게 말하기 합당치 않은 말들입니다. 5)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나는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대신해서는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들 안에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6)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랑할 뜻이었다면, 현명함없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참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만둡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그가 나를  본 것이나 나로부터 그가 들은 뭔가를 넘어 산정할까 하여, 7)  그 계시들의 그 넘어섬을 가지고. 그러므로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몸에 스콜롶스, 곧 사탄의 천사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그가 나를 패기위함이요, 이는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8) 이것에 대해서 세번 주께 나는 나로부터 제거해달라고 파라클레오했습니다. 9)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하셨습니다,

  '너에게 이 나의 거저가 맞다(아르케오).
  왜냐하면 연약함 속의 잠재력이 이루기 때문이야.'

  10) 그래서 매우 기쁘게 나는 더욱 나의 약함들 안에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는 나에게 그 메시아의 잠재력이 장막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좋게 여깁니다, 연약함들 안에서, 무례함들 안에서, 짊어짐들 안에서, 핍박들과 죄여듬들 안에서, 메시아를 위해서 (있음을). 왜냐하면 내가 연약할 때마다, 나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11~18
  11) 나는 현명함 없는 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나를 강제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함께 놓여야(추천 되어야) 할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에도 그 "위대한 사도들"보다 뒤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12) 한편으로 나는 사도의 그 표적들을 모든 견딤 안에 있는 여러분 안에서 만들어보였습니다, 표적들과 기적들과 잠재력들로 (말입니다).

  13) 즉 남은 에클레시아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이 덜한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바로 그 부당함에 관하여 거저 삶을 주세요(용서하십시오).

  14) 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해 갈 준비되어 나는 바로 세번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열심내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을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저장하는데 빚지지 않고, 오히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런데 나는 아주 즐거이 지불할 것이고 그 여러분의 호흡들을 위해서는 (아예) 탕진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넘치도록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내가 덜 사랑 받겠습니까?

  16) 그런데 있을지어다, 나는 여러분을 짐(부담)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배아래 두고 모든 것을 짜서 계략으로 여러분을 취했다고(들 합니다). 17) 내가 여러분을 향해 보냈던 이들 중에 어떤 이들에 관해서, 그를 통해서 내가 여러분을 이용한 적 있습니까? 18) 나는 디도를 파라클레오 했고 나는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 디도가 실로 여러분을 이용했던 적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디도와) 같은 숨결로 우리가 걷지 않았단 말입니까? 바로 그들의 '닮음(족적)'으로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고린도후서 12:19~13:4
  19) 오랫동안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변명한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메시아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집짓기를 위해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20) 내가 갔을 때 내가 뜻하는 류로 여러분을 발견하지 못할까봐, 바로 여러분이 바라지 않은 류를 내가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게 될까봐, 싸움, 열심, 화들, 나쁜 말들, 수군거림들, 부푼 자아들, 무질서들이 있을까봐. 21) 내가 다시 갔을 때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향해 낮추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비뚤어져버린 이들과 생각바꾸지 않은 이들중 많은 이들을 슬퍼할 것입니다, 더러움과 포르네이아와 그들이 정한 과도함으로 말입니다.

  13:1) 이 세번째(방문)로 나는 여러분을 향해 갈 것입니다. 두 세 증인들의 입으로 모든 이야기는 세워질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말하고 앞에서 말씀했습니다, 2) 그 두번째로 내가 곁에 있었을 때와 같이, 떠나있는 지금 전에 비뚤어졌던 이들과 모든 남은 이들에게도 말입니다, "내가 다시 가면 (반드시)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3)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내 안에서 메시아께서 말하시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열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여러분 안으로 연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할 수 있으십니다. 4) 그리고 그이가 연약함으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그이와 함께 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5~13
  여러분들은 직접 걸으십시오, 만일 그 신실함 안에 지금 있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입증하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여러분 안에 메시아 예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입증되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입증되지 못한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그런데 나는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나쁜 것도 만들어지지 않기를, 이는 우리가 입증인으로 드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들이 그 온전함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증되지 못한 이들처럼 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는 그 참에 맞서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참을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연약할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들로 있다면 언제나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딱맞음을.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씁니다, 이는 같이 있을 때 단호하게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그 원한을 따라 사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집지음을 위함이지, 무너뜨림을 위함이 아닙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딱맞게 되십시오, 파라클레시스하십시오, 바로 이 같은 것을 숙고하십시오, 화평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 안에서 문안하십시오. 거룩한 이들 모두가 여러분을 문안합니다.

  주님이신 메시아 예수의 거저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숨결의 코이노니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고린도후서.hwp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 - 최희주譯  (0) 2017.04.16
고린도후서 13:5~13  (0) 2017.02.24
고린도후서 12:19~13:4  (0) 2017.02.23
고린도후서 12:11~18  (0) 2017.02.22
고린도후서 12:1~10  (0) 2017.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