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12:1~10

  1) 자랑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이익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 나는 14년 전에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을 압니다, 나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 살몸의 바깥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셋째 하늘까지 붙들렸던 그러한 사람을. 3)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살몸으로부터 떨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4) 그가 그 낙원 안으로 붙들렸고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는 것을, 그 말들은 사람에게 말하기 합당치 않은 말들입니다.

  바울은 그토록 하지 않으려했던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자기 자랑의 끝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바로 자신의 개인 체험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복수 표현들이므로, 최소한 바울은 2번 이상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단수로 번역했습니다만). 바울은 이렇게 하는게 "이익이 없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 자랑을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자기 자랑은 결국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랑 하기" 외에 모든 자랑을 불허했던 바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유익없는 자기 자랑에서 공동체를 위한 무언가로 넘어갈 것입니다. 바울의 사고를 오랫동안 따라온 우리는 이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년 전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몸뚱이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성'(살몸)을 벗어났던 것인지 몰랐지만, 그가 셋째 하늘까지 붙들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 안에 들어간 자신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바울은 3인칭으로 서술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기자랑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사건을 떨어뜨려놓는 것이지요. 이런 서술 방식의 목적은 다음 구절에서 밝힐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셋째 하늘"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붙들렸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우리는 "셋째 하늘"이 곧 "낙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낙원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즉 죽음 이후 예수와 함께 있는 곳이 낙원입니다. 바울은 그 낙원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몸 안에 있었는지, 또 살몸 바깥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으므로, 이것은 물리적인 상하운동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낙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낙원은 가고 오고 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닐 것입니다. 셋째 하늘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성층권 너머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셋째'라는 말은 '깊음'을, '하늘'이 '하나님'을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깊은 차원"인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에서 "붙들리다(ἁρπάζω)"라는 동사는 어느 장소로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이 움직였는지 움직이지 않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동'을 말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잣니의 유체이탈 경험을 말하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많은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조심스럽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겪게된 경험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5)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나는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대신해서는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들 안에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6)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랑할 뜻이었다면, 현명함없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참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만두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그가 나를 본 것이나 나로부터 그가 들은 뭔가를 넘어 산정할까 하여, 7) 그 계시들의 그 넘어섬을 가지고.

  바울은 그 사람을 자신과 분리시킵니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지 않는 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 외에는 정말 자랑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랑은 현명함을 따라 있는 자랑이고, 우리는 이 현명함이 '생각과 몸의 일치'를 뜻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어진 새로운 인식에 따라, 몸이 고생하는 이야기만이 유일한 자랑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랑만이 "참"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조심조심 자신이 겪은 계시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다시금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말할 때 생길 수 있는 사태가 우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바울을 초월적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계시가 초월적이기 때문에. 개역성경을 보면, 이 "그 계시들의 그 넘어섬을 가지고"에 해당하는 부사구로 7절 문장을 시작하지만, 저는 고든 피의 해설을 따라 6절의 마지막에 붙여둡니다. 그러면 위 구절은, 계시의 초월성이 곧 바울 자신의 초월성으로 오해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계시들과 환상들 말하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바울은 환상들과 계시들 얘기를 포기하고, 다시 자신의 연약함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설득력과 정당성을 얻을 생각을 잠시 했지만, 다시 자신이 처음했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그는 그의 고생 목록들이 보여주는 연약함 외에는 자랑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혹여나 바울이 하다하다 설득이 안되니까, 그 역시도 신비체험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울에 대한 오해가 될 것입니다. 그는 신비체험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신비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그 신비체험 자랑을 3인칭으로 조심스럽게 시작했으나 그 마저도 그만두었고, 다시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으로 자신을 못박아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몸에 스콜롶스, 곧 사탄의 천사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그가 나를 패기위함이요, 이는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8) 이것에 대해서 세 번 주께 나는 나로부터 제거해달라고 파라클레오했습니다. 9)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하셨습니다,

'너에게 이 나의 거저가 맞다(아르케오).
왜냐하면 연약함 속의 잠재력이 이루기 때문이야.'

  계시들의 장엄한 이야기, 환상들의 화려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성에 주어진 "가시"를 언급합니다. 어쩌면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에게 흠잡기 위해서 들먹였을 그 가시를 말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 가시를 공공연하게 자랑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그 가시는 "사탄의 천사"입니다. 새번역성경은 "천사"를 "하수인"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저는 이 가시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즉 사탄의 측면도 있고, 천사의 측면도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바울이 이 가시에 의해 말 그대로 얻어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이 가시로 인해 바울이 자신을 높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안구질환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간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둘 다 연구자로서 설교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이긴 합니다. 유대인 박해자들을 가시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팬다"는 말은, 실제로 유대인 박해자들에 의해 주먹 세례를 줄곧 받고 있음을 가리킬 것입니다(그럼에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로마서 9~11장).

  바울은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파라클레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기도 끝에 계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개인의 신비체험을 꺼낸 것은, 바로 이 계시의 말씀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들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비체험을 장황하게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가시 얘기를 하면서 연약함으로 돌아선 것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했을 때 들었던 계시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즉 개인의 신비체험을 자랑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으나, 신비체험 속에서 들었던 계시의 말씀은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유익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바울이 들었던 모두를 위한 계시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너에게 이 나의 거저가 맞다(아르케오).
왜냐하면 연약함 속의 잠재력이 이루기 때문이야.'

  첫줄은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바울에게 가시는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것이요. 이 거저주신 가시를 가지고 사는 것이 바울에게 딱 맞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사적인 구절의 이유가 제시되는 다음 문장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진술입니다. '연약함 속의 잠재력이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룰지에 대해서는 써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연약함과 잠재력 이룸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심지어 고린도전서에서도 줄곧 얘기하던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연약함 속에서 잠재력 이루는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이고, 자신의 신비체험에서 얻었던 이 보편공리를 에클레시아에게 말과 삶으로 전하고 있던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체험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약함 속에서 잠재력을 이루는 것은, 신비체험이 없어도 가능하고 요구되는 에클레시아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잠재력(δυναμις)"이 언급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각주:1]

고린도후서 1:8
즉 우리는 여러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족 여러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우리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결과 우리는 이 사는 것마저도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7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7
...참에 속한 로고스로,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있습니다). 오른손들과 왼손들에 있는 이 의의 도구들을 통해서...

고린도후서 8:3
즉 잠재력을 따라, 내가 증언합니다, 또 잠재력을 지나서, 그들은 많은 파라클레시스와 함께 더욱 기꺼운 이들이었고...

고린도후서 12:12
한편으로 나는 사도의 그 표적들을 모든 견딤 안에 있는 여러분 안에서 만들어보였습니다, 표적들과 기적들과 잠재력들로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3:4
그리고 그이가 연약함으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그이와 함께 살 것입니다.

  위와 같이, 코린토스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잠재력이 줄곧 언급됩니다. 그리고 이 잠재력이 나오는 문맥은 숨결의 능력, 곧 성령에 대한 언급입니다. 즉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내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편지에서도 이 내용은 빠질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생 목록은 모두 연약함 속에서 이기게 하시는 성령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참 자격이고, 이 고생 속에서 성령을 통해 이겨나가는 삶의 자격을 저 "거짓 사도"들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사도"라는 왜곡된 모방 모델과 그들을 닮으려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왜곡된 모방욕망의 연결고리를 바울은 끊어내려고 합니다. 바로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더불어 그 성령을 겪어왔던 연역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신비체험의 자기 자랑은 그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익하지가 않습니다.

  10) 그래서 매우 기쁘게 나는 더욱 나의 약함들 안에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는 나에게 그 메시아의 잠재력이 장막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좋게 여깁니다, 연약함들 안에서, 무례함들 안에서, 짊어짐들 안에서, 핍박들과 죄여듬들 안에서, 메시아를 위해서 (있음을). 왜냐하면 내가 연약할 때마다 분명히, 나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가 이 본문을 읽어왔던 독법을 증명하고 또 그 내용을 요약합니다. 바울은 약함들 안에 있음을 자랑합니다. "그 메시아의 잠재력"인 성령께서 바울의 이 연약한 장막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 안에서 살고 계신 성령을 인식하는 방식이, 바로 연약함 속에 넘겨지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둘러싼 무례함들, 짊어짐들, 핍박들과 죄여듬들은 오히려 바울이 메시아를 위해서 있음을 증명하는 전제들입니다. 바울을 절망시키는 장애물들이 아니라, 바울 안의 잠재력을 확인하게 합니다.

  마지막 문장인 "내가 연약할 때마다"는 예외상황을 허용하지 않는 용법입니다. 그래서 "분명히"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마다 분명히, 반드시"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연약할 때마다 분명히 드러날 메시아의 잠재력에서 옵니다. 바울의 자랑도 자기 자신을 향해있지 않고, '나'라는 장막에서 살고 계신 그 잠재력, 성령을 향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2:1~10

  1) 자랑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이익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 나는 14년 전에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을 압니다, 나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 살몸의 바깥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셋째 하늘까지 붙들렸던 그러한 사람을. 3)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살몸으로부터 떨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4) 그가 그 낙원 안으로 붙들렸고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는 것을, 그 말들은 사람에게 말하기 합당치 않은 말들입니다. 5)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나는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대신해서는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들 안에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6)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랑할 뜻이었다면, 현명함없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참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만둡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그가 나를  본 것이나 나로부터 그가 들은 뭔가를 넘어 산정할까 하여, 7)  그 계시들의 그 넘어섬을 가지고. 그러므로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몸에 스콜롶스, 곧 사탄의 천사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그가 나를 패기위함이요, 이는 내가 높아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8) 이것에 대해서 세번 주께 나는 나로부터 제거해달라고 파라클레오했습니다. 9)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하셨습니다,

'너에게 이 나의 거저가 맞다(아르케오).
왜냐하면 연약함 속의 잠재력이 이루기 때문이야.'

  10) 그래서 매우 기쁘게 나는 더욱 나의 약함들 안에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는 나에게 그 메시아의 잠재력이 장막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좋게 여깁니다, 연약함들 안에서, 무례함들 안에서, 짊어짐들 안에서, 핍박들과 죄여듬들 안에서, 메시아를 위해서 (있음을). 왜냐하면 내가 연약할 때마다, 나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고린도전서에서 잠재력이 언급된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1:18,24; 2:4,5; 4:19,20; 5:4; 6:14; 12:10,28,29; 14:11; 15:24,43,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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