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12:11~18

  11) 나는 현명함 없는 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나를 강제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나는 여러분에 의해 함께 놓여야(추천 되어야) 할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어떤 것에도 그 "위대한 사도들"보다 뒤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12) 한편으로 나는 사도의 그 표적들을 모든 견딤 안에 있는 여러분 안에서 만들어보였습니다, 표적들과 기적들과 잠재력들로 (말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줄곧 바울에게 사도가 맞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를 밝히고자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하는 방식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방식으로 자신이 사도가 분명함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바로 자기 자랑입니다. 물론 바울은 적들의 방식에 스스로 빠지면서 비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twisted. 바울의 자랑 내용은 자신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메시아의 잠재력"이었습니다. 즉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자랑없이 자랑함'입니다. 적들의 방식을 뒤틀어버림으로써 거짓 사도들이 자랑하는 내용들을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에클레시아가 사도로서 바울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밝혔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함께 놓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함께 놓이다"는 말로 번역한 말은 흔히 "추천하다"라고 번역됩니다. 즉 우리와 함께 세워질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일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의해서 바울은 사도로서 함께 세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설립자입니다. 사도는 에클레시아를 낳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세워주는 것은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식에 의해서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세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신이 정말 아버지가 맞다는 사실을 밝혀야하는, 이상해보이는 상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바울은 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위대한 사도들"보다 뒤쳐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이유로 제시한 것은 다시 그들의 주장을 뒤틀어 꺾어버립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들을 압도합니다. 위대한 사도라 말하는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바울은 할 수 있습니다(12:10).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힘이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바울이 진정한 사도인 이유가 저 '아무 것도 아님'입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연약함을 자랑함'이라고 말했던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입니다. 성령이 부어진 사람의 삶의 태도가 아무 것도 아님이요, 연약함을 자랑함이니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 명제의 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그 역을 따라가는 왜곡된 모방욕구에 젖어있고 말입니다.

  "한편으로(μεν)" 라는 말로, 바울은 새로운 주제를 도입합니다. 바로 '사도의 표적'입니다. 사도이기 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고든 피는 "표적들과 기적들"이란 표현을 통해, "표적들"은 사도의 사역을 통해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각주:1] "표적들과 기적들"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적과 기사"로부터 비롯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7:3, 개역한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신명기 4:34, 새번역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사도인 자신을 통해서 기적이 벌어지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이는 사도행전을 봐도 분명합니다. 즉 본문의 "표적들과 기적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표적)'과 '현실을 초월한 사건(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일으킨 사건은, 표적적인 사건이 곧 기적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이 겪은 이 사건을 부정할 수 없었겠지요.

  다만 우리는 현실을 초월한 기적과 바울이 자랑하는 연약함을 서로 포개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즉 기적을 베푸는 일은 '강함'이고, 이것은 바울이 자랑하는 '연약함'은 충돌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충돌은 커녕 오히려 하나로 묶입니다. 성령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성령을 통해 연약함 속에서 발현되는 잠재력을 말했고, 바로 그 성령은 현실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사도를 통해 일으키셨습니다.

  고든 피의 질문에 저는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코린토스 사람들이 '표적들과 기사들' 그리고 '연약함 속에서 견딤' 사이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문제는, 우리가 그저 혀를 차고 넘어갈만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양상은 복잡하고 미묘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바울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방식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 '긴장'을 긍정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함께 세워진 이들만이 걷고 있는 좁은 길일 것입니다.


  13) 즉 남은 에클레시아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이 덜한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바로 그 부당함에 관하여 거저 삶을 주세요(용서하십시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던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바울은 만일 그때문에 다른 에클레시아에 비해 부당한 처사를 당하고 있다 느꼈다면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14) 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해 갈 준비되어 나는 바로 세번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열심내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을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저장하는데 빚지지 않고, 오히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런데 나는 아주 즐거이 지불할 것이고 그 여러분의 호흡들을 위해서는 (아예) 탕진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넘치도록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내가 덜 사랑 받겠습니까?


  바울은 세번째 코린토스 방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연보 프로젝트는 유효합니다. 이 애매한 경계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재정지원은 거절하지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적극적으로 연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 경계면을 타고 흐르는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열심내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을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버지-자식 관계를 빗대어 설명합니다. (저는 바울의 이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식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아버지의 아이러니로 오늘 본문 해설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가진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돈을 받던 받지 않던, 그 모든 이유는 자식을 위함입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설립자, 아버지입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호흡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즐거이 지불하고 아예 다 써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바울은 넘치도록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사랑하는데, 그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내가 덜 사랑 받겠습니까?" 바울의 진심을 알게 된 이들은 고개를 가로 저을 것입니다.


  16) 그런데 있을지어다, 나는 여러분을 짐(부담)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배아래 두고 모든 것을 짜서 계략으로 여러분을 취했다고(들 합니다). 17) 내가 여러분을 향해 보냈던 이들 중에 어떤 이들에 관해서, 그를 통해서 내가 여러분을 이용한 적 있습니까? 18) 나는 디도를 파라클레오 했고 나는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 디도가 실로 여러분을 이용했던 적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디도와) 같은 숨결로 우리가 걷지 않았단 말입니까? 바로 그들의 '닮음(족적)'으로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이 "짐"은 돈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디테일한 배려를 알지 못했던 자식들과 아버지의 디테일한 배려를 이용해서 바울과 에클레시아 관계를 끊어놓으려고 했던 사탄들은 서로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바울은 무언가 계획을 짜고 있다. 그 계획의 목적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부터 거액의 돈을 탈취하기 위함이다.'

  답답했던 바울은 디도 일행을 언급합니다. 이들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입니다. 적어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디도일행을 의심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디도일행을 보낸 사람이 바울입니다. 디도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이용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디도일행은 "같은 숨결"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 처음과 끝에 성령이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걷다'는 '살다'입니다.

로마서 5:14
그러나 (죄의 결과인) 죽음은 (그 영향력을 발휘하여)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같은 '벗어난 걸음'을 걷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그 아담은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이루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벗어난 걸음'은 '성령으로 살지 않음'입니다. 바울이 성령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기적을 베풀든지, 연약함을 자랑하든지,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이었다면, 바울은 줄곧 온전함을 닮아가던 그들의 사도가 맞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2:11~18

  11) 나는 현명함 없는 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나를 강제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함께 놓여야(추천 되어야) 할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에도 그 "위대한 사도들"보다 뒤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12) 한편으로 나는 사도의 그 표적들을 모든 견딤 안에 있는 여러분 안에서 만들어보였습니다, 표적들과 기적들과 잠재력들로 (말입니다).

  13) 즉 남은 에클레시아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이 덜한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바로 그 부당함에 관하여 거저 삶을 주세요(용서하십시오).

  14) 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해 갈 준비되어 나는 바로 세번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열심내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을 열심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저장하는데 빚지지 않고, 오히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런데 나는 아주 즐거이 지불할 것이고 그 여러분의 호흡들을 위해서는 (아예) 탕진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넘치도록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내가 덜 사랑 받겠습니까?

  16) 그런데 있을지어다, 나는 여러분을 짐(부담)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배아래 두고 모든 것을 짜서 계략으로 여러분을 취했다고(들 합니다). 17) 내가 여러분을 향해 보냈던 이들 중에 어떤 이들에 관해서, 그를 통해서 내가 여러분을 이용한 적 있습니까? 18) 나는 디도를 파라클레오 했고 나는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 디도가 실로 여러분을 이용했던 적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디도와) 같은 숨결로 우리가 걷지 않았단 말입니까? 바로 그들의 '닮음(족적)'으로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1. <성령, 하나님의 능력주시는 임재>, 고든 피, p.6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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