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12:19~13:4

  19) 오래 전부터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변명한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메시아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집짓기를 위해서 있습니다.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유지하고 있는 경계면은 언뜻보면 자기 합리화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바울 자신이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는 일관성을 모르는 이들에게나 그리 보일 뿐입니다. 그 일관성은 메시아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올곧은 한 길입니다. 돈을 받든 받지 않든 바울은 무언가 한결같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정 행동 규범을 고집하는게 아니라, 에클레시아를 고집하고, 에클레시아를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그에게 정해진 행동 규범 따윈 없습니다. 매순간 그들을 위해 가장 좋은 행동을 취할 뿐입니다. 메시아께서 그리 하셨듯 말입니다.

-집짓기(
οἰκοδομή)
  "집짓기"의 등장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모두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3:12,13
만일 누가 이 토대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들의 업적을 밝히되, 불 가운데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모든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검증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
그럼 어찌 해야겠습니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각각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해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집짓기가 되게 하십시오.


고린도후서 10:8
왜냐하면 만일 내가 우리의 그 엑수시아에 관하여 좀 넘치게 자랑할 것이라면(그것은 주께서 집짓기를 위해 주신 것이지, 여러분의 멸망을 위해 주신게 아닙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집짓기"는 에클레시아를 바로 세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이 단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5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산 돌들로서 숨님으로 이뤄진 집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직을 위해

  메시아 예수를 받아들였던 코린토스 사람들이 온전한 에클레시아로 연합하는 것, 즉 메시아와 연합하고 또 다른 에클레시아들과 연합하며 이 땅에 일어선 거대한 메시아의 몸에 속한 지체들로서 사는 것은 바울의 모든 것입니다. 그의 말, 그의 실천은 이 한 가지 창조적인 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20) 내가 갔을 때 내가 뜻하는 류로 여러분을 발견하지 못할까봐, 바로 여러분이 바라지 않은 류를 내가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게 될까봐, 싸움, 열심, 화들, 나쁜 말들, 수군거림들, 부푼 자아들, 무질서들이 있을까봐. 21) 내가 다시 갔을 때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향해 낮추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비뚤어져버린 이들과 생각바꾸지 않은 이들의 많은 것들을 슬퍼할 것입니다, 더러움과 포르네이아와 그들이 정한 과도함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 합니다. 에클레시아로 시작한 그들의 삶이 에클레시아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까봐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로서의 삶은 각자의 고백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메시아의 삶을 따르겠다는 주체의 고백없이는, 그 주체는 메시아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표적들과 기적들과 잠재력들을 확인하고서 메시아의 삶을 따르겠다고 모두 고백한 이들입니다. 그 고백에 걸맞는 삶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고백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 고백이후 사람은, 세상이 금그어 놓은 기준들을 뛰어넘어 메시아의 인격을 모방하기 시작합니다. 인격은 나뉘지 않습니다. 메시아의 인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은 말의 차원으로 떨어지면 그 말은 인격의 굴레가 됩니다. 마치 말에 물려놓은 재갈처럼, 인격이 말의 노예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인격을 지시라는 것이 말의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의 말에 따라, 코린토스 사람들이 닮으려는 모방 모델은 점차 메시아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차지했다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을 닮으라 주장했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왜곡된 모방 경쟁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 결과는 누가 봐도 좋지 않는 것들로 나타납니다. 싸움, 열심, 성질냄들, 나쁜 말들, 수군거림들, 부푼 자아들, 그리고 무질서. 그리고 바울이 두려워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들이, 이미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이 비뚤어져버린 이들, 생각바꾸지 않은 이들(회개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습니다. 곧 더러움, 포르네이아, 그들이 정한 과도함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슬픔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더러움"은 "생각바꾸지 않음"과 연결됩니다. "더러움"은 메시아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상태요, 뉘우치지 않는다면 메시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용서를 스스로 배제한 꼴입니다(메시아의 용서는 '씻김'의 은유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그는 씻기지 않은채로 "더럽습니다".

  "포르네이아("음행"으로 번역됩니다)"는 더러운 이가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성적 문란함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신랑이신 메시아와 하나된 에클레시아의 모습이 아닌, 메시아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왜곡된 모방 모델을 모방하려는 추구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예수"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예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하는 예수는 이름만 예수이지 예수가 아닙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긴 게 아니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언명한 것과 같습니다. 왜곡된 모방 모델은 간교합니다. 겉으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드러나지만, 그것을 닮았다간 인격은 망가지게 됩니다. 사람을 속이며 망치고 있으므로 말 그대로 '사탄적(satanic)'입니다.

*satanic : 1. of Satan 2. characteristic of or befitting Satan; extremely wicked; devillike; diabolical.

  그리고 "그들이 정한 과도함"은 "비뚤어짐"을 설명해줍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벗어난 걸음"을 말합니다(로마서 5:14). 그리고 이 "걸음"은 고린도후서 4:18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이 "벗어난 걸음"을 일반적으로 "범죄"라 번역합니다. 기준을 잘못 세웠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범죄인지 모르는 자가당착의 상태가 "비뚤어짐"입니다.

  13:1) 이 세번째(방문)로 나는 여러분을 향해 갈 것입니다. 두 세 증인들의 입으로 모든 이야기는 세워질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말하고 앞에서 말씀했습니다, 2) 그 두번째로 내가 곁에 있었을 때와 같이, 떠나있는 지금 전에 비뚤어졌던 이들과 모든 남은 이들에게도 말입니다, "내가 다시 가면 (반드시)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3)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내 안에서 메시아께서 말하시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열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번째 방문을 예고합니다. 바울은 첫번째 방문 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세웠고(이젠 그들에 의해 자신이 세워져야 함을 호소하고 있고), 두번째 방문 때 그들의 처참한 상황을 확인하고 아파했으며(2:1), 이후 여러 차례 편지 교환이 이뤄졌고, 이제 세번째 방문을 앞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세 증인"을 언급합니다. 두 세 증인은 무언가 형제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확정하는 증인의 최소 숫자입니다. 토라에도 등장하고,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용서원칙에도 등장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 일단 당사자에게 그것을 말하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의 원칙을,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비뚤어짐을 확정하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는 이들을 바울은 에클레시아로부터 쫓아낼 것입니다(13:2). 이점이 현대 교회에 속한 이들에게 어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에클레시아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이, 교회가 사람을 확보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에, 바울은 용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시 가면 (반드시)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입증"이라는 주제가 다시 나왔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에게 사도가 맞는지 스스로 입증하라고 요구했고, 그들에게 바울은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을 통해, 즉 자신 안에서 "넘겨짐과 넘어섬"으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해 말하며 자신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입증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모저모를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 모델과 맞춰보며 입증에 열심을 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바울 안에서 잠재력을 발현하게 하시는 참 메시아가 아닙니다.

  바울은 메시아가 누구신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이는 여러분 안으로 연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할 수 있으십니다. 4) 그리고 그이가 연약함으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그이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 메시아는 다시 "연약함"과 "잠재력"이라는 주제를 통해 표현됩니다. 두 개의 전치사를 중심으로 이 본문을 이해해봅시다. "여러분 안으로"와 "연약함으로부터" 입니다. 메시아는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메시아께서 스스로 연약해지지 않으셨다면, 그이는 우리의 아픔도 체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에클레시아와 하나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이의 연약함은 메시아께서 에클레시아와 함께 하시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와 에클레시아가 함께 하는 것이 연약함을 통해서라면, 이제 그 메시아와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잠재력"을 함게 누립니다. 그 잠재력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 연약함을 통해서 발현되는 연약하지 않은 힘입니다.

  저는 최근 <그을린 사랑>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무려 15년간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딘 여성이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무미건조한 글자들로 말씀드리기보다는, 직접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여성은 자신의 고난을 "함께"를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고난받는 이들에게, 위와 같은 말은 한편으로 고난을 정당화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지만(함석헌 선생의 역사관도 같은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난을 고난보다 고통스러운 무의미에 빠지지 않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길은 '용서-뉘우침'의 좁은 길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받는 연약함은 함께를 위한 과정이라 말합니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메시아는 그들을 용서하셨고, 에클레시아답지 않은 에클레시아는 아직 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연약함이 그들이 더욱 메시아와 하나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 없다면,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위해서 이러한 긴 편지들을 써내려갈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연약함 없는 함께'가 더 문제입니다. 이러한 '함께'는 언제 흩어지기 쉬운 모래알을 뭉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 것은 그 연약함이 자신을 메시아와 더 하나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고, 같은 과정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현 상황을 "연약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연약함 속에서 그들은 뉘우침을 통해 메시아와 다시/더욱 하나될 수 있습니다.

  4절을 들여다 봅시다.

  4) 그이는 여러분 속으로 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할 수 있으십니다.
즉 그이는 약함으로부터 매달리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사십니다.
즉 바로 우리는 그이 안에서 연약해 있지만, 오히려 그이와 함께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살 것입니다, 여러분 속으로.

  이 문장은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여러분 속으로"라는 전치사구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러나 문장 처음에 등장하는 "여러분 속으로"는 부정문에 붙어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는 '여러분 속으로 약하지 않으십니다.' 첫 문장은 '여러분 속으로'와 '여러분 안에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 예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 안에서 약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력이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력하고 비천한 모습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지젝은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의 약함은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잠재력이 되기 위함이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없는 무력함이 아닙니다(요한계시록 1장의 예수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문장 두 개는 "카이 가르('즉')"로 시작되며,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여러분 속으로 약하지 않으시지만

 오히려 할 수 있으시다.

 즉 메시아는 약함으로부터 매달리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살고 계신다

 즉 메시아 안에서 우리는 연약한 상태이지만

 오히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살 것이다, 여러분 속으로

  메시아의 '할 수 있음'은 이중 참여의 방식으로 벌어집니다. 즉 예수께서 먼저 약함에 참여하삽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사건으로 바울은 장면을 캡춰하는 듯한 아오리스트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약함은 단회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이 '약함에의 참여'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사는 현재상태를 가져왔습니다. 현재시제를 썼으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현재 존재양식, 부활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약함에 참여한 예수 안에 우리가 참여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연약한 현재상태가 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이자, 부활을 목전에 둔 상태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즉 부활의 완전함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감벤이 '조작시간'이라고 말하는). 바울은 에클레시아를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공백, 즉 3일반의 공백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에게는 "한때 두때 반때"이고,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에클레시아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3일반동안 도시의 거리 위에 죽은채 누워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시간은 죽음과 부활 사이,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공백입니다. 이 공백속에서 신실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모두 정죄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완전해지는 사이에서 살게 됩니다. 말 그대로 공백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적 권한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기대했던 것을 이루면서도, 율법은 침범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P. 뭔가 더 정리가 필요하다 싶습니다
   7년을 반으로 자르면 3년 반,
   7일을 반으로 자르면 3일 반이잖아요.
   그런데 7은 완전인데, 오는시대를 여는 예수님의 시간은 계속 이 7의 반쪽으로 나타납니다
   완전을 반으로 쪼개는.

C. 오홍
   설명 안해주셨으면 캐치 못했을듯 ㅡㅋㅋㅋ

P. 바울은 분명해요. 완전을 쪼깨서 만든 시간 속으로, 에클레시아가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C.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P. 뭔가 잡힐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뭔가가 있어요. 여기에 뭔가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하면서도 계속 느껴요. 1260일이 계속 나와서요

C. 철저한 사람이네요

P. 3년 반이거든요

C. 두증인ㅋㅋㅋ

P. 7을 반쪽낸 시간이 두증인, 광야에서의 여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게다가 두 증인은 3일 반나절 동안 거리에 시체로 누워있고요

C. 저한테 설명해주신것처럼 저기에 쓰시면 안되나요??

  그리고 우리에겐 잊고 있었던 전치사구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러분 속으로" 즉 우리는 '여러분'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εις). '여러분'에게 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마치 3일 반의 공백 속에서 누워만 계셨던 메시아처럼, 밖에서 보기에 에클레시아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이 움트고 있습니다. '신실함'은 자신의 몸을 '약함'과 '부활'의 경계로 삼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삶의 태도가 "여러분을 향해" 보여질 무언가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을 향하는 공동체는 약함에 참여하는 현재상태를 갖습니다. 이 약함에의 참여야 말로 입증의 정당한 근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2:19~13:4

  19) 오랫동안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변명한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메시아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집짓기를 위해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20) 내가 갔을 때 내가 뜻하는 류로 여러분을 발견하지 못할까봐, 바로 여러분이 바라지 않은 류를 내가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게 될까봐, 싸움, 열심, 화들, 나쁜 말들, 수군거림들, 부푼 자아들, 무질서들이 있을까봐. 21) 내가 다시 갔을 때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향해 낮추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비뚤어져버린 이들과 생각바꾸지 않은 이들중 많은 이들을 슬퍼할 것입니다, 더러움과 포르네이아와 그들이 정한 과도함으로 말입니다.
'
  13:1) 이 세번째(방문)로 나는 여러분을 향해 갈 것입니다. 두 세 증인들의 입으로 모든 이야기는 세워질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말하고 앞에서 말씀했습니다, 2) 그 두번째로 내가 곁에 있었을 때와 같이, 떠나있는 지금 전에 비뚤어졌던 이들과 모든 남은 이들에게도 말입니다, "내가 다시 가면 (반드시)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3)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내 안에서 메시아께서 말하시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열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이는 여러분 속으로 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할 수 있으십니다.
즉 그이는 약함으로부터 매달리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사십니다.
즉 바로 우리는 그이 안에서 연약해 있지만, 오히려 그이와 함께 하나님의 잠재력으로부터 살 것입니다, 여러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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