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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5~13

  여러분들은 직접 걸으십시오, 만일 그 신실함 안에 지금 있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입증하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여러분 안에 메시아 예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입증되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입증되지 못한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분명해질대로 분명해진 본문 앞에서 긴 해설은 무익합니다. 직접 걷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신실함은 곧 직접 걸음입니다. 직접 걷지 않으면, 입증되지 못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의 권고대로, 그 안에 계신 거룩한 숨결을 따라 직접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나쁜 것도 만들어지지 않기를, 이는 우리가 입증인으로 드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들이 그 온전함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증되지 못한 이들처럼 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는 그 참에 맞서서는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참을 위해서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연약할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들로 있다면 언제나 기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도합니다.
  그가 우려하는 나쁜 상황을 놓고 말합니다. 바울의 우려는 '우리가 입증하는 사람들로 드러날 수 있을까'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온전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령 그 과정 속에서 바울일행은 오해를 받아도 좋습니다.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따라 흔들리는 정체성은 '참'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그 '참'은 자신들의 연약할 때, 타인의 할 수 있음을 기뻐합니다.

이것 또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딱맞음을.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씁니다, 이는 같이 있을 때 단호하게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사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집지음을 위함이지, 무너뜨림을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의 두번째 기도 내용은 '여러분의 딱맞음'입니다. 딱맞지 않다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권한을 사용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단호하게 치리할 것입니다. 이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숨결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딱맞게 되십시오, 파라클레시스하십시오, 바로 이 같은 것을 숙고하십시오, 화평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 안에서 문안하십시오. 거룩한 이들 모두가 여러분을 문안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여러 명령문들을 나열합니다. 기뻐할 것, 딱 맞게 될 것, 파라클레시스할 것, 이것들을 숙고할 것, 화평할 것.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이상의 명령문의 내용대로 걷고 스스로를 입증한다면, 바울일행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우리"라고 부르는데 더이상 주저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종말론적 삶으로 들어온 이들과 서로 문안하십시오.

주님이신 메시아 예수의 거저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숨결의 코이노니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교회에서 흔히 듣는 축도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고린도후서 내용을 요약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먼저 주님이신 메시아 예수는 연약함으로 함께 하시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대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연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 거룩한 이들의 연대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곧 거저의 무한한 출처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에클레시아에서 에클레시아로 흘러갑니다. 곧 숨결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바울이 요구했던 내용들을 정리하면서도,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아직 삼위일체라는 말이 생기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주시고, 자신의 숨결로서 공동체가 서로 결속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축도문을 매주 듣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 속에, 이 축도문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3:5~13

  여러분들은 직접 걸으십시오, 만일 그 신실함 안에 지금 있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입증하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여러분 안에 메시아 예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입증되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입증되지 못한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그런데 나는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나쁜 것도 만들어지지 않기를, 이는 우리가 입증인으로 드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들이 그 온전함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증되지 못한 이들처럼 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는 그 참에 맞서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참을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연약할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들로 있다면 언제나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딱맞음을.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씁니다, 이는 같이 있을 때 단호하게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사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집지음을 위함이지, 무너뜨림을 위함이 아닙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딱맞게 되십시오, 파라클레시스하십시오, 바로 이 같은 것을 숙고하십시오, 화평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 안에서 문안하십시오. 거룩한 이들 모두가 여러분을 문안합니다.

  주님이신 메시아 예수의 거저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숨결의 코이노니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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