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앞 절인 11:2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감히 해보려는 그 연약함 안에서(의 말하기를), 그 현명함없음 안에서 나도 감히 말해 보겠습니다.


  그 연약함 안에서의 말하기, 현명함없음으로 말하기, 존경없음을 따라 말하기의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22~33

그들이 히브리인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의인들입니까? 내가 미친척하며 나를 위해서 말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랑을 시작합니다. 살몸을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과 '살몸'을 놓고 비교해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격은 몸 밖에서 주어진 자격이 아니라, 그 몸적 생활의 변화로 드러나시는 숨결의 자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4장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바울은 살몸의 자격을 따져보는 어리석은 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의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이 점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뒤쳐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짧게 "나도 그렇습니다"라 답했던 물음들과는 달리, "메시아의 의인들입니까?" 라는 질문 앞에서는 미친척하며 무언가 길게 말해보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메시아의 의인"임을 증명하는 빛나는 공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습니까?


고생들로 내가 넘치며,
재앙들로 내가 넘치며,
갇힘들로 내가 도를 넘어섰으며,
죽음들로 빈번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나는 다섯 번의 마흔에서 하나 뺀 태형을,
나는 세번 채찍으로 맞았고, ,
한번은 내가 투석형을 당했으며,
나는 세번 난파되었고,
바다 밑바닥에서 밤낮을 보냈습니다.

길떠남들이 빈번했는데,
강물들의 위험들로,
혁명가들의 위험들로,
유대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이방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도시에서의 위험들로,
광야에서의 위험들로,
바다에서의 위험들로,
거짓형제들 안에서 위험들로,

고생으로 그리고 고됨으로,
잠못잠들 안에서 빈번하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들 속에서 빈번하게,
추위와 헐벗음으로.


  바울의 빛나는 공적들입니다. 바울의 살몸의 자랑은 이런 식입니다. 이 목록이 "메시아의 의인입니까?" 뒤에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고생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만일 누군가 저런 목록들을 자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저번에 배고팠어', '내가 저번에 다쳤어', '내가 저번에 사고 당했어', '내가 저번에 죽을 뻔했어.' 바울이 이 내용을 열거하기 전에 "내가 미친척하며"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말하기 때문에 미친게 아니라, 고생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을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알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정말 미쳤습니다. 메시아께 미쳤습니다. 메시아의 의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 미친 자랑은 거짓 사도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낼 것입니다.


이외의 것들은 떼놓더라도,
나에게는 조임이 날마다 있는데,
그것은 모든 에클레시아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누군가 연약하다면, 나도 연약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걸려 넘어진다면(σκανδαλιζω),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거짓 사도들은 모든 에클레시아들을 염려하는 그 '조임'이 없습니다. 에클레시아 식구들이 연약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는 에클레시아 식구들이 '거짓된 모방욕구를 따라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은 그들을 염려하고 기도하고 편지쓰고 사람 보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에클레시아가 자신을 인정해줄지에 대해서만 염려합니다. 온갖 살몸의 사랑을 늘어놓고선, 에클레시아가 자신을 모방하도록 만듭니다. 즉 자신이 에클레시아에 기생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자랑해야만 한다면, 나의 그 연약함에 속한 것들을 나는 자랑하겠습니다. 하나님 즉 주님이신 예수의 아버지가 아십니다, (그는 시대들에 이르도록 잘 말해지실(찬양받을) 분입니다),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마스커스에서 지역 총독인 아레타 왕이 나를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의 그 도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창문을 통해서 광주리로 그 성벽을 통해 내려가서 그의 손들로부터 달아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복된 사고를 떳떳하게 밝힙니다. "나의 그 연약함에 속한 것들을 나는 자랑하겠습니다." 바울의 살몸은 연약하기 때문에 고생합니다. 그는 폭행과 위험과 몸의 약함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는 지금껏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당함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자랑입니다. 메시아의 의인이기 때문에 그는 당해왔고, 그는 '당하지 않음'이 자랑이 아니라, 이 '당함'을 자랑합니다.

  고대 사회의 전투에서는, 적군의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간 사람에게 명예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먼저 적의 성벽 위를 점령하려고 병사들은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의 일을 자랑합니다. 그는 성벽으로 올라감을 자랑하지 않고, 성벽으로부터 내려옴을 자랑합니다. 그것도 광주리로 내려옵니다. 정복이 아니라 달아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사고는 뒤집혀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의 사고가 뒤집힌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뒤집힌 것입니까? 메시아의 의인으로서, 그리고 의인이 '되고자' 그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생이 그의 자랑입니다. 그러한 그를 맞아주고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곧 에클레시아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 에클레시아는 바울과 함께 사고가 뒤집한 사람들, 다시 제자리를 찾을 세상의 왕들 아닙니까?
  모방욕구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바울만이 걸려넘어지지 않고 참된 것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찌 입증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삶에서 그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그이, 우리를 위한 "조임"으로 고생하다 죽으신 그이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22~33

그들이 히브리인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의인들입니까? 내가 미친척하며 나를 위해서 말해보겠습니다.

고생들로 내가 넘치며,
재앙들로 내가 넘치며,
갇힘들로 내가 도를 넘어섰으며,
죽음들로 빈번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나는 다섯 번의 마흔에서 하나 뺀 태형을,
나는 세번 채찍으로 맞았고, ,
한번은 내가 투석형을 당했으며,
나는 세번 난파되었고,
바다 밑바닥에서 밤낮을 보냈습니다.

길떠남들이 빈번했는데,
강물들의 위험들로,
혁명가들의 위험들로,
유대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이방인들로부터의 위험들로,
도시에서의 위험들로,
광야에서의 위험들로,
바다에서의 위험들로,
거짓형제들 안에서 위험들로,

고생으로 그리고 고됨으로,
잠못잠들 안에서 빈번하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들 속에서 빈번하게,
추위와 헐벗음으로.

이외의 것들은 떼놓더라도,
나에게는 조임이 날마다 있는데,
그것은 모든 에클레시아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누군가 연약하다면, 나도 연약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걸려 넘어진다면(σκανδαλιζω),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만일 자랑해야만 한다면, 나의 그 연약함에 속한 것들을 나는 자랑하겠습니다. 하나님 즉 주님이신 예수의 아버지가 아십니다, (그는 시대들에 이르도록 말 말해지실(찬양받을) 분입니다),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마스커스에서 지역 총독인 아레타 왕이 나를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의 그 도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창문을 통해서 광주리로 그 성벽을 통해 내려가서 그의 손들로부터 달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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