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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16~21

  16) 나는 다시 말합니다, 누구도 내가 현명함없다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가령 여러분들이 나를 현명함없다고 여긴다면, 내가 다소 자랑 좀 해보겠습니다. 17)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나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함없음 안에 있는 것처럼, 바로 그 자랑의 모자람 토대(ὑπόστασις)에서 (하는 것입니다).


  "현명함"은 코린토스 지역 사람들이 가장 좋게 여기던 덕목이었습니다. '소프렌(σωφρην)'을 번역한 것인데, 흔히 "지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5:11~15 해설에서 이미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좀 다른 관점에서 이 '소프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화가 추구하던 이상적 인간상(figura)이 "현인(지혜자)"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는 현인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생각과 실천을 조화시키려는 사람들이었고, 이 사람들의 생각이 국가 통치 기술에 적극적으로 적용되었죠. 그래서 '현명함 없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그리스-로마 문화 안에서 "현명함 없다"는 말은 적어도 앞에 선 선생이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지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별 시덥지 않다고까지 했으니까요. 현명함으로 사람을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 안에서, 바울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도 내가 현명함없다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현명함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일단 그들의 말을 받아줍니다. 바울은 그 중요하다는 현명함을 떼어놓고 다른 방식으로 현명함을 드러내볼 생각입니다. 현명함없음 안에 있는 것처럼, 별로 자랑할 것 없는 태도를 취하여(자랑의 모자람 속에서)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이 전략 역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위함입니다.

2017.11.26
왜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를 '모자람'이라고 번역했지? "바로 그 자랑의 휘포 스타시스 안에서(ἐν τῇ ὑποστάσει ταύτῃ)". 그렇다면, 이때 휘포스타시스는 무엇으로 번역되는가? 애매하기 때문에 국역과 영역에서 모두 제외한듯 싶다.
  위 구절은 토마스 슈라이너의 주장처럼, 휘포스타시스를 '확신'이라는 감정적 차원의 동사로 번역해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바로 그 자랑을 토대로 말해보겠습니다.
"

많은 이들이 살몸을 따라 자랑할 때, 나도 자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명한 여러분들은 현명함없는 이들을 즐거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들은 만일 누군가 여러분들을 노예삼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잡아먹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취하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들어올리려고 해도, 만일 누군가 얼굴로 여러분을 치려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 모자란 자랑이란 살몸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이 현명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살몸 자랑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거짓 사도"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 살몸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이 푸대접받는 이유도 바로 이 "살몸"이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3,4장) 살몸 안에 비춰진 성령에 대해서 그토록 말했는데도,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바울은 현명함 없어 보이는 현명한 방식으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대한 디스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현명한 여러분들은 현명함없는 이들을 즐거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들은 만일 누군가 여러분들을 노예삼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잡아먹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취하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들어올리려고 해도,

만일 누군가 얼굴로 여러분을 치려한다 해도 말입니다.


21) 내가 존경없음을 따라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누군가 감히 해보려는 그 연약함 안에서(의 말하기를), 그 현명함없음 안에서 나도 감히 말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일체의 존중을 버리고, 마치 메시아 예수를 따르기 전처럼, 이미 거짓 사도들이 하고 있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모방하고 있는 그 방식으로 말해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현명함 없는 것인데, 이 모양 빠지는 일을 바울은 감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1:16~21

  16) 나는 다시 말합니다, 누구도 내가 현명함없다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가령 여러분들이 나를 현명함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내가 다소 좀 자랑할 것을 위함입니다. 17)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나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함없음 안에 있는 것처럼, 바로 그 자랑의 모자람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18) 많은 이들이 살몸을 따라 자랑할 때, 나도 자랑하겠습니다. 19) 왜냐하면 현명한 여러분들은 현명함없는 이들을 즐거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즉 여러분들은 만일 누군가 여러분들을 노예삼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잡아먹으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취하려해도, 만일 누군가 여러분을 들어올리려고 해도, 만일 누군가 얼굴로 여러분을 치려한다 해도 말입니다. 21) 내가 존경없음을 따라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했을 때 처럼 말입니다. 누군가 감히 해보려는 그 연약함 안에서(의 말하기를), 그 현명함없음 안에서 나도 감히 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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