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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16~24

  그런데 거저가 있습니다, 디도의 가온 안에 우리를 대신한 바로 '그 속도냄'을 주신 하나님께 말입니다, 왜냐하면 디도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파라클레시스를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하는 것에 더 속도를 내어 더 기꺼이 여러분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거저'와 '감사'는 같은 단어를 씁니다(Χαρις). 생각해보면, 댓가로 받은 것이라면 감사할 리 없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어야 감사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은 "디도의 가온 안에 우리를 대신한 바로 그 속도냄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디도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방문했고,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디도에 관하여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그가 파라클레시스를 받아들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두 가지 비교급으로 표현됩니다. 더 속도냄, 더 기꺼움. 디도는 그 더한 속도냄과 더한 기꺼움을 가지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전세계적인 에클레시아 연대를 확인하는 것, 바로 연보 프로젝트입니다.

  제가 '그 속도냄'이라 번역한 말은 '스푸데(
σπουδη)'인데, 기본적인 의미는 '물리적인 속도', '빠름' 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이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1. active, diligent, zealous, earnest
  2. very diligent

  그런데 '물리적인 속도'가 '마음의 상태', '태도'로만 번역되는 것에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이 변환과정을 확인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기본적인 의미인 '속도냄'으로 번역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함께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에게 모든 에클레시아들을 통한 복음 안에서 칭찬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와 함께 다른 형제 하나를 더 보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에클레시아들을 통한 복음 안에서 칭찬을 받는 형제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에클레시아들에 의해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이로 선출되었습니다, 우리에 의해 섬겨진 바로 그 거저와 함께, 바로 그 주의 영광과 우리의 '열망'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을 놓았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우리에 의해 섬겨지는 바로 이 막대함으로 비난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디도와 함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 가는 형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는 에클레시아들에 의해 바울일행과 함께 여행하도록 선출된 사람입니다. 톰 라이트는 아마도 그가 마케도니아 사람일 것이라 말합니다. 전세계적인 에클레시아 연대를 이루기 위해, 바울을 돕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입니다.

  그는 "바울일행에 의해 섬겨진 바로 그 거저"와 함께 있도록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 "그 거저"란 연보 프로젝트를 의미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보 프로젝트는 "주의 영광과 우리의 열정을 향한" 것입니다. (여기서 '열망'으로 번역한 단어는 '프로뛰미아(προθυμια)'입니다(σπουδη가 아닙니다). '앞쪽으로 숨을 헐떡임'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로마인들이 보기에) 문명인과 야만인의 관계를 새롭게 엮으시는 주님을 드러내려는데 그들의 호흡(열망)이 있습니다. 즉 유대인 공동체를 돕는 이방인 공동체를 통해서, 즉 전세계에 새롭게 등장한 하나님의 새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기를 그들은 간절히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 앞에서 바울은 디도와 함께 동행인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디도 혼자서 그 막대한 금액을 운반한다는 우려를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끝내 "돈"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얼굴 앞에서 온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온전한 것을.


  바울일행은 이 일을 조심조심하고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 핑계를 대고 그 과정을 대충대충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혹은 현실적인 상황을 핑계대며 하나님의 뜻을 소홀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온전'이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온전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두 가지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될 때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핑계로 사람을 미워할 때가 문제고, 사람 사랑을 핑계로 하나님을 뒷전으로 미뤄놓을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리의 그 형제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를 우리는 여러 차례 속도냄이 있다고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을 향한 많은 확신으로 더욱 속도냄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디도와 다른 형제)"와 함께 또 다른 형제 한 사람을 더 보냈습니다. 총 세 사람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열심이 있다고 여러 차례나 입증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도 연보 프로젝트에 '같은 열심'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더욱 열심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관통하는 키워드들 중 하나가 바로 '열심'입니다. 열심은 언제나 열심의 대상이 있습니다. 희랍어로는 '스푸데(σπουδη)'를 쓰는데, '속도를 냄', '서두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5에서는 이 단어의 동족어가 동사로 쓰였는데(σπουδαζω), 개역개정에서는 "힘쓰다"로 번역했고, ESV에서는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라 번역했습니다.
  Oxford Latin Dictionary에 보면 희랍어 스푸데는 라틴어 studere로 파생되었다고 말합니다. 라틴어 studere는 "열정(심)"으로 해석됩니다. 희랍어가 '물리적인 속도'를 의미하고 있다면, 라틴어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과연 희랍어 스푸데와 라틴어 studere가 연결된 것인지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속도를 말하는 단어가, 인간 심상의 단어로 전환되는 과정은 아직 뚜렷하게 규명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내가 유대교에 '열심'이 있다"라고 말할 때의 열심은 '스푸데'는 아닙니다. '젤로테스(ζηλωτης)'입니다. 지금 단어들이 서로 엉켜있음을 느낍니다. 일단 번역하면서 '프로뛰미아(열망)', '스푸데(속도냄)', '젤로테스(열심)'을 구분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스푸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연보 프로젝트의 급박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디도에 대해서는, 그는 나의 동료이자 여러분을 향한 동역자(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에클레시아의 사도들이자, 메시아의 영광(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디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에클레시아들의 사도들"이라 말합니다. '사도'는 기본적인 의미는 '보냄받은 이'입니다. 나중에는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라는 의미로 한정지어 사용됩니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사도'라는 단어는 꼭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에클레시아에 의해 보냄받은 이들도 그렇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을 향해 "메시아의 영광"이라 말합니다. 저는 '영광'을 '뚜렷', '드러남'이라 번역해왔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희랍어로는 '독사'를 씁니다. 승천하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는 사람들이 바울의 형제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곧 몸의 기능입니다. '사랑', '정의', '평화' 등의 추상명사들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 혹은 과거의 '의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눈에 보이도록 의미화, 가시화, 현실화 하는 것은 몸을 가진 인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 모두가 메시아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만, 인간만이 보이지 않는 차원의 것을, 눈에 보이도록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바울의 형제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의 드러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보임과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자랑을
  우리가 (여러분 앞에) 내보이는 그들에게,
  즉 에클레시아들의 얼굴을 향해 (보여주십시오)!


  바울은 동사가 없는 문장으로 8장을 마무리합니다. 그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두 가지 목적어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여러분의 사랑의 보임"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사랑을 보여야 하고, 바울일행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로 디도 외 2인에게 말입니다. 즉 바울은 '사랑과 자부심의 환대'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일행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그 세 사람을 내보였습니다. 메시아의 영광으로서, 에클레시아에 의해 보냄받은 이들로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향한 동역자로서, 바울의 동료로서. 그리고 그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을 덧붙입니다. 이들은 "에클레시아들의 얼굴"입니다. 이들이 에클레시아를 대표합니다. 모든 에클레시아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들 얼굴을 따라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8:16~24

  그런데 거저가 있습니다, 디도의 가온 안에 우리를 대신한 바로 그 속도냄(조급함)을 주신 하나님께 말입니다, 왜냐하면 디도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파라클레시스를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하는 것에 더 속도를 내어 더 기꺼이 여러분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함께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에게 모든 에클레시아들을 통한 복음 안에서 칭찬이 있습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에클레시아들에 의해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이로 선출되었습니다, 우리에 의해 섬겨진 바로 그 거저와 함께, 바로 그 주의 영광과 우리의 열망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을 놓았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우리에 의해 섬겨지는 바로 이 막대함으로 비난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면전에서 온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전한 것을.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리의 그 형제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를 우리는 여러 차례 열정이 있다고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을 향한 많은 확신으로 더욱 열심이 있습니다.

  디도에 대해서는, 그는 나의 동료이자 여러분을 향한 동역자(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에클레시아의 사도들이자, 메시아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보임과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자랑을
  우리가 (여러분 앞에) 내보이는 그들에게,
  즉 에클레시아들의 얼굴을 향해 (보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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