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9:1~15

  즉 한편으로는 그 거룩한 이들을 향한 그 섬김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쓸 것이 제게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 대신 내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자랑한 그 열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이아인들이 작년부터 준비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심(젤로스)이 '그들의' 흘러넘침들을 자극했습니다.


  "한편으로는(μεν)~다른 한편으로는(δε)"의 문단구성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일에 관하여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쓸 것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말그대로 "쓸 것이 내게 넘치게 있다"인데, 이것이 다수의 번역본들은 "넘치도록 썼다. 그래서 이제 쓸 말 없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ESV와 새번역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ESV : Now it is superfluous for me to write to you about the ministry for the saints.
새번역 :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돕는 일을 두고, 나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글을 써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첫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뒤에 이어지는 "왜냐하면"의 의미가 결정됩니다. 즉 쓸 것이 많은 이유가, 1)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그 열망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2) 알고 있기 때문에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바울이 "그 열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뒤에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아카이아인들이 작년부터 준비했다" 아카이아는 코린토스를 아우르는 더 큰 지역 개념이므로, 여기서 아카이아인들이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작년부터 연보 프로젝트를 준비했어! 이 사람들은 이처럼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고 싶어하고 있어!' 그리고 바울은 이 사실을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에게도 자랑까지 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바울의 이 자랑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더 열심을 내어 예루살렘 공동체를 돕자!'는 의욕적인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흘러넘침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연보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모인 것이지요.


  지금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조심조심 쓰고 있다는게 느껴지십니까? 마치 아버지가 아이를 잘 다독이듯,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위신을 세워주면서도, 이들이 기꺼움으로 연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앞에서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가 잘했다고 잔뜩 칭찬해놓고, 혹여나 이때문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비교당했다고 생각하고선 침울해지지 않도록, '그 잘함에는 너희의 잘함이 포함되어 있어'라고 말하는듯 합니다.

-'열심'에 관하여
  바울이 사용한 '열심(ζηλος)'은, 7장에서 등장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7b
나를 위한 여러분의 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

고린도후서 7:11a
즉 보십시오, 바로 이 하나님을 따라 (했던) 슬퍼하기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열심을 만들어냈는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변호(변증)를, 오히려 분함을, 오히려 두려움을, 오히려 갈망을, 오히려 열심을, 오히려 의로운 처벌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열심'이란 말에서 떠오른는 단상은, 신명기 4:15,24와 요한복음 2:17입니다. 신명기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형상없는 소멸하는 불로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은 모든 형상들을 불허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요약하는 말이 '열심'입니다. 우리말 성경들은 이것을 '질투'로 번역했지만 말입니다.

신명기 4:2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삼키는 불이시며, 질투하는(ζηλωτης)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열심은, 그 어떠한 형상도 불허합니다. 이 '형상불허의 열심'은 유대교의 열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유대교인으로서 자신의 열심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ζηλωτης)이 있었으나

빌립보서 3:6
열심(ζηλος)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즉 바울은 형상을 불허하시는 불로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열심(질투)을 따라 자신도 형상들을 섬기는 이들을 줄곧 핍박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저 '하나님의 열심'을 유대교와 다른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2:17, 개인번역
    그이의 제자들은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당신의 그 집의 열심이 나를 집어 삼켜버리리라"

  제자들이 기억을 떠올린 문장은 시편 69:9였습니다. 요한이 인용한 70인역에서는 68:9입니다.

시편 68:9, LXX, 개인번역
나는 나의 형제들에게 낯선 이가 되었고
그리고 내 엄마의 아들들에게 나그네(이방인)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집의 열심이 나를 집어삼켰기 때문이고,
모욕하는 이들이 나를 모욕하며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이 "당신의 그 집의 열심"을 신명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불허의 열심'으로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존을 위한 형상들을 불허하시는 하나님은, 거짓 형상들을 사르는 불로, 자기 아들을 사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상들을 훼파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울은, 그 열심으로 다메섹으로 가던 중, 그 불이 예수를 태우며 거짓 형상들을 태워버리고, 그 불 속에서 죽지 않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진정하고도 유일한 형상으로서 메시아 예수께서 드러나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태워짐과 나타남'은 '집'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었고, 비로소 이사야 66:22의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심지어 아들을 모욕하는 이들도 그 아들을 통해서 들어가 살 수 있는 '용서'의 현관을 가지고 있음이 만천하에 알려졌고, 지금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이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여러분 대신(위해) 내가 했던 우리의 그 자랑이 이 부분에서 텅 빈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이 여러분들을 준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나와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이 가서 여러분들이 준비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무척 부끄럽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여러분에 대해서 이러한 휘포스타시스로 말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형상들을 태우고, 진정한 형상을 모시는(συνειδος) 열심이 바울에게도 있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도 있습니다. 연보 프로젝트는 자기 공동체의 안위만 추구하는 형상들을 태우고, 진정한 공동체적 형상인 메시아 예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열심으로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편지쓰기, 다른 하나는 형제들 보내기.
 
  바울은 다시금 조심조심 써나갑니다.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자랑했는데, 만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서 연보가 잘 걷히지 않는다면, 나의 자랑은 공허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바울이 마케도니아인들과 함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방문했을 때, 미리 연보가 걷혀있어야 한다고 돌려서 말합니다. 이 일은 부끄러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들을 자랑한 바울일행의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짊어지신 부끄러움(어리석음)과도 같습니다. 흔히 인터넷에서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라는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타인의 온전한 삶이 나의 자랑이듯, 타인의 옳지 못한 행동은 나의 부끄러움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올바름을 자랑해주면서도, 서로의 잘못을 함께 부끄러워하는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입니다. 파라클레시스는 그런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휘포스타시스를 '소망'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지의 문제. 토마스 슈라이너 히브리서 주석 p.502

  그래서 나는 그 형제들을 파라클레시스할 사명(필요)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먼저 여러분에게 나아가고 여러분이 좋은 말로 사전에 약속한 것을 사전에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준비가 다음과 같은 좋은 말로 되었습니다, 탐욕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색하게 뿌리는 이는 인색하게 거둘 것이고, 좋은 말들로 뿌린 이는 좋은 말들로 거둘 것입니다. 각각은 그 가온에 가져온대로, 고통으로부터나 '해야하기 때문'으로부터가 아니라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문 전에 '디도외 2명'을 먼저 보냈습니다. 목적은 바울이 마케도니아인들과 코린토스에 당도하기 전에, 연보를 모금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마지 못해 하거나 강제로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연보 프로젝트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전에 "좋은 말(ευλογια)"로 약속한 일입니다. 제가 "좋은 말"이라 번역한 말은 "찬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말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와 비슷한 격언을 인용합니다. 즉 찬양으로 뿌린 그 일을 찬양으로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찬양은 가온에 가져온 것입니다. 가온에 가져온 '찬양'이 '고통'이나 '강제'와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비
  바울은 "자비로운 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비로운"이란 말은 '힐라로스(ἱλαρός)'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 나오는 다른 문맥이 있어서 소개드립니다.

마태복음 16:22, 개인번역
그리고 그이를 붙들고서 베드로가 그에게 존경을 보이며 말했다.

  "당신에게 자비로움(ἵλεως)이 있습니다, 주님!
  이것이 당신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존경을 표하며면서 "자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 뒤에 베드로가 들었던 말은, "내 얼굴 앞에서 물러나라, 사탄아!" 였습니다. 이는 "자비"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베드로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그에게 자비로움을 말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이해했던 자비로움은 '고생없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자비로움'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메시아의 고생을 통해서 왔습니다. 같은 자비라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고생을 통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로 같은 자비가 흘러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고생'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것은, 그들 가온에서부터 찬양으로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한 고생이 나의 찬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모든 거저를 여러분을 향해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면에서 모든 시간 모든 자기만족(자족)을 여러분들이 갖고서 모든 좋은 일을 향해 여러분이 넘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듯 말입니다.

"그가 흩뿌린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의 의가 그 시대에 이르도록 머문다."


  여기 고생하고 있는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거저를 말합니다. 심지어 그의 강조를 보십시오. "모든 면에서, 모든 시간, 모든 자기 만족"! '자기 만족'이라 번역하면 부정적인 느낌이 있습니다만 사실 자기만족은 나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만족시키는 분이십니다. 다만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만족은 만족도 없을 뿐더러, 된다한들 인지부조화 내지는 폐쇄적 자기 만족이 될 것입니다. 유한한 물리적 조건과 무한한 갈망이 얽히어 있는 인생을 그 무엇이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기 만족은 곧 자족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꽉 차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미래의 최후의 심판에서부터 오는 현재의 떳떳함, 나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당당함입니다.
바울은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아무 거나 대강 인용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구절의 넓은 문맥은, 현 상황의 문맥과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며 새로운 통찰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알고 있다면, 바울의 인용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편 112:9, 새번역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나누어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


잠언 22:9, LXX, 개인번역
가난한 이에게 자비로운 그는 나눌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음식들을 그는 그 가난한 이에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김과 영예를 선물 주는 이는 얻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 호흡은 그 소유들로부터 그는 떼어 들어낼 것이다.

  바울이 인용했을 법한 구절 두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고린두후서 본문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바울은 "의"와 연결시켰는데, 잠언 구절에서는 "의"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일 시편 구절과 잠언 구절이,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의"을 "이김, 영예, 호흡"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1)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현실(이김), 2) 그 하나님의 인정(기억)해주심(영예), 또 내 소유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3) 그 소유물과 별개로 인정받는 나(호흡)이 "의"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과 '의'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키케로가 쓴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si quando ei dicendum erit de iustitia et fide - <De Oratore I>, Cicero, 224

  제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유스티티아(iustitia)와 피데(fide)입니다. 유스티티아는 '법이 정한 권한'을 의미하고, '피데스'는 '그 권한을 충실히 사용함'을 뜻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의(δικαιοσυνη)와 신실함(πιστις)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키케로의 글은 권한과 그 권한을 충실히 사용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한입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새창조를 살아가는 종말론적 인간으로서 권한이 부여된 사람이고, 그들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이들이 권한을 충실히 사용하면 그것을 '신실함(믿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의와 신실함은 비식별영역입니다. 의인으로 임명하시고자(칭의) 하나님이 먼저 예정하셨는지, 아니면 내가 신실했더니 의인으로 불려진 것인지는 시간의 수직선 위에서 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칭의가 벌어질 때 그 사람의 본성(natura)이 새로워지고, 그에게는 새로운 일상의 삶(usus, 몸 사용법)이 주어지는 것만이 확실합니다.
  이 유스티티아와 피데스의 문제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적용해봅시다. 그들은 하나님께 '의'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 칭호는 '머뭅니다'. 즉 이들의 지속되는 상태가 '의'입니다. 즉 '의'는 권한을 가진 상태입니다. 이 권한이 충실히 사용되는 것이, 가난한 이를 돕는 일 이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
권한을 '충실히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이르도록 머문다"는 말은 곧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권한'과 '충실한 사용'이 매일의 삶에서 생각과 실천으로 반복될 때, 그 권한은 나에게 익숙한 삶으로 변환되고 체득됩니다. 나무로 치면 생장이 이뤄집니다. 즉 인격이 그 권한과 권한 이행에 걸맞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달라짐'이 이미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을 '에클레시아'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그 의의 권한에 걸맞는 충실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바울의 편지와 사람보냄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뿌리는 이를 씨로 채우시는 이는 먹음을 향한 음식도 채우실 것이고,  여러분의 그 씨를 넘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의의 '나옴'들을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꼬이지 않음을 향해 흘러넘치게 사는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공적 업무의 섬김이 그 거룩한 이들의 모자람들을 흘러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흘러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시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55:8~11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본문에서 "씨"는 신천지 같은 이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느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씨는 '연보 프로젝트'를 의미합니다. 또한 바울은 앞에서 인용한 잠언구절의 "의"에 "열매"를 붙여놨습니다. 즉 의의 권한이 가난한 이를 돕는 권한 이행으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28의 '생육, 번성'과도 연결됩니다. 생육을 원문으로 보면 '열매맺음'이고, 번성은 그 '열매맺음'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55:8~11에는 물의 순환이 나옵니다. 비가 내리고, 그 비가 씨를 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사람에게 다시금 씨를 주고 먹거리를 줍니다. 그리고 다시 그 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뿌린 의의 씨앗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삶으로 모두를 공평하게 먹이고, 다시금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거기에 참여할 때 나옵니다.

  본문에 '꼬이지 않음'이라 번역한 말은 '하플루스(`απλους)'입니다. 앞에 있는 '하'는 부정접두어고, 뒤에 있는 '플루스'는 '머리를 땋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꼬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플루스는 꼬인 것이 풀려서 단순해짐을 의미합니다. 꼬였을 때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들이 가로 막혀서 누군가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날 익숙한 말로 하자면,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배부를 때, 예루살렘 에클레이사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꼬인 것을 풀어 단순하게 하시고, 그 단순함 속에서 모두를 풍요롭게 하시며, 그 하나님께 감사야 말로 돌려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바로 이 섬김의 이러한 입증을 통해 그 하나님을 뚜렷히 드러내며 (있습니다),
  여러분의 같은말(동의)의 그 아래놓임으로,
  메시아의 복음과 연합의 꼬이지 않음을 향해, 그들 곧 모두를 향해,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을 위한 기도로 여러분을 고대합니다, 여러분을 향해 그 넘어던지시는 하나님의 거저를 통해. 그 말할 수 없는 그의 선물로 감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로 '섬김 입증'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함께 연대하기 시작한 에클레시아들은 이제 같은 말 아래 놓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4장에서 경계했던 것이 다시금 반복되어 말의 노예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말 아래 놓였지만, 말 아래 갇혀있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들은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마땅히 돌려드려고 합니다. 말을 뛰어넘은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란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 아래서 에클레시아의 연대는 꼬여선 안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께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모두를 지나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포기할 수 없는 그 과정의 일환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도미노 블럭 없이는, 전체 아름다운 그림을 드러내도록 넘어질 수 없습니다. 삶에 필요한 돈의 흐름이 에클레시아를 연대시키는 혈관으로서 자리잡는 과정이고, 그 에클레시아의 연대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메시아의 몸으로서 세상 전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순환케 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분이시자, 그 모든 것의 귀결이신 하나님. 고린도후서 9장은 돈 얘기만도 아니고,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도 아닙니다. 에클레시아가 마땅히 하나님의 순환에 참여하는 공동체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 위대한 편지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결론을 로마서 11:33~36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33~36

아, 깊도다!
하나님의 풍성함과 지혜와 지식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찾아낼 수 없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으며,
누가 그와 '더불어 논하는 이'가 되었으며,
누가 그에게 미리 드려서, 그의 보답을 얻으리요?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를 지나 그에게로 감이라.
그 드러남이 그에게 세세토록, 아멘.


  이러니 다른 에클레시아들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참여를 고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마지 못해 참여해야 할 일이 아니라, 에클레시아가 마땅히 충실히 따라야할, 그리고 무척이나 감사해야 할,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권(權)'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권'을 쓸 때, 에클레시아는 여러 어려움과 절망들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저를 통해, 그 권에 걸맞지 않은 비뚤었던 이들이, 그 권을 충실하게 쓰는 사람들로 새로이 창조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랑할 수 없는 한계를 매순간 넘어서는 이들이, 온 세상 앞에 "하나됨의 하나의 예(exemple)"로서 서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세우셨습니다(요한계시록 6:17, 7:4). "그 말할 수 없는 그의 선물"을 받은 이들이 어찌 만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꼬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긴 만물의 첫열매들입니다.

  이 연보 프로젝트가 어찌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약한 단서들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고린도후서 이후에 쓰인 것이 분명한 한 편지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15:26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씻어난 이들을 섬기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씻어난 이들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를 함께 나누겠다고 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편지의 결말 이후 들리는 소식은 그리 달가운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급히 다섯번째 편지를 위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야만 했습니다. 아직 파라클레시스할 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9:1~15

  즉 한편으로는 그 거룩한 이들을 향한 그 섬김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쓸 것이 제게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 대신 내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자랑한 그 열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이아인들이 작년부터 준비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심(젤로스)이 '그들의' 흘러넘침들을 자극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이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여러분 대신(위해) 내가 했던 우리의 그 자랑이 이 부분에서 텅 빈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이 여러분들을 준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나와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이 가서 여러분들이 준비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무척 부끄럽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여러분에 대해서 이러한 놓임으로 말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형제들을 파라클레시스할 사명(필요)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먼저 여러분에게 나아가고 여러분이 좋은 말로 사전에 약속한 것을 사전에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준비가 다음과 같은 좋은 말로 되었습니다, 탐욕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심히 뿌리는 이는 조심히 거두리라,
그리고 좋은 말들로 뿌린 이는 좋은 말들로 거두리라.


  각각은 그 가온에 가져온대로, 고통으로부터나 '해야하기 때문'으로부터가 아니라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운(마 16:22) 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모든 거저를 여러분을 향해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면에서 모든 시간 모든 자기만족을 여러분들이 갖고서 모든 좋은 일을 향해 여러분이 넘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듯 말입니다.

그가 흩뿌린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의 의가 그 시대에 이르도록 머문다."


  그런데 뿌리는 이를 씨로 채우시는 이는 먹음을 향한 음식도 채우실 것이고,  여러분의 그 씨를 넘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의의 출생들을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꼬이지 않음을 향해 흘러넘치게 사는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공적 업무의 섬김이 그 거룩한 이들의 모자람들을 흘러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흘러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섬김의 이러한 입증을 통해 그 하나님을 뚜렷히 드러내며 (있습니다),
  여러분의 같은말(동의)의 그 아래놓임으로,
  메시아의 복음과 연합의 꼬이지 않음을 향해, 그들 곧 모두를 향해,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을 위한 기도로 여러분을 고대합니다, 여러분을 향해 그 넘어던지시는 하나님의 거저를 통해. 그 말할 수 없는 그의 선물로 감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 10:12~18  (0) 2017.02.15
고린도후서 10:1~11  (2) 2017.02.14
고린도후서 8:16~24  (2) 2017.02.10
고린도후서 8:8~15  (0) 2017.02.09
고린도후서 8:1~7  (3) 201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