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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1~7
그런데 우리는 여러분에게 다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마케도니아의 에클레시아들 안에서 바쳐진 그 하나님의 거저를,
바울은 3장에서 7장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섬김"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8장에서부터는 그 섬김의 연장선에서 이른바 연보 프로젝트를 다시 언급합니다. 제가 '언급'이라 말한 것은, 이 연보 프로젝트가 이미 세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1~4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들을 위한 모금에 대해서
입니다. 여러분도 갈라티아의 에클레시아들에게 내가 바로잡은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안식 후 첫 날, 여러분 각각은 모두 여분으로
얻은 것을 따로 모아두십시오. 내가 갔을 때 모금들을 그때서야 깨닫지 않도록 말입니다. 내가 여러분 곁에 있을 때, 누구든
여러분이 인정한 사람들을, 여러분의 거저 내놓은 것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공식 서한을 쓸 것입니다.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나도 함께 갈 것입니다.
바울서신의 기록 연대는 A.D.40년대로 추정됩니다. 이때는 예수의 승천 이후와 예루살렘 멸망(A.D.70) 사이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출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재산을 나누고, 함께 떡을 떼며 유대와 로마의 갈등 현장에서 새로운 인간성의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망하기 3,40년 전의 나라는 대단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로마와 전쟁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고, 로마와 결탁해야 한다는 사두개인들도 이스라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론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아예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예배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영위해나가는 에세네파도 있었고, 전면전을 피하고 로마에 부역하는 정치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소매에 단검을 감추고 다니는 시카리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가운데 예루살렘 에클레시아가 있습니다.
이렇듯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는 혼란한 정세와 외부의 압박, 그리고 내부의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바울은, 원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세계에 메시아 예수의 왕되심을 선포했고, 이를 통해 이방인으로 구성된 에클레시아들이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이방인 에클레시아들로부터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고자 합니다.
이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수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선민이고, 택함받지 못한 이방세계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방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대 이방인들은 로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로마인들은 희랍 문명의 계보를 잇고 있었습니다. 희랍 문명은 도시국가에 사는 문명인과 그 바깥에 사는 바르바로스(βαρβαρος)로 세계를 양분합니다. 바르바로스는 "야만인"으로 번역합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세계를 나누는 유대인이나,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나누는 이방인이나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유대인과 그 문명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이방인 에클레시아를 통해 유대인 에클레시아를 돕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이방인 에클레시아인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에클레시아들에게 돈을 모으는 일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서 15:25~32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씻어난 이들을 섬기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씻어난 이들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를 함께 나누겠다고 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루살렘의 씻어난 이들에게 빚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숨쉬는 것을 민족들이 함께 나누었으니, 예루살렘 사람들을 살몸에 관한 것으로 섬겨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일을 마치고, 이러한 일의 열매를 저들에게 확실히 도장 찍은 후에, 여러분들을 지나서 스파니아로 가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갈때, 메시아의 이야기들을 흘러 넘치도록 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우리의 주 메시아 예수와 숨님의 사랑을 통해,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나와 함께 싸웁시다. 이는 이스라엘의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나를 살리기 위함이요, 나의 섬김이 예루살렘 속에서, 그곳의 씻어난 이들에게 받을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함으로 힘을 얻을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구합니다. 아멘.
바울은 로마에 있는 에클레시아들에게도 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로 보내는 연보 프로젝트에 동참하라 촉구했습니다. 이방인 에클레시아가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던 것은, 최초 에클레시아인 예루살렘 에클레시아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모금 계획은 갈라티아, 로마를 지나 스파니아로 이어질 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 에클레시아들을 통해 모금을 하더라도, 예루살렘 에클레시아가 그 돈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연보 프로젝트가 예루살렘 에클레세이에게 "받을만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쪽은 원수 민족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시대에 여전히 진행중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수와 증오를 거스르는 방향의 공동체가 생겨났고, 이 공동체의 범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범세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입증하는 일로서, 연보 프로젝트입니다. 즉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돕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수관계를 새롭게 하고 계심을 온세계에 확증시키려고 합니다. 가해자-피해자가 함께 에클레시아로 연대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보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말이, 오늘 본문의 "그 하나님의 거저"입니다. "그"라는 정관사가 붙었다는 말은, 이 말을 주고 받는 양쪽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너도 알고 나도 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언급한 연보 프로젝트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프로젝트에 이미 마케도니아의 에클레시아들이 참여했음을, 바울은 전합니다.
왜냐하면 즉 많은 어려움의 입증 속에서
(A) 그들에게 속한 그 기쁨의 넘침과
(B) 깊음을 따라 (있는) 그들에게 속한 가난이
(C) 그들에게 속한 '꼬이지 않음'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넘쳤기 때문입니다.
'입증'이라는, 오늘 분문 이해에서 중요한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라고 번역되는 말이 있는데 '페이라조(πειραζω)', '도키마조(δοκιμαζω)'가 있습니다. 전자의 뜻은 '유혹(temptation)'이고, 후자는 '입증(test)'입니다. 예수께서 고발자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페이라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유혹이 아닙니다. 도키마조,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은 정말로 에클레시아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에 모두 "그들에게 속한"이란 말이 들어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그들의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삶아버린 것들이 이미 '과거'라는 의 완벽한 금고 안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해서 그들은 '입증'될 것입니다. 먼저는 기쁨의 넘침입니다. 둘은 깊은 가난입니다. 셋은 그럼에도 그들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기 위해 풍성한 연보를 냈다는 사실입니다.
(B)는 우리 삶에 없었으면 좋겠지만, '어려움'은 빠질 수 없는 입증의 조건 중 하나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쁘고,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맺습니다. 그럼 입증된 것입니다. 즉 '어려움', '기쁨', '이웃사랑' 이 에클레시아로서 입증되는 조건입니다.
즉 잠재력을 통해, 내가 증언합니다, 또 잠재력을 지나서,
그들은 많은 파라클레시스와 함께 더욱 기꺼운 이들이었고,
그들은 우리의 그 거저와 거룩한 이들을 향한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갈망하는 이들이었으며
바울은 그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런데 그 증언은 '잠재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은 잠재력과 두 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그들 자신들의 잠재력을 통해 일합니다. 그런데 그 일하는 와중에, 그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증언하는 그들의 모금은 그들의 잠재력을 뛰어넘는 정도로 풍성하게 이뤄졌습니다. 잠재력을 넘어서게 하는 분의 힘이, 그들의 잠재력을 넘어선 잠재력 속에서 느껴졌고, 바울은 이를 분명한 사실로 목격한 이로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잠재력을 넘어선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A. 그들은 많은 파라클레시스와 함께 더욱 기꺼운 이들이었습니다.
-즉 잠재력을 넘어서는 모금은 자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자발성은 본래도 있던 것이었지만, 그들은 더욱 자발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자발성은 파라클레시스에 대한 자발성입니다. 즉 타인과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 대한 자발성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더욱 새창조의 사람들로 자라고 있던 것입니다.
B. 그들은 1) '그 거저'와 2) '거룩한 이들을 향한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갈망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갈망은 미래에 대한 바람입니다. 잠재력을 넘어선 이들은 "그 거저" 즉, 연보 프로젝트가 잘 완수되길 갈망했습니다(바울에게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인이기 이전에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로이 창조된 "거룩한 이들"임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일에 바울과 더욱 '한몸처럼 협력(코이노니아)'할 것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란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통해 (그들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디도를 파라클레시스 하도록 말입니다,
이는 디도가 그처럼 시작했듯 그처럼 그가 여러분을 향해서 바로 그 거저를 끝으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바울일행의 기대를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연보 프로젝트를 통해서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은 주께 자신들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은 곧 바울일행에게 자신들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통해 이뤄지는 바울일행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뉘우치고, 하나님과 함께 이웃사랑을 실현하는 존재로 새로이 지어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갑니다.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은, '외부인' 바울과 '유대인' 예루살렘 공동체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디도에게 전해졌고, 디도는 같은 일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안에서 시작했습니다. 완전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디도를 통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안에서도 긍정적인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디도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 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거저", 즉 연보 프로젝트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도 마케도니아 에클레시아들처럼 참여하도록 파라클레시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작된 그 거저를 "끝"으로(즉 현시대의 끝장으로, 곧 연보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에클레시아의 하나됨으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넘치는 것 같습니다, 신실함으로 말씀으로 깨달음으로 모든 열심으로 그리고 여러분으로부터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는 바로 그 거저 안에서 여러분이 넘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와 바울 사이에서는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돈"이란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9:1~18을 보면,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사도들에게 주는 재정후원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에클레시아로서 저질러선 안되는 악행들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자랑하듯 먹고(이웃의 연약한 판단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채), 이교 제의에 참여하며, 비육체적 영성을 성령으로 오해하고(그래서 방언에만 집중하고), 아버지의 첩과 살림을 차린 사람을 용인했으며(이 문제는 다행히 해결되었지만),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 마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재정후원을 받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판단들을 모두 용인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가난의 어려움을 자원해서 감당합니다. 낮에는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텐트를 만드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기꺼이 이 일을 감당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정상화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몸이 닳아가는 고생은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들이 받는 재정후원을 거절하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해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은 바울의 재정후원을 위한 돈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를 돕는 이방인 에클레시아 연대의 모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해의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교만을 사용하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넘치고 잘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만일 당신들이 모든 면에서 넘친다면, 이 이웃사랑의 연보에 대해서도 넘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모든 넘침이, 바로 이웃사랑을 위한 넘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웃사랑을 위해 에클레시아가 넘치기 위해서, 여타의 넘침들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에클레시아들에게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에클레시아 간의 도움과 연대를 통해, 범세계적 화해 공동체를 온 세상에 보여주려고 했던 바울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8:1~7
그런데 우리는 여러분에게 다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마케도니아의 에클레시아들 안에서 바쳐진 그 하나님의 거저를, 왜냐하면 즉 많은 어려움의 입증 속에서 그들에게 속한 그 기쁨의 넘침과 깊음을 따라 (있는) 그들에게 속한 가난이 그들에게 속한 '꼬이지 않음'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넘쳤기 때문입니다. 즉 잠재력을 따라, 내가 증언합니다, 또 잠재력을 지나서, 그들은 많은 파라클레시스와 함께 더욱 기꺼운 이들이었고, 그들은 우리의 그 거저와 거룩한 이들을 향한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갈망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리고 우리가 바란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렸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통해 (그들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디도를 파라클레시스 하도록 말입니다, 이는 디도가 그처럼 시작했듯 그처럼 그가 여러분을 향해서 바로 그 거저를 끝으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넘치듯 말입니다, 신실함으로 말씀으로 깨달음으로 모든 열심으로 그리고 여러분으로부터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이는 바로 그 거저 안에서 여러분이 넘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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