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계속 말해야만 하는 숙명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 그것이 고통이나 의무가 아니라, 거저 얻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 말하는 사람. 무의미의 견고한 바위에 던져지는 의미의 계란, 부서지기 쉬운 계란껍질처럼 그의 몸과 맘은 계속 닳아가는데, 사멸하가는 몸을 일으켜가며 이 사람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자꾸만 그에게 묻고 싶다. '무의미하지 않는가?', 그래서 당신이 목숨을 걸고 이룬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무의미하지 않는가?' 당신이 일군 교회가 한국교회가 되었고, 그 한국교회가 널려있는 대한민국이 오늘도 이 모양이라고,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타인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는 건 사실 우리가 완전히 망가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변명하고 절망하는데 그 습관 자체가 우리가 되어버렸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바울, 당신은 대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일단 내가 듣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일단 눈물 좀 닦고.

고린도후서 10:1~11

  1) 그런데 바로 나 바울이 메시아 예수의 겸손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여러분을 파라클레오합니다,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여러분 안에서 낮추지만, 떨어져 있으면 여러분을 향해 대담합니다. 2) 그런데 나는 요구합니다, 같이 있을 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담해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 확신은 우리가 살몸을 따라 걷고 있다고 산정하는 어떤 이들을 향해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산정한 확신입니다. 3) 왜냐하면 우리는 살몸 안에서 걷지만 살몸을 따라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한 편지들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몸을 함부로 굴린 이에게 정당한 판결내리고 공동체 밖으로 내쫓은 것, 뉘우치는 그를 다시 받아준 것, 디도가 전해준 그들 중에 바울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는 이들이 있다는 소식. 그런데 이 정도면 할만큼 했는데, 이 정도면 스스로 잘 해나갈만도 한데,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끝내 바울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 파렴치한 배신자들에게 바울은 다시금 파라클레오하고. 바울은 그 파라클레오가 메시아 예수의 겸손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라고 말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바울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굽신거리면서, 떨어져 있을 때면 할 말 다한다고. 이 따위 처세술을 쓰는 바울이야 말로 참으로 한낯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바울은 이 말을 그대로 받는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그런데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할 말 다하지 않게 좀 해줄래?' 내가 '한낯 인간적인 사람'이라 말한 것이, 바울을 반대하는 이들이 말한 "살몸 안에 있는 사람"이다. 몸뚱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몸뚱이를 떠나는 것이 성령적이라 여기던 그들다운 비판이다. 허름하고 닳도록 닳은 몸뚱이로 사는 바울은 그야말로 살몸 안에 있는 사람, 한낯 인간적인 사람, 그들만도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인정한고, 저 비판을 뒤틀어서 되돌려준다. "내가 '살몸 안에 있는 사람'인 건 맞지만, '살몸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다." 살몸 밖에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살몸 안에 있어야 사람이다. 다만 모두가 살몸 안에 있지만, 살몸을 따르는 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가 있을 뿐이다. 바울은 '안에 있음'과 '따름'의 차이를 미세하게 구분해나간다. 말장난인가? 그저 삶은 삶대로 자기 뜻대로 살면 그만인 것인데, 바울이 괜한 사변을 끌어들이는 것인가? 바울은 그들의 말을 교정해주며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인가?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통해 '살몸'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곧 인간에 대한 이해임을 확인했다. 살몸의 개념이 왜곡되었을 때, 그 삶도 함께 왜곡되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 히브리서의 문맥을 떠나면, 어디에나 적용되어도 상관없는 말이다. 개념에 대한 이해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이해는 삶의 실상으로 드러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당장 보이지 않아도, 곧 알게 되는 것은 그 추구의 증거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있다. 삶의 왜곡이 곧 살몸을 따름이고, 살몸을 따르는 것에 걸리적거리지 못하도록 개념들은 생각 속애서 소리없이 다시 배치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살몸'에 관하여 그리 가르치지 않았을테니. 에토스로 굳어진 거짓된 개념은 자기 정당성으로 변모하고, 그 자기 정당성을 정점으로 둔 경화(硬化)는 그토록 깨지고 풀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4) 즉 우리의 이 전투의 무기들은 살몸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요새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께로의 잠재력들이고, 5) 우리는 산정들과 모든 찬양받는 높은 것을 하나님의 깨달음을 따라 무너뜨리며, 모든 사유를 메시아의 헤아림 쪽으로 사로잡으며, 6) 그리고 의로 판결할 준비 안에서 우리는 모든 흘려들음(불순종)을 차지합니다, 여러분의 헤아림이 흘러넘치는 한 말입니다.


  살몸 안에 있다. 그러나 살몸을 따르진 않는다.

  우리의 모든 투쟁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우리는 살몸 안에 있다. 우리 몸은 생존을 추구하지만, 생존을 추구하지 않기. 범위를 더 넓혀보자. 우리는 생존을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는 도시 안에서 산다. 이 도시 안에서 도시를 따르지 않는 삶이란 투쟁의 연속이다. 도시 안에서의 '사랑'은 언젠가부터 '아무런 고통없이 내 사람 챙기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말 아닌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 아닌가? 생존의 거리에서 생존을 추구하지 않기. 곧 죽기다. 모두를 위해서 죽기. 그렇게 살기. 불로 모든 것을 태워도 살아남는 형상을 품고서.

  바울이 '요새'라 말하는 것은, 살몸 안에서 살기 때문에, 살몸을 따라 살아도 된다는 일관성이다. 이 굳어버린 일관성을 박살내는 예외가 하나님의 잠재력이고,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을 따르는 잠재력로 살몸 안에서 살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다. 우리의 모든 투쟁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전장이 있다면, 그것은 내 몸이고, 형제의 몸이다. 살몸과 숨결의 두 방향이 몸을 접점으로 교차하고 있기에, 삶이란 능지처참 중이다. 사지를 끌어당기는 막강한 힘 속에서, 사지를 온전하게 모으기다. 두 손을 모으고, 다리는 무릎을 꿇어 인간다움으로 버팀이다. 버티다가 그 모습 그대로 죽으면 된다.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날테니.

요한계시록 11:7~11, 개인번역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증언을 이룰 때, 구덩이로부터 올라온 짐승은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짐승은 그들을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큰 도시 거리에 그들의 시체(떨어짐)는(숨결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거기에서 그들의 주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그들은 씨알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의 시체를 사흘 반나절동안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시체들을 무덤에 놓도록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들에 대해 기뻐하며 좋게 표현하고, 그리고 선물들을 서로 보낸다, 왜냐하면 바로 그 두 예언자들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반나절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산 숨결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그들의 두 발로 섰고, 그리고 큰 공포가 그들을 보는 이들에게 떨어졌습니다.


  '살몸 안에 있음'과 '살몸을 따름'을 들러붙게 만든 그 견고한 일관성을 깨뜨리자. 바울이 '산정들'이라 말하는 것은 그 일관성을 증명하는듯 보이는 계산들을 가리킨다. "모든 찬양받는 높은 것"은 살몸 안에서 살몸을 따르면 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우상은 다른 게 아니야. 불을 지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형상들은 거짓이다. 바울은 모든 사유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불 속에서도 남은 무언가를 본다. 자신이 다메섹에서 보았던 불붙은 채 돌아가던 바퀴는 모든 거짓된 형상을 살라버리는 소멸하는 불이다. 그 소멸하는 불 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형상이 곧 메시아다. 그 메시아를 헤아리며 불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그 유약한 것들을 사로잡아 메시아 앞에 꿇려놓는다.

그들이 짜놓은 세상(살몸 안에 있음=살몸을 따름), 우리가 뒤집는다.


  메시아의 소식을 흘려들었기에 사람(살몸)이 무엇인지 모르는 온갖 오해를 판결한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오해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면, 그가 메시아를 헤아릴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줄 수 있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유를 불길 한가운데로 집중시킨다. 살몸 안에서 살몸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회의만이, 생각바뀜(μετανοια)에 이르는 참 회의다.


  7) 얼굴을 따라 있는 것들을 여러분이 보고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메시아께 속한 사람으로 설득되었다면`,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다시 산정하십시오, 자신이 메시아께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렇다는 것을. 8) 왜냐하면 만일 내가 우리의 그 엑수시아에 관하여 좀 넘치게 자랑할 것이라면(그것은 주께서 집짓기를 위해 주신 것이지, 여러분의 멸망을 위해 주신게 아닙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9) 이는 내가 그 편지들을 통해 여러분을 두렵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함입니다. 10) 그들이 말합니다, '이 편지들은 한편으로는 무겁고 힘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의 파루시아는 약하고 그 말씀은 별시덥지않다.' 11) 이러한 자는 다음과 같이 산정하십시오, 떠나있을 때 편지들을 통해 했던 말과 함께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그러한 우리는 '일'로도 곁에 있는 것이라고.


  '살몸 안에 있음'과 '살몸을 따름'이 마치 회반죽으로 붙어버린 벽돌처럼 견고한 요새를 이루고 있는데, 이제 고개를 들어 당신의 공동체를 바라보라. 고개를 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은, 자신 뿐만 아니라 바울일행도 메시아게 속했음을 계산(산정)에 집어넣어야 한다. 만일 에클레시아이면서도, '살몸 안에서 살몸을 따르지 않음'을 말하는 바울일행을 사유에서 배제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바울일행이 자신들을 멸망시킨다고 오해하고 있었다면, 생각을 고쳐야 한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바울을 생각에서 밀어내도록 사람들을 홀려놓는 어떤 이들을 점점 포위해나가고 있다. 바울이 제기하는 그들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먼저 바울이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2) 그리고 거짓된 살몸 개념을 퍼뜨렸다. 또 그들의 혐의는 3) 바울이 자신의 엑수시아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랑한다고 비난한 사실이다.

  바울은 자신의 엑수시아(權)에 대해서 넘치게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그 권한은 오히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든든하게 집지어 가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중 몇몇은 바울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자신들을 멸망시킬 것이라 오해하고 있다. 살몸 안에서 살몸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말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필시 바울의 말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구성해왔던 일관성에 균열을 내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살몸 안에서 살몸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영광된 몸을 얻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 메시아께서도 걸으셨던 과정, 사랑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네번째 혐의에 대해 바울의 언급한다.

이는 내가 그 편지들을 통해 여러분을 두렵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함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이 편지들은 한편으로는 무겁고 힘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의 파루시아는 약하고 그 말씀은 별시덥지않다.'


  그들은 바울이 보낸 편지들은 삶에 무게를 지우게 했다. 심지어 그 편지 안에는 "영광의 무게(4:17)"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이는 부활의 몸에 걸맞는 생활을 하자는 말이었다. 살몸 안에서 살몸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몸이 초라하다는 것을 핑계로, 그 편지 내용의 무게를 덜어내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초라함이 참 형상을 드러내는 불길에 상한 것임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의 겉모습이 남루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빛이 있음을 인정해줘야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바울을 인정하지 말아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의 논거를 다시 모아서 생각해보자.

1) 바울은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 편지는 대담하나, 사람에겐 굽신거림
2) 바울은 (살몸 밖을 추구하는 자신들과 달리) 살몸 안에서 살고 있다.
3)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엑수시아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랑하고 있다(초라한 주제에).
4) 바울은 편지와 달리 실제 말하는 내용이 시덥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들 나름의 일관성을 가진듯 보이지만, 사실 찢겨진 조각들을 억지로 모아 붙여놓은 괴물의 그림이다. '편지가 대담하면 사람도 대담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살몸 밖을 추구하면서도 허름한 살몸 때문에 바울을 인정하지 못한다. 바울의 권한 행사가 자신들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결국 대담하다고 인정했던 그 편지의 말 마저도, 바울의 허름함으로 덮어버리고 수용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것이 일관성인가? 일관성이지.

  살몸 안에 있음-살몸을 따름-살몸이 어려움에 빠져서는 안됨.

  바울을 배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바울의 존재에 의해 부정되는 일관성이지. 바울은 오늘도 그 거짓말로 쌓아놓은 요새에 균열을 낸다. 나에게 균열을 낸다.


고린도후서 10:1~11

  1) 그런데 바로 나 바울이 메시아 예수의 겸손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여러분을 파라클레오합니다,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여러분 안에서 낮추지만, 떨어져 있으면 여러분을 향해 대담합니다. 2) 그런데 나는 요구합니다, 같이 있을 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담해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 확신은 우리가 살몸을 따라 걷고 있다고 산정하는 어떤 이들을 향해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산정한 확신입니다. 3) 왜냐하면 우리는 살몸 안에서 걷지만 살몸을 따라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4) 즉 우리의 이 전투의 무기들은 살몸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요새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께로의 잠재력들이고, 5) 우리는 산정들과 모든 찬양받는 높은 것을 하나님의 깨달음을 따라 무너뜨리며, 모든 사유를 메시아의 헤아림 쪽으로 사로잡으며, 6) 그리고 의로 판결할 준비 안에서 우리는 모든 흘려들음(불순종)을 차지합니다, 여러분의 헤아림이 흘러넘치는 한 말입니다.

  7) 얼굴을 따라 있는 것들을 여러분이 보고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메시아께 속한 사람으로 설득되었다면,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다시 산정하십시오, 자신이 메시아께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렇다는 것을. 8) 왜냐하면 만일 내가 우리의 그 엑수시아에 관하여 좀 넘치게 자랑할 것이라면(그것은 주께서 집짓기를 위해 주신 것이지, 여러분의 멸망을 위해 주신게 아닙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9) 이는 내가 그 편지들을 통해 여러분을 두렵게 만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함입니다. 10) 그들이 말합니다, '이 편지들은 한편으로는 무겁고 힘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의 파루시아는 약하고 그 말씀은 별시덥지않다.' 11) 이러한 자는 다음과 같이 산정하십시오, 떠나있을 때 편지들을 통해 했던 말과 함께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그러한 우리는 '일'로도 곁에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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