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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8~15

  나는 명령을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열심을 통해 여러분의 그 사랑도 '자녀다움'을 입증하는 중입니다. 즉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그 거저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이는 여러분 때문에 넘치던 이가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바로 그이의 거지됨으로 넘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입증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껏 바울이 다른이들(바울일행)의 열심을 언급했던 것은, 바울일행이 가진 사랑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사랑과 같은 것임을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코린토스에서 시작된 사랑도 '자녀답'습니다. 새창조가 아니면 생길 수 없었던, 같은 내용을 고백하는, 어려움 속에 피어난 생명입니다.
  제가 '자녀다움'이라고 번역한 말은 '그네시오스(γνήσιος)'입니다. '법적으로 인정받는'이란 뜻으로, 서자가 아닌 정식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붙는 형용사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나의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디도서 1:4
나는, 같은 믿음을 따라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새번역의 경우 "참", "진실한"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번역은 "true", "genuine"을 씁니다. "정식 아들", "진짜 아들"이란 뜻이지요. 즉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도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창조 된 사람들, 하나님의 진짜 자녀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가능성 속에서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그 거저를 말입니다. 참 자녀된 에클레시아가 더욱 메시아 예수의 삶의 방식을 '알아가는 중' 입니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이는 여러분 때문에 넘치던 이가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바로 그이의 거지됨으로 넘치기 위함입니다.


  넘치던 이, 예수가 거지가 되셨던 사건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이유는 "여러분"이었습니다. '그의 거지됨'은 "여러분 때문"이었고, 그이가 자발적으로 거지가 되신 것은, 그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거지됨을 선택하고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계보에 속한 참 아들은 그렇게 삽니다. '거지가 되다'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거지가 되었으니, 그이가 거지가 되신 이유와 목적은 "여러분"에 있습니다. 즉 이것은 '누군가를 위해서 거지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메시아는 그렇게 하셨고, 자녀들에게 이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앞에는 연보 프로젝트가 놓여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거지가 되어줄 때입니다. 타인을 위해서 스스로 비천해지기를 선택할 때입니다.

  저는 '거지됨으로 넘치다'라는 표현에 전율을 느낍니다. 거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지가 아닙니다. 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아들은 거지가 아닙니다. 그는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넘치는 사람이기에 거지가 '될' 수 있고, 거지가 아니었던 이가 거지가 되려고 한다면, 분명 그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넘치게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거지가 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은 곧 성육신이고, 그 성육신으로 넘치는 삶이 곧 부활로 드러난 메시아 예수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스러운 사람'인 부활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도 아니고 사람만도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 성육신을 닮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치게 하심은,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도 넘치게 하시기 위함이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넉넉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길만이 모두의 넉넉함을 이룹니다. 제가 지금 보이지 않는 차원의 얘기, 혹은 종교적 담론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돈 문제요, 이웃을 위한 문제, 이웃이 되기 위한 문제입니다. 참 아들인 에클레시아의 문제입니다. 참 아들인 우리가 거지가 되려고 합니다. 매순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거지됨으로 넘치는" 부자와 거지 사이의 비식별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거지입니까? 부자입니까? 거지이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지만도 아니고 부자만도 아닙니다.
  그제서야 우리에게 부자와 거지의 기준과 이름은 별 것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넉넉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뿐일 것이고, 그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는 이웃을 사랑하는 새 사람이 이 땅에 나타난 순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이것에 관해 깨달음을 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그 행하기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작년부터 그 뜻한 것을 여러분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행하기를 끝으로 가져오십시오,


  바로 그 뜻한 것의 열망처럼
  그 가진 것으로부터 끝으로 가져오기


  바울은 거지가 되신 하나님, 메시아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삶을 깨닫고 사는 것이 참 자녀된 에클레시아입니다. 바울은 혹시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봐,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명시합니다. 바로 '연보 프로젝트' 때문입니다. 연보 프로젝트는 참 아들이 메시아 예수의 성육신을 닮아가는 과정이자,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 '혈통이 다른 형제(형제 아닌 형제!)'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분명 '거지됨'을 말했는데, 다음 문장에서는 '이득'이 나왔습니다. 이 이득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에서 확인해봅시다.

  그런데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모금을 작년부터 시작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이 중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다시금 그것을 시작해서 완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인피니티브를 사용한 문장을 쓰면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키워드는 #뜻한 것 #열심 #가진 것 #끝으로 가져오기.

  왜냐하면 만일 그 열망이 앞에 놓인다면, 가진 것에 따라서는 그이는 잘 받으시지만, 갖지 않은 것에 따라서는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편함은 다른이들에게 있고 여러분에게는 어려움이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공평으로부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뜻한 것을 열망으로 실천하다가 그것이 무디어지고 중단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 시험 공부에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는 결과를 기대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다가 결과를 얻기 전에 그 열망이 사그러드는 때는, 끝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열망을 가졌다가 예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될 부정적인 상황을 염두하게 되고, 자신의 열망이 가치없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그 열망을 철회하게 됩니다. 즉 미래 결과에 대한 판단이 현실의 열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미래에 대한 판단이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참으로 종말론적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판결의 결과를 미리사는 자격을 가리키는 표현이 '의(義)'입니다. 이 '의'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처음에 모금 활동에 힘을 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모아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려워질만큼 내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가졌던 열망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되었습니다. 열심은 식다가 꺼져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A. 먼저는 '어디까지 내야 하느냐?'에 대한 기준 설정입니다(인간의 현실인식).
  B. 다른 하나는 미래로부터 가져오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하나님의 미래판결).

  하나님은 '가진 것'을 받으십니다. '갖지 않은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가진 것에서 내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의 편애'로 오해해선 안됩니다. 즉 하나님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는 편하게 하시기 위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어렵게 하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최종 판결은 '공평'이기 떄문입니다.

  '올(義)의 실천은 '냉철한 현실인식'만으로도 안되고, '미래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만으로도 안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냉철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판결하시는 '공평'에 대한 기대함도 필요합니다. 현실의 씨실과 미래의 날실이 함께 짜여서 실천의 옷을 만듭니다. 종말론적이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실천의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없이 할 수 있는 실천은 뜻없습니다. 현실과 잇대지 않은 미래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을 기대하기 때문에, 내가 넉넉하게 가진 것을 내놓습니다. 남보다 많이 내놓겠다는 공명심이나, 최대한 짜게 내보겠다는 인색함은 모두 하나님의 미래 판결인 공평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미래 판결에서부터 현실은 균형 잡히고, 균형잡힌 현실은 다시 하나님 판결의 미래를 지향합니다.


지금 이 카이로스에 여러분의 그 넘침이 그들의 모자람을 향하여 (있습니다), 이는그들의 그 넘침도 여러분의 모자람을 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공평이 됩니다.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많은 이가 넘치지 않았고
  적은 이가 모자르지 않았다.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는 지금 궁핍합니다. 그리고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부유합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그들의 넘침의 방향을 그들의 궁핍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 '향함'은 현시대(크로노스)에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이 개입된 오는시대(카이로스)의 시각만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16:18을 인용합니다.

출애굽기 16:17~19, 새번역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하니,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16장은 만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어떻게 읽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많이 거두는 사람"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포함한 이방인 에클레시아를 대입할 것입니다. "적게 거두는 사람"이 예루살렘 에클레시아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생각하는 공평은,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 출애굽이 인용을 통해서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방인 에클레시아와 유대인 에클레시아를 한 공동체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클레시아는 그 혈통, 출신국가에 상관없이 모두 가능성의 광야를 여행하는 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끌어내셨고, 그들 안에서 공평을 이뤄가십니다. 한 분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 모두에게 드리워 있습니다.

  만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에클레시아를 위한 공평에 참여하지 않고, 욕심을 부려 남겨 둔다면, 그들은 아침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침이 되면, 감춰두었던 욕심의 결과물들은 모두 악취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아침'을 무엇으로 읽었을지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8:8~15

  나는 명령을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의 열심을 통해 여러분의 그 사랑도 자녀다움을 입증하는 중 입니다. 즉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메시아 예수의 그 거저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때문에 넘치던 이가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바로 그이의 거지됨으로 넘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이것에 관해 깨달음을 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그 행하기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작년부터 그 뜻한 것을 여러분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행하기를 끝으로 가져오십시오,

  바로 그 뜻한 것의 열정처럼
  그 가진 것으로부터 끝으로 가져오기

  왜냐하면 만일 그 열정이 앞에 놓인다면, 가진 것에 따라서는 그이는 잘 받으시지만, 갖지 않은 것에 따라서는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편함은 다른이들에게 있고 여러분에게는 어려움이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공평으로부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카이로스에 여러분의 그 넘침이 그들의 모자람을 향하여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그 넘침도 여러분의 모자람을 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공평이 됩니다.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많은 이가 넘치지 않았고
  적은 이가 모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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