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7:2~10
여러분들은 우리를 차지하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불의하게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멸망시키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이득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판결선고를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우리의 가온들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 함께 죽기와 함께 살기로 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많은 파레시아가 여러분을 향해 있고, 나에게 많은 자부심이 여러분들을 위해 (있습니다). 나는 이미 파라클레시스로 가득해왔고, 우리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기쁨으로 지금은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바울일행과 같은 성령, 같은 정체성,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일행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무 손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메시아 예수의 '죽기살기'로 창조된 가능성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일전에 그 '죽기살기'에 대해서 바울에게 동의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다시 온전한 에클레시아로 사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죄'는 타인의 가능성을 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죄는 메시아 예수의 몸에 고정되어, 그이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정죄야말로 가능성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열린 가능성 속에서, 바울은 '파레시아'합니다. 가능성이 열려있지 않다면 할 수 없는 대담한 말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자부심'으로 함께 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생담을 말했던 바울은, 그 고생 속에서도 파라클레시스와 기쁨으로 흘러넘치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점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도 마찬가지라고, 그들도 바울과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는 것을 넘어)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천국가는 보증수표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시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가능성을 보게 하는 새인격으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즉 우리가 마케도니아 안으로 갔을 때 우리의 살몸은 그 어떤 안정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어 우리 밖으로는 싸움들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짓눌린 이들을 파라클레오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파루시아로 우리를 파라클레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파루시아로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파라클레오되었다는 파라클레시스로, 그는 우리에게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슬픔과, 나를 위한 여러분의 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
바울은 2:12~17에서 언급했던 '디도'에 관한 이야기를 7장에 와서 이어갑니다.
고린도후서 2:12,13
그런데 나는
트로아스를 향해, 메시아의 복음을 향해 갔고, 그리고 문이 나에게 주 안에서 열렸는데, 나는 나의 가족 디도를 발견하지 못한 나의
숨결로 (인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떨어져 마케도니아를 향해 나갔습니다
트로아스에서 만나기로 했던 디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트로아스에서 마케도니아로 장소를 옮겨 왕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역시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울일행은 인간적으로("살몸"), 안정이 되기는 커녕 어려움에 처해있었습니다. 밖으로는 바울일행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신체 상해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하나님은 바울일행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디도가 돌아온 것입니다! 트로아스에 늦게 도착한 디도는 아마도 물어물어 바울일행의 흔적을 따라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사람들의 논란거리가 된 동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디도의 옴'을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봅시다. '파루시아'는 신약성경에서 줄곧 '재림'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곁에 오다'입니다. 그리고 '곁에 오다'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조차 파루시아는 한결같이 재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4:3에 대한 다양한 번역을 확인해봅시다.
마태복음 24:3, 새번역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복음 24:3, 쉬운성경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말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4:3, 개역개정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태복음 24:3, 공동번역
그리고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로 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24:3에 대해서 새번역과 쉬운성경은 원문에 없는 '다시'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재림의 의미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입니다.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은 그저 "임하심", "오실 때"로 번역했습니다. 마태복음 24:3은 재림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포로기 때 떠나셨다고 생각했던 야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악한 압제자의 파멸과 포로생활의 종결과 약속의 땅으로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곧 새로운 출애굽, 구원이 벌어집니다.
이렇듯 '디도의 파루시아'라는 말은 '파루시아'라는 어휘를 무조건 재림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근거입니다. 디도는 바울일행에게 "돌아와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괴로운 상황에 처한 바울일행에게, 디도가 전해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대한 소식은, 마른 사막에서 갈증을 풀어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파라클레시스로 살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은, 바울에게도 파라클레시스가 됩니다. 심지어 디도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바울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또 바울의 편지(고린도전서)를 보며 슬퍼했고, 바울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슬프게 만들었던 자신의 편지에 대해서 조금 더 길게 말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지금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후회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바로 그 편지입니다, 만일 내가 잠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나는 기쁩니다, 여러분을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생각바꿈으로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을 따라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있는 슬픔은 후회없는 구원으로 향하는 생각바꿈을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의 슬픔은 죽음을 만들어냅니다.
바울은 그 편지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슬프게 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좋아할 만한 내용만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꼭 해야 할 말을 했습니다. 이 해야 할 말을 위해서 바울은 많은 고심 속에서 코린토스에 편지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디도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바울의 편지로 슬퍼하고 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무언가 잃어버린 상실의 슬픔도 아니고, 바울과 이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이별의 슬픔도 아닙니다. 바울은 슬픔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코스모스(현시대)에 속한 슬픔이요, 다른 하나는 '생각바꿈'으로 가는 슬픔입니다.
'생각바꿈'은 "회개"로 번역됩니다. 희랍어로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인데, '메타'는 바꾼다는 말이고, '노이아'는 생각입니다. 즉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슬픔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인정이요, 이제 바울이 파라클레시스 한 내용에 따라 자신들의 생각을 고쳐먹겠다는 다부진 결의입니다. 이 슬픔은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 슬픔입니다. 바울이 내민 용서를 완성하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 때문에 바울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다시금 연결되었고, "양 쪽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에 속한 슬픔"은 슬퍼하다 낙담하는 슬픔이고, 결국 관계를 끊어내는 슬픔입니다. 사람을 죽게 하는 슬픔입니다. 슬픔 자체가 부정적으로 치부되어선 안됩니다. 오히려 제대로 슬퍼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슬픔은 생각바꿈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 생각바꿈은 다시금 자신을 자신답게,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보십시오, 바로 이 하나님을 따라 (했던) 슬퍼하기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열심을 만들어냈는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변명(변증)를, 오히려 분함을, 오히려 두려움을, 오히려 갈망을, 오히려 열심을, 오히려 의로운 처벌을 (만들어냈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 때문에 에클레시아는 에클레시아답게 되었습니다. 이 슬픔 이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명, 분함, 두려움, 갈망, 열심, 처벌'이 이어집니다. 이 단어들은 슬픔과 마찬가지로 그저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개념들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제자리를 찾자, 이 개념들도 제기능을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에게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적절한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변명'은 "변호"라 번역할 수도 있고, "변증"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잘못된 생각에 맞선 올바른 대답입니다. 분열로 신음하고 있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안에서, 바울의 편지에 동의한 이들은 정당한 변명의 내용들을 얻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당한 일에 화내지 못하다가, 생각을 바꾸자 정당한 화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슬픔과 마찬가지로 '화' 자체가 부정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무엇에 화내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잘못해왔던 일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경계할 수 있었고, 수정된 목표는 건강한 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면, 목적지로 가려는 갈망과 열심은 꼭 필요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방향이 비뚤어지면, 갈망과 열심은 오히려 목적지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바울의 편지에 건강한 슬픔으로 반응했던 이들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의로운 처벌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의로운 처벌"은 이미 해결된 고린도전서 5장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분은 스스로를 이 문제 앞에서 결백한 이들로 세웠습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썼다면, 그 불의한 이 때문도 아니고, 불의한 일을 당한 이들 때문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향해 있는 우리를 대신하는(위한), 여러분의 그 열심을 드러내는 것 때문입니다.
"문제 앞에서의 결백"은 문제를 문제로서 직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가능해집니다. 아버지의 첩과 살림을 차린 문제가 벌어졌을 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처음에는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문제를 문제로 직시하게 만들었고, 문제를 일으킨 이에게는 처벌을 내렸습니다. 그 처벌은 문제를 문제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처벌 속에서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했고, 에클레시아는 다시금 파라클레시스 안에서 하나 되었습니다. 파라클레시스가 이뤄질 때는, 문제 앞에서 모두가 결백해지는 순간입니다. 가해자("그 불의한 이")도 피해자("불의한 일을 당한 이들")도 문제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기생하지 못하게 된 문제는, 이제 생명력을 잃고 공동체 안에서 소멸됩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지적한 바울의 편지는, 어느 한 쪽의 편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바울은 밝힙니다. 어느 한 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열심은 바로 이 '우리'를 위한 열심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파라클레시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파라클레시스에 더욱 넘치도록,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는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러분 모두로부터 그의 숨결이 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내가 그에 대해 좀 자랑했던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참 안에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디도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은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장들이 여러분을 향해 더욱 넘치도록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그 모든 헤아림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떨림과 함께 그를 맞아주었던 것처럼. 나는 여러분 안에서 모든 것을 대담함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바로 이것을 위한 파라클레시스의 일환이었습니다. 바울은 편지만 보내놓고 이 일에 방관자처럼 지켜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편지를 쓰고 보내고, 또 기도하고 갈망하는 중에 바울의 생각과 실천 속에는 '우리'가 있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죽고살기를 통해 새로이 태어난 에클레시아가 있었습니다.
다시금 에클레시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디도로부터 들은 바울일행은 무척 기뻤습니다. 새창조의 가능성 속에서, 에클레시아는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는 퍼즐조각들임을 알게 됩니다. 영광도 수치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한 과정으로서 있습니다.
정당한 처벌과 죄의 인정, 그리고 가해자를 다시 공동체에 귀속시키는 과정 속에서, 이제 가해자'였던' 사람 마저도 숨결이 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아마도 디도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약속장소에 늦게 당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전에 디도에 대해서 자랑했던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8
그들은 내 숨과 여러분의 숨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철저히 알아주십시오.
디도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생각바꿈으로 인해 참으로 드러났습니다. 디도 덕분에 바울일행의 숨이 편안해졌지요. 이런 사람은 철저히 알아줘야 한다고 바울 자신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얼마나 아끼고 인정해주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내장들이 나옵니다. 6장에서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에게 "내장들"을 넓혀서 에클레시아다운 에클레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디도의 소식은 분명 기쁜 것이었지만, 아직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살림 차린 남자의 문제는, 정말 에클레시아답게 해결되었지만, 아직 산적한 문제들이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디도의 내장들을 언급합니다. 디도의 내장들은 여전히 그들(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넘치도록 있습니다.
디도가 갖고 있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 대한 희망은, 바울일행이 가진 기억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디도가 보여주는 파라클레시스는, 바울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사실들"을 뛰어넘게 만듭니다.
바울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관계는 어려운 산을 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역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담하게 파레시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문제를 문제로서 직면하게 방식으로, 성령으로 이뤄지는 새창조의 가능성 속에서, 나머지 문제들도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7:2~16
여러분들은 우리를 차지하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불의하게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멸망시키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이득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판결선고를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우리의 가온들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 함께 죽기와 함께 살기로 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많은 파레시아가 여러분을 향해 있고, 나에게 많은 자부심이 여러분들을 위해 (있습니다). 나는 이미 파라클레시스로 가득해왔고, 우리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기쁨으로 지금은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즉 우리가 마케도니아 안으로 갔을 때 우리의 살몸은 그 어떤 안정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어 우리 밖으로는 싸움들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짓눌린 이들을 파라클레오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파루시아로 우리를 파라클레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파루시아로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파라클레오되었다는 파라클레시스로, 그는 우리에게 여러분의 그리움과 여러분의 슬픔과, 나를 위한 여러분의 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
만일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지금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후회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바로 그 편지입니다, 만일 내가 잠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나는 기쁩니다, 여러분을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생각바꿈으로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을 따라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있는 슬픔은 후회없는 구원으로 향하는 생각바꿈을 일(창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현시대)의 슬픔은 죽음을 만들어냅니다.
즉 보십시오, 바로 이 하나님을 따라 (했던) 슬퍼하기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열심을 만들어냈는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변호(변증)를, 오히려 분함을, 오히려 두려움을, 오히려 갈망을, 오히려 열심을, 오히려 의로운 처벌을 (만들어냈습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분은 스스로를 이 문제 앞에서 결백한 이들로 세웠습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썼다면, 그 불의한 이 때문도 아니고, 불의한 일을 당한 이들 때문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향해 있는 우리를 대신하는(위한), 여러분의 그 열심을 드러내는 것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파라클레시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파라클레시스에 더욱 넘치도록,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는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러분 모두로부터 그의 숨결이 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내가 그에 대해 좀 자랑했던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참 안에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디도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은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장들이 여러분을 향해 더욱 넘치도록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그 모든 헤아림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떨림과 함께 그를 맞아주었던 것처럼. 나는 여러분 안에서 모든 것을 대담함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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