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6:14~7:1
여러분은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쟁기를 끄는(ἑτεροζυγοῦντες)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때 두 마리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걷지 않으면 쟁기질을 할래야 할 수 없겠지요. 상상하고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소와 사람은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만,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일(εργον)'입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이 '일'을 잠재력(δυναμις)와 연관지어 생각했습니다. 감춰있던 잠재력이 드러나면 일입니다. 바울은 메시아 예수로부터 시작된 이 잠재력과 새창조의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말함은 현시대 속에서 대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현시대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이질적인 것(πνευματικος)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시대가 보기에 이질적인 일을 해나가야 할 바로 그 에클레시아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쟁기를, 숨님의 잠재력이 없는 이와 함께 매고서, 어찌 같은 일을 해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야 말로 에클레시아에게 이질적(`ετερο-)입니다!
세상이 스스로를 세상으로서 자각하게 하는 실천적 사랑의 경계가 세상과 에클레시아의 경계입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사람이라면 걸릴 것이 하나 없는 벽이지만, 제 몸을 제 것이라 고집하는 이에게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입니다. 이 벽을 지켜나가야 에클레시아는 에클레시아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가 받아 누려야 할 "정당한 몫"인데,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스스로 이 경계를 허무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이해한 '성령'을 핑계로 말입니다. 이전 편지인 고린도전서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줄곧 언급됩니다.(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jaeduggi.tistory.com/842)
즉 현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동맹"에 낄 수 없습니다.
즉 의와 무법(ἀνομία)이 (함께 하는 것이) 대체 무슨 교제입니까?
어둠을 지향하는 빛으로 대체 무슨 코이노니아입니까?
그런데 벨리알을 향해서 대체 무슨 메시아의 화음이 있습니까,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하는 신실한 이에게 대체 무슨 몫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림자 숭배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함께 놓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바울의 편지(고린도전서)에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일부는 완고한 태도를 고집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섯 개의 의문문을 연달아 던지며, 동일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노미 현상'이란 말로 친숙한 '아노미'는 "법(νομος)이 없는" 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에클레시아를 거절한 이들의 삶을 '무법의 상태'라 말합니다. 이는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법의 한계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에 의해 정죄된 이들의 인간성은, 1) 법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2) 이것은 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온전한 인간성 이룰 수 있는 방식이 아니며, 3) 이들이 법을 통해 알게 되는 유일한 것은,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자신의 타락한 인간성뿐입니다. 따라서 법에 갇힌 이들이야 말로, 법 아래서 무법을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그 무법은 때론 '자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됩니다. 1789년, 앙시엥 레짐의 법체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역사에 나타났지만, 프랑스 국민은 다시 독재자 나폴레옹을 법으로 인정하고, 다시 법아래 자신들을 스스로 가두었습니다. 이 법 아래 자기감금은 모든 민족 공통입니다. 법 아래서 추구하는 무법과, 무법을 속박하는 법의 굴레 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법-무법의 순환을 깨뜨릴 '법이룸'만이 자유, 평등, 박애를 인간 삶에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법이룸'을 시작한 이들과, 여전히 법에 종속된채 무법을 갈망하는 이들은 가는 길과 이룰 일이 다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이들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둘이 법이룸을 이루는 그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노미아'는 '법이 없는'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이름 없는"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무법자들에게는 인간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에클레시아와 무법자들을 하나로 묶는 이름으로는, 새창조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둠과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어둠이 있는 자리에는 빛이 부재하고, 빛이 있는 자리에서 어둠은 빛과 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리를 소리없이 잃을 뿐입니다. '코이노니아'는 '한몸됨'입니다. 한몸은 '거저' 물질교환이 이뤄지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거저 물질교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물질교환은 댓가로 이뤄집니다. 그들은 거저를 이용할 뿐, 거저의 세계를 꿈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상력과 신체의 순환이 프뉴마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어둠 역시 자신들의 순환체계가 있습니다만, 그들의 순환은 의도적으로 성령을 배제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체는 거저를 위해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조화도 없습니다. 메시아가 아닌 다른 것(바울은 '벨리알'이라는 희귀한 우상의 이름을 거론했습니다)을 추구하기 때문에, 혹은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같은 텔로스를 지향할 수 없습니다. 조화와 합리적인 대화는 같은 텔로스를 추구할 때 가능해집니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모든 텔로스를 소거해버린 17,18세기에 주목합니다. 텔로스가 배제되고, 그 자리에는 서로 통약가능성을 상실한 정의(definition)만이 남았습니다. 텔로스를 소거해버린 현시대는 에클레시아와 결코 화음을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의와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저항과 투쟁의 불협화음만이 들릴 뿐입니다.
희랍어 '메로스'는 '부분, 할당'으로 번역됩니다. 신실한 이들에게는 부분적으로 주어진 몫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전체로부터 나온 부분입니다. 전체는 곧 새 하늘과 새 땅,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만물입니다. 그 만물로부터 에클레시아는 상속의 몫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속의 몫을 차지하려는 상상, 그 순수한 보상심리만이 에클레시아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실천의 동인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않은 이와 함께 이 일을 추구할 수는 없고, 추구하지 않은 이에게 그 몫이 주어질리도 없습니다.
로마서 2:6,7
한 분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참을성 있게 선을 행하므로,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할 때, 한 분은 그들에게 '오는 시대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8
그리고 만일 의로운 이가 가까스로 구원받는다면, 경건하지
않고 죄인인 사람은 어찌 드러나겠습니까?
사람은 소와 달리 상상합니다. 그 상상에는 제한이 없기에 크리에이티브는 바로 그 상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상상은 허상으로 드러날 것이고, 어떤 상상은 진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메시아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φαντασια)을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이 상상으로부터 몸을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은 상상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크리에이티브합니다. 더불어 세상에 이질적인 삶을 구현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상상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같은 메카니즘으로 허상(φαντασμα)이 기능합니다. 사람은 허상을 숭배하고, 그 허상에 따라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상임이 드러났을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곧 사람의 몸을 가리킵니다. 이 몸은 하나님이 주신 상상을 구체화합니다(이것이 곧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상상을 현실화한다는 말입니다. 상상을 현실화하는 것이 곧 예배인 것은,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성전인 부활이 약속된 몸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허상을 꿈꾸는 이들과 하나님의 성전이 함께 놓일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듯 말입니다.
"나는 그들 안에 살 것이고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고, 그들은 나의 씨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들 가운데로부터 나와라 그리고 경계지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씻기지 않은 것에 들러붙지 말아라.
바로 내가 너희를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로 될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은 나에게 아들들과 딸들로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께서 말씀하신다.
바울은 명시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모든 단어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에클레시아입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건물을 성전이라 생각했던 이전의 통념을 박살냅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이라는 모티브는 더 뚜렷하게 재현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하늘을 잇는 온 땅 위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전과 관련된 본문인 사무엘하 7장을 인용합니다. 예언자 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무엘하 7:12~16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전 공동체를 아버지처럼 엄하게 징계하면서도, 사랑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제대로 길러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글자를 가지고 노는 바울답게, 이 나단의 예언을 몇 군데 손질합니다. 하나는 나단이 '단수'로 표현한 것을(본문의 "그"), 고린도후서로 가져오면서 "너희들"이라는 복수 표현으로 고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아들들과 딸들로 될 것이다"라 고쳤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드러내는 형태로서 글자가 유연하게 변모했습니다. 이로써 성전 짓는 후손에 대한 예언은, 에클레시아에 대한 예언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에는 여자도 분명히 귀속된다는, 당대 현실에서 이질적이었을 공동체적 삶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로"된다는 것은, 에클레시아가 아들과 딸답게 되는 가능성 속에 들어와 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글자를 넘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글자를 수정하면서도 글자가 전하려는 의미를 왜곡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들을 가진,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니 우리 살몸과 영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이 합시다, 하나님의 두려움 안에 (있는) 거룩함을 우리의 끝으로 가져옵시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성전 된 공동체를 때로는 혼내시고, 때로는 다독이시며 제대로 길러내실 것입니다. 이 예언과 현실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정당한 몫입니다. 그들이 약속들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이 "그러니"라는 접속사 이후 이어집니다. "살몸과 영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스스로 깨끗이 합시다." 여전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가능성 속에 있고, 그 가능성 속에서 신실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가능성으로 드러나야 할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책임을 이루는 삶이 여전히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청유형 문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스스로"라는 말을 붙여서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새창조의 '깨끗'입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그리고 상상을 포함하는 몸의 순환체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깨끗할 수 있다'는 비식별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죄인과 의인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는 새창조의 과정 속에 말입니다.
조르조 아감벤은 두려움의 감정에 대해서, "드러나야만 하는 것이 은폐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 말합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쉐키나(임재의 구름)을 감추고 있듯이, 에클레시아의 몸적 생활 이면에는 성령이 감추어 계십니다. 감추어 계시지만 드러나는 것은 에클레시아의 몸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허름함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드러날 그 날을 상상해봅니다. 두려움. 그날을 두려워하는 것은, '거룩함'이야말로 마땅히 드러나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아니겠습니까?
그 거룩함을 우리의 끝으로 가져옵시다. 여전히 청유형 문장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우리의 끝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그 끝은 내 잠재력이 단절된 지점입니다(곧 오순절로부터 시작된 "마지막 날"입니다). 곧 지금입니다. 오늘입니다. 구원의 때입니다. 내 잠재력이 중단된 그때, 숨님의 잠재력은 내 잠재력과 경계를 가를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발현됩니다. 잠재력이 중단되고 시작되는 그 단절면에서 잠재력의 결과인 '일(εργον)'이 드러납니다. 새창조가 벌어집니다. 그 깨끗한 새 창조를 우리 스스로, 우리의 끝으로 가져옵시다. 에클레시아 여러분!
"지금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6:14~7:1
여러분은 어울리지 않는 쟁기를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매는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 즉
의와 무법(아노미)이 (함께 하는 것이) 대체 무슨 교제입니까? 어둠을 향한 빛으로 대체 무슨 코이노니아입니까? 그런데 벨리알을
향해서 대체 무슨 메시아의 화음이 있습니까, 신실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하는 신실한 이에게 대체 무슨 몫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림자 숭배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함께 놓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듯 말입니다.
"나는 그들 안에 살 것이고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고, 그들은 나의 씨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들 가운데로부터 나와라 그리고 경계지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씻기지 않은 것에 들러붙지 말아라.
바로 내가 너희를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로 될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은 나에게 아들들과 딸들로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들을 가진,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니 우리 살몸과 영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스스로를 깨끗이 합시다, 하나님의 두려움 안에 (있는) 거룩함을 우리의 끝으로 가져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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