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새로운 창조와 옛 세계가
윗맷돌과 아랫맷돌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데,
사도는 그 가운데 붙들려
자신이 짓이겨져 가루가 된다고 느낀다."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후서> p.99
고린도후서 6:3~13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넘어짐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이 섬김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함께 자신들을 하나님의 섬김이들로 세우며, 많은 견딤 속에서, [눌림들 속에서, 사명들 속에서, 죄여듬들 속에서], [다침들 속에서, 투옥들 속에서, 폭동들 속에서], [고됨들 속에서, 잠못잠들 속에서, 굶주림들 속에서], {순수함으로, 깨달음으로, 긴 호흡으로, 손내밈으로}, {숨님으로, 시치미 떼지 않는 사랑으로, 참에 속한 로고스로,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있습니다).
"이 섬김"은 "숨결의 섬김", "화해의 섬김", 우리는 고린도후서 3~5장에 걸쳐 이 섬김의 정체를 확인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섬김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이 섬김이 비난받지 않도록, 어떤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자신이 넘겨질지언정, 다른 이를 넘어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해를 끼칠리 만무합니다. 아니, 피해를 끼치기는 커녕 바울일행의 여정은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고생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견딤 속에서,
[눌림들 속에서, 사명들 속에서, 죄여듬들 속에서],
[다침들 속에서, 투옥들 속에서, 폭동들 속에서],
[고됨들 속에서, 잠못잠들 속에서, 굶주림들 속에서],
고생 목록들 전체를 묶는 큰 주제는 "많은 견딤"입니다. 이 많은 견딤 안에는 고생들이 세 개씩 묶여서 나열됩니다. 바울의 고생목록은 생색이 아닙니다. 바울은 앞에서 '몸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고, '몸을 통해' 메시사의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시이며, 바울은 "이 섬김"을 위해서 이 고생들을 기꺼이 겪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8~10에서도 이와 비슷한 목록이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지만
짓이겨있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쫓김 당하지만 버림받지 않으며,
아래로 던져지지만 멸망당하지 않으며,
모든 때에 그 예수의 그 죽으심을 몸에 짊어집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이 우리의 몸들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위 목록의 시작(4:7)에서는 "잠재력"이 언급 되었습니다. 바울의 사고 속에서 이 "몸으로 견딤"의 예시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잠재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긴 고생 목록의 마지막을 "잠재력"이 마무리합니다.
세 개씩 묶여있었던 고생들이 세 번 열거된 이후, 네 개씩 묶이는 새로운 목록이 나타납니다.
{순수함으로, 깨달음으로, 긴 호흡으로, 손내밈으로},
{숨님으로, 시치미
떼지 않는 사랑으로, 참에 속한 로고스로,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있습니다).
앞에서 고생들이 "~속에서"라는 전치사가 공통으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는 "으로(δια, through)"로 전치사가 바뀝니다. 즉 3의 고생들을 4로 관통해나갔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리고 이 목록의 한 가운데에는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한 단어가 박혀있습니다. 숨님(πνευμα). 이 4의 목록들은 성령을 통해 발현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특히 "긴 호흡"과 "손내밈"에 대해서는 앞 선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a
인은 호흡이 깁니다.
인은 손내밀며,
"긴 호흡"은 인내입니다. 호흡과 몸이 참아내는 것과는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출산시 라마즈 호흡법처럼). 그리고 개역성경에서 "자비함"으로, 새번역에서는 "친절"로 번역된 "손내밈(χρηστότης)"은 로마서 10:21을 떠올립니다.
로마서 10:21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믿으려 하지 않고, 반박하기만 하는 백성에게
내가 온종일 내 두 손을(τὰς χεῖράς μου) 내밀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성령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의 목록과 오늘 본문의 목록이 겹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목록의 중심에 성령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8에서는 "깨달음(지식)"도 성령의 카리스마 중 하나로 말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아홉가지 양상들 중 하나가 "손내밈"입니다.
결국 이 목록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화해의 섬김을 맡은 바울일행은, 견디기 어려운 고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견뎌 왔다는 것입니다.
오른손들과 왼손들에 있는 이 의의 도구들을 통해서, 영광과 수치를 통해서, 중상모략과 좋게 말듣는 것을 통해서 (있습니다).
전치사 "통해서" 목록이 추가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목록들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중성입니다. 그저 "의의 도구들"이라고 말해도 될 것을, 바울은 "오른손들과 왼손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영광과 수치"를 통해서입니다. "중상모략과 좋게 말듣는 것을 통해서"도 양의적입니다.
"이 의의 도구"라 말하는 것으로보아, '의의 도구'는 바울이 앞에서 제시한 목록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인 '의'가 붙은 것으로 보아, 바울은 자신들의 고생들과 그 고생들을 돌파해나갈 수 있는 힘 곧 성령을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돕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의 도구"를 부연하기 위해 "영광과 수치", "중상모략과 좋게 말듣는 것"이 따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양의성이 폭발하는 다음 문장을 보며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잘못 이끄는 것같지만 참되고, 무지한 것 같지만 알고 있으며, 죽은 것 같지만, 보십시오, 살아있고, 징계를 받고 있지만 사형선고 받지는 않았으며, 슬퍼보이지만 그러나 늘 기뻐하며, 거지같지만 그러나 많은 이들을 부유하게 하며,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을 확실히 가졌습니다.
바울일행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그들을 "잘못 이끄는 자들이며, 무지하고, 죽은 것 같고, 국가의 징계를 받고 있으며, 슬퍼보이고, 거지같고, 가진 것 없어"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얼굴이 빛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을 이처럼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일행이 겪는 수치이고, 중상모략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참되며, 알고 있으며, 죽기는 커녕 부활을 닮아 살았고, 징계 속에서도 사형선고는 아니라며 웃을 수 있고, 기뻐하며, 많은 이들을 부유하게 하며, 심지어 '모든 것'을 확실히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고린도후서 3,4장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옛언약에 속한 이들은, 새 언약의 섬김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넘겨지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넘어짐을 극도로 삼가는 바로 이 사람들이, 모든 것,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속자임을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바울일행이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겪는 일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판단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어떻게 판단해야겠습니까? 무엇을 보아야겠습니까? 에클레시아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이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코린토스 사람들이여, 우리의 가온이 이미 넓어졌습니다. 우리 안에서 여러분들은 짓이겨지지(고전 4:8)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내장들 안에서 여러분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정당한 삯을,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넓게 하십시오.
파라클레시스로 시작했던 편지내내, 심지어 6장에 이른 이 대목까지, 바울은 여전히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일행의 심장(καρδις, '심장'이란 의미인데, 주로 '마음'으로 번역됩니다. 저는 "가온"이란 말을 차용했습니다)은 넓습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넒어진 바울 일행의 심장과는 달리,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의 '내장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말에도 "애간장이 녹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애"는 '창자'를 의미하고, 간장(肝腸)은 말그대로 '간'과 '창자'입니다. 즉 자신의 상태를 장기와 연관지어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의 표현은 몸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바울의 의도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속이 좁아졌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일행은 마음이 넓어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받아주려고 하지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그와 반대더라'가 아닙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속이 좁아져서, 바울일행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지경("여러분의 내장들 안에서 여러분이 짓이겨져 있습니다")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이들에게 말하듯 양육자의 사랑을 담아 말합니다. "정당한 삯을 바로 여러분이 넓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당한 삯"이란, 속을 넓게 해서, 마땅히 에클레시아다운 에클레시아 되는 것(5:21)입니다. 이것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정당합니다. 메시아의 죄되심으로 인해, 마땅히 그들이 되어야할 그들자신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6:3~13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넘어짐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이 섬김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함께 자신들을 하나님의 섬김이들로 세우며, 많은 견딤 속에서, [눌림들 속에서, 사명들 속에서, 죄여듬들 속에서], [다침들 속에서, 투옥들 속에서, 폭동들 속에서], [고됨들 속에서, 잠못잠들 속에서, 굶주림들 속에서], {순수함으로, 깨달음으로, 긴 호흡으로, 손내밈으로}, {숨님으로, 시치미 떼지 않는 사랑으로, 참에 속한 로고스로, 하나님의 잠재력으로} (있습니다). 오른손들과 왼손들에 있는 이 의의 도구들을 통해서, 영광과 수치를 통해서, 중상모략과 좋게 말듣는 것을 통해서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 이끄는 것같지만 참되고, 무지한 것 같지만 알고 있으며, 죽은 것 같지만, 보십시오, 살아있고, 징계를 받고 있지만 사형선고 받지는 않았으며, 슬퍼보이지만 그러나 늘 기뻐하며, 거지같지만 그러나 많은 이들을 부유하게 하며,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을 확실히 가졌습니다.
우리의 이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코린토스 사람들이여, 우리의 가온이 이미 넓어졌습니다. 우리 안에서 여러분들은 짓이겨지지(고전 4:8)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내장들 안에서 여러분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정당한 삯을,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넓게 하십시오.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 7:2~16 (2) | 2017.02.03 |
---|---|
고린도후서 6:14~7:1 (1) | 2017.02.02 |
고린도후서 5:16~6:2 (1) | 2017.01.31 |
고린도후서 5:11~15 (0) | 2017.01.26 |
고린도후서 5:6~10 (0) | 201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