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마치고 종말론사무소 업무 재개. 자신의 산적한 문제들을 뒤로하고, 타인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기이한 길.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비식별영역에서 메시아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
고린도후서 5:16~6:2
그 결과 우리는 그 때로부터 어떤 것도 살몸을 따라 알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메시아를 살몸을 따라 깨달았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금 어떤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죽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한 사람의 죽음은 곧장 많은 이들의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에 참여하는 죽음, 비참한 죽음, 부당한 죽음, 고난, 어려움,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끌어안은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된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을 살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게 아니라, 죽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은 자신의 죄책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같은 비뚤어짐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비뚤어짐의 결과가 오롯이 자신의 몫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은 그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신 한 분께 환호합니다. 환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끌어안은 죽음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자신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나를 죽이려했던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참되게 살게 하기 위한 "가시"였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난 주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결과"로 시작됩니다. 바울 일행은 메시아의 죽음에 동참했고, '그 죽음으로부터 새로이 일어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삶에 관한 것을 "살몸에 따라 알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 삶에 관한 것은 살몸을 따라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이 "살몸을 따라"라는 말입니다.
-살몸을 따라
'살몸'은 '몸뚱이'를 뜻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관점적(respective) 사고'는 인간을 정육점 고기마냥 토막내서 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이 있을 뿐, 인간성을 그 '구성요소'에 따라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영혼+몸뚱이'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구성적 사고는 반드시 인간을 망치게 됩니다. 몸을 영혼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했을때, 결국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살몸'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살몸을 따라 아는 것은 현시대의 방식으로 아는 것이요, 현시대의 방식은 옛언약입니다. 몸 밖에 있는 글자를 의지해서 얻은 지식입니다. 이 살몸에 대비되는 말은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부어주신 인간 새창조를 위한 자신의 영입니다. 본문에 '성령'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지금까지 고린도후서의 맥락을 따라왔다면, 글자로 써있지 않는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 얻은 새로운 앎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새로운 앎이야 말로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앎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다시 앞에서 해결한듯 보이는 물음이 고개를 치켜듭니다. 우리는 위에서 '관점적 사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관점적 사고를 불식시키고, 다시 참된 인간을 '성령+인간'으로 구성하는 것입니까?
-프네우마와 몸
성령이라 번역하는 '프네우마(πνευμα)'는 히브리어 '루아흐'에 대한 번역어입니다. 신약성경에 프네우마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고전 희랍 문헌에는 프네우마가 심심치않게 등장합니다. 특히 의학서적들에서 프네우마는 단골 메뉴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조르조 아감벤은 <행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고대 의학서적들에 의하면 프네우마는 심장으로 들어와 혈관을 통해서 온몸으로 퍼집니다. 그래서 상상력과 판단력을 주관하는 뇌에 닿고, 상상하고 판단했던 것들은 다시 혈관을 타고 고환에 이르러 생명 탄생을 위한 알짬인 정액에 관여하게 됩니다. 즉 프네우마는 고대 의학에서 '심장-뇌-성기'의 순환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또한 이 프네우마의 순환은 '상사병'의 징후를 설명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상사병은 상상력이 몸에 까지 영향을 끼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인데, 이때 프네우마의 순환은 상상의 영역과 신체의 영역을 아우르면서, 사람을 괴롭게 하게 됩니다.
아감벤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상상된 이미지)의 순환체제를 위반하지 않고 아모르 헤레오스(상사병)를 치료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나르시스나 피그말리온이 되지 않고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 1
저는 지금까지의 고린도후서 해설이 아감벤의 물음에 계속 답하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신적인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 상상력은 신체와의 순환 체계를 이룹니다. 그 순환체계(몸적 생활) 속에서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상으로 변질되지 않은 채, 인격에 끊임없이 반영되며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합니다.
저는 프네우마가 '루아흐'를 가리키는 번역어로 차용되는 과정 속에서, 프네우마가 갖는 '상상력 + 신체의 순환'이라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창세기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창세기 9: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토라는 '피'를 곧 '생명'이라 보고 있습니다. 피는 프네우마를 나르는 순환계이고, 프네우마는 새피조물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몸과 별개로 기능하는 생명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 몸으로 기능하는 생명입니다. 몸에 대해서 강조했던 바울이, 몸과 구성적으로 별개인 것으로 성령을 언급했을리 없습니다.
신약학자들은 바울이 이 프네우마라는 단어를 '하기오스(`αριος, 거룩한)'을 붙여서 성령으로 쓰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저 '프네우마'라고만 쓴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은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장의 문맥 속에서 '프네우마'가 성령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측면인지를 결정해야 했으니까요. 이점은 바울신학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물과 프네우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요한복음 3:5)"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도 상이한 해석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저 프네우마를 성령으로 보고(개역성경과 새번역은 모두 "성령"이라 해석했습니다만), 누군가(도재웅 선생님)는 그저 인간적인 관점의 영이라 이해합니다.
저는 '성령'과 '인간적인 영' 사이는, 그 경계를 확정지을 수 없는 비식별영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비식별영역의 어느 지점에 쐐기를 박아서 경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야 말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확인헀던 바로 이 구절에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린도후서 5:10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이 그 실천을 향해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좋음이든 열악함이든 되돌려받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그것을 몸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그, 혹은 그녀가 받았다는 성령이 몸적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면, 그 영은 적어도 '프네우마'는 아닐 것입니다. 성령도 몸을 따라 기능하고, 자신의 영도 몸을 따라 기능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몸'을 성령과 자신의 영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비식별영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혈관계는 성령이 다니시는 길이되고, 그 혈관 안에서 그의 영은 성령이기도 합니다. 이 신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비식별영역에서 그가 확고부동한 것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의 쉬네이도스이고, 그 쉬네이도스는 곧 메시아의 형상입니다. 자신 안에서 메시아를 확인하는 인간,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의 혈관을 따라 온 몸을 순환하는 것이 하나님의 프네우마라면, 그는 참으로 '성전'이라 부를만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살아있는 성전"이란, 성령이 온 몸을 순환하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해 납득할만한 표현들을 최대한 사용한 정직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결과 만일 무언가가 메시아 안에 있다면, 새 피조물입니다. 옛창조의 것들은 비껴갔습니다, 보십시오, 새창조의 것들이 되었습니다.
앞의 구절과 같은 접속사(`ωστε)가 이어집니다. '테(τε)'는 대등접속을 의미하므로, 5:15에 연속되는 결과로서 '1) 우리는 살몸을 따라 알지 않았다' 와 '2) 누군가 메시아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앞의 5:15와 연결점을 갖습니다. 위 문장의 "메시아 안에 있다면" 이란 말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메시아와 함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죽었으므로),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즉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를 텔로스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새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이 "새창조의 피조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구약 예언서들의 다양한 반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새 피조물"이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서 일으키겠다고 하신 마른 뼈(에스겔 17:4),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죽음의 포로기에서 해방된 사람(이사야 40:1), 하나님께서 오게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사람(이사야 43:7),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몸 밖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 사람(예레미야 31:33)입니다. 옛 언약이 지시하고 있던 것이, 새 언약을 통해 마침내 성취된 것이고, 그 성취는 인간 밖의 새로움이나 사건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 자체의 변혁, 새롭게 된 인간 자신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이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살몸을 따라 알고 사는 것도 인간적입니다.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된 사람도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비껴갔습니다(παρερχομαι). 그것은 되지(γίνομαι) 못했습니다. '인간적인'이라는 말은, '비껴간 존재'도 의미하고, '된 존재'도 의미합니다. 성령은 되게 합니다. 살몸은 비껴가게 합니다. 비껴감은 무엇일까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내어줄 수 없음이 아닐까요? 법의 한계 상황에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 아닐까요? 살몸은 피 흘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숨님은 전체의 순환을 위해 마땅히 자신의 피를 흘리도록 내놓습니다. 법의 한계 상황을 돌파하는 것은 자신을 넘겨주는 것(παραδοσις)이었습니다. 부활하신 한 분 향하는 삶이란, 넘겨짐을 통해 넘어서는 삶, 죽음을 지나 일어나는 삶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내용을 말하다가,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넘겨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스스로 새창조의 것들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혈관을 따라 성령이 흐르는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새창조의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수 명사는 어떤 이들을 지칭하고 있습니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여기에 포함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있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메시아를 통해 화해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그 화해의 섬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 계셨고, 코스모스를 자신과 화해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잘못된 걸음들을 그들에게 산정하지 않으시는,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 화해의 로고스를 놓으셨던 분이 (말입니다).
바울이 "그 모든 것들"이라 쓴 것은, 바로 앞 문장에 있는 "새창조의 것들"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그 모든 것들"과의 화해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 메시아 안에 있는 "화해의 섬김"이 곧 코스모스 전체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목적 때문임을 밝힙니다. 즉 이 '우리'는 1)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이고, 2) 그 화해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섬김의 목적은 3) 하나님과 코스모스의 화해에 있습니다.
1)
얼마 전, 어린이들에게 설교하면서 저는 '형상'이란 단어를 "양쪽을 연결하는 닮음"이라고 풀었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닮았듯이, 하나님과 아담은 서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이 닮음을 거절한 사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불순종의 사건이고, 불순종이후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과 닮도록 창조된 인간이, 어디까지 하나님을 안닮을 수 있는지의 역사였습니다(17c 이후 계몽주의 프로젝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이와 정반대 방향의, 하나님 닮음을 뚜렷이 드러낸 한 인간의 족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를 통해서 화해가 벌어졌습니다. 즉 이 화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닮을 수 있는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전환을 위해 살결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어떤 이들 마음에 거저, 그리고 새로이 창조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 속에 갖게 되었습니다.
2)
바울은 다시금 "섬김(διακονια)"이란 단어를 가져옵니다. 앞에서는 "숨결의 섬김"이라 언급되었던, 개역성경에는 "직분"이라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로부터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바울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을 "화해의 섬김"이라 말합니다. 자신이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했고(즉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닮아가게 되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하나님과 화해하도록(그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해는 '잘못했던 것들의 인정'을 전제하는 화해입니다. 죄의 인정없이는 닮음의 방향은 뒤집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의 인정을 통해 가장 유익을 얻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닮기 시작하는 시작점은 죄를 인정하는 지점입니다. 여기가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는 특이점(singularity)입니다. 각종 자기 계발서가 말하는 '터닝 포인트'는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몸 밖의 규율을 제시하고, 그것에 스스로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모든 자기 계발서의 텔로스입니다. 이러한 목적과 방식은 바울이 한사코 거절하던 엣 언약의 것이며, 자신이 그 규율대로 살 수 없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할 뿐, 정작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하지 못합니다. 메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죄의 인정'과 '성령 수여', 그리고 인격의 변화이고,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화해'라 합니다. 본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타락을 극복하고 재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화해의 섬김"은 현시대에 속한 이가 자신을 현시대에 속한 이로서 인정하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대로 "세상을 세상되게 하는" 일이고, 이것이야말로 에클레시아의 일입니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자신을 코스모스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코스모스가 늘 바라고는 있지만, 정작 그렇게 할 수 없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설득은 말 뿐만 아니라 삶으로 벌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는 자신의 삶이 들어있고, 그 말과 삶 전체가 '설득'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 수렴합니다.
3)
"그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 계셨고(imperfect), 코스모스를 자신과 화해시키시기(present)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잘못된 걸음들을 그들에게 산정하지 않으시는(present),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 화해의 로고스를 놓으셨던(aorist) 분이 (말입니다)."
위의 문장의 '시상'에 주목해봅시다. '시상'에 대해 예전에 영문법에 관해 써놓았던 짧은 글을 인용해둡니다.
'시상'은 '시제+상'의 의미입니다. 시제는 Tense인데 라틴어 Tempus에서 왔습니다.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을 써서 "때매김"이라 표현하는 것을 봤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적인 구획을 정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때를 매김'하는 구획은 두 가지 뿐입니다. 바로 현재와 과거입니다. 미래는 시제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미래는 시간적 구획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적 구획이란, 사실들의 저장소입니다. (시간을 공간화해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과거'도 사실들을 저장할 수 있고, 현재도 사실들의 저장소가 될 수 있지만, 미래는 아무 것도 이뤄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미래는 시제가 될 수 없습니다. 미래는 시제가 아니라, 현재에 기반을 둔, 미래에 대한 추측, 심경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제1시제', '제2시제라'는 용어를 사용할까 합니다. 제1시제는 현재요, 제2시제는 과거입니다. 제1시제 동사에는 뒤에 [쓰] 발음이 만이 옵니다. 그리고 [드, 트]같은 경우는 제2시제를 나타내는 발음들입니다.
그 다음 '상(aspect)'입니다. 상은 말그대로 눈에 보이는(spect) '어떤 한 측면(a)'입니다. 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는 흔히 완료라고 부르는 have와 진행이라 부르는 ing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름 자체가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have는 완료라기보단 오히려 '연결'의 의미이고, ing는 진행이라기 보다 '순간 포착'의 늬앙스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문장은 미완료(imperfect) 시상으로 시작됩니다. 미완료는 말그대로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계속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 계셨는데, 그것이 지속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그리고 현재분사가 두 개 붙습니다. 이 두개의 현재분사는 바울 일행이 하고 있는 일을 대변합니다. 그들은 "화해의 섬김"을 하고 있고,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새로운 시절을 살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죄에 대한 산정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산정'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로마서 연구 2.0' 내용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현재분사의 주어는 바울일행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즉 바울일행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주어에 대해서 부연하면서, 바울은 시상을 바꿉니다. 아오리스트(aorist)를 쓰는데,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지 않은 '순간 포착'의 늬앙스를 나타냅니다. "우리 안에 그 화해의 로고스를 놓으셨던 분". 우리말에는 아오리스트 시상이 없어서 번역에 반영되기가 어렵습니다. "화해의 로고스"는 곧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죄를 인정함 - 형상이 하나님을 닮아감'을 위해서는, 사람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해'는 희랍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말의 체계를 통해서 되질 않습니다.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이 이해되는' 지점에서 화해가 벌어집니다.
'로고스'는 인간이 지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치', '질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가 로고스다'라는 사실이 수용되었을 때, 로고스는 인간의 지성을 포함하면서도 넘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람을 결코 모조리 알 수 없을 것이기에 사람을 아는 것은 지성의 차원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인자)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를 만난 이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하는 차원. 알 수 없으면서도 아는 차원. 화해의 로고스는 그렇게 사람 안에 계시면서도 사람을 넘어 계시어 사람과 사람을 연대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메시아 안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합니다.
그 화해의 로고스가 우리 안에 놓였습니다. 언제 놓였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놓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오리스트입니다. 화해의 로고스가 일단 놓였기 때문에, 바울일행은 하나님을 주어로 두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하나님이 죄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더 이상 그 죄를 묻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닙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해한 이들과 함께 화해의 로고스 안에서 연대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화해와 용서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던 그 때로부터 개시되었고(곧 종말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는 사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파라클레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여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 비뚤어짐을 알지 못하는 이를 우리를 위해서 비뚤어짐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대신하는"이라고 번역한 전치사는 희랍어 '휘페르(`υπερ)'입니다. '위하여'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만, 뒤에 '사절'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대신하여(on behalf of)'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바울일행은 메시아를 대신합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께서 승천하신 이후 그이는 더이상 예루살렘에서 볼 수 없지만, 그의 제자들이 남아서 그의 일을 이어갑니다. 즉 베드로 일행이 메시아를 대신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기적은 이 '메시아를 대신함'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일행도 메시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일행은 메시아의 몸입니다. 그들은 대신이라기보다는 메시아 자신입니다. 메시아는 공동체라는 몸을 통해서 코스모스 전체에 대해서 파라클레오하십니다. '권면, 조언'으로 번역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파라클레오는 강력한 명령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여기서의 여러분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코린토스 사람들은 이미 화해했기 때문에 에클레시아의 칭호를 얻을 수 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미 에클레시아된 이들에게 다시금 화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길게 이야기했던 모든 논증들은, 모두 이 명령으로 귀결됩니다. 메시아를 대신하는, 숨결의 섬김, 화해의 섬김을 해나가는 바울일행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모든 화해와 관련된 담론들로부터 벗어나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었다는 사실은, 기분 나빠해야할 말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에클레시아가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새로이 깨닫고, 다시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바울은 화해의 목적을 밝힙니다. 그 목적은 다시금 '됨(γιγνομαι)'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화해로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된 새 피조물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세히 밝히는 개념입니다. 요약하자면,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옳음'이라 하겠습니다. 즉 타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새창조의 인간으로 구현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롭게 지어져가기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신의 약속을 이뤄가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옳음'이 되어가고, 마침내 그렇게 되는 것이 화해의 목적입니다.
'됨'처럼 어려운 것도 없는데, 바울이 죄인들이 의인된다는 것을 이처럼 대담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그 '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비뚤어짐을 알지 못하는 이를 우리를 위해서 비뚤어짐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와 에클레시아의 방향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없는 이를 죄인으로 만드셨고, 이때문에 죄인은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반대의 두 방향이 충돌하는 지점이 죄없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 속에서 벌어졌고, 한 번 벌어진 사건은 그 누구도 흠집낼 수 없도록 '과거'라는 때매김에 안전하게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변하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습니다. 이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코스모스와 화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어디있습니까? 코스모스 안에 속해 있다면, 당신도 확장되는 메시아의 신체 안에서 화해의 현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더불어 여러분을 파라클레시스합니다, 그 하나님의 거저를 헛됨으로 받지 마세요, 그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받을만한 카이로스에 내가 너에게 귀 기울였다
그리고 구원의 날에 너에게 도움을 주었다."
보십시오, 지금이 잘받을만한 카이로스,
보십시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향해 다시 한 번 파라클레오합니다. "그 하나님의 거저를 헛됨으로 받지 마세요." 이 말을 앞에 나온 개념들로 이해해본다면, 거저 화해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는 길 위에 섰으나, 그 길을 자진해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영광의 새창조를 버려두고, 옛창조의 비껴감으로 돌아서는 일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49:8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49장의 긴 문맥 안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포착해봅시다. 문단을 임의로 나누어 A,B,C를 붙여봤습니다.
A. 이사야 49:3,4a "공허와 텅 빔 같았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리크, "텅빔", "헛됨")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헤벨, "텅빔", "공허")한 것 같았다.
B. 이사야 49:4b~7 "모든 민족의 빛으로 불렀다. 압제자가 역전된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C. 이사야 49:8~12, "이 일을 위해 너를 구원하고 돕겠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구원해야 할 때가 되면,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겠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날에는, 내가 그 간구를 듣고 너희를 돕겠다. 내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겠으며, 너를 시켜서 뭇 백성과 언약을 맺겠다. 너희가 살던 땅이 황무해졌지마는, 내가 너희를 다시 너희 땅에 정착시키겠다.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는 '나가거라. 너희는 자유인이 되었다!' 하고 말하겠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곳으로 나오너라!' 하고 말하겠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먹거리를 얻게 할 것이며, 메말랐던 모든 산을 그들이 먹거리를 얻는 초장이 되게 하겠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샘이 솟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만들고, 내 백성이 자유스럽게 여행할 큰길을 닦겠다. 보아라, 내 백성이 먼 곳으로부터도 오고, 또 더러는 북쪽에서도 오고, 서쪽에서도 오고, 아스완 땅에서도 올 것이다."
D. 이사야 49:13~18,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하늘아, 기뻐하여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너를 건축할 사람들이 곧 올 것이니, 너를 파괴하는 사람과 황폐하게 하는 사람이 너를 곧 떠날 것이다.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네 백성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온다. 나 주가 내 삶을 걸고 맹세한다. 신부가 패물을 몸에 치장하고 자랑하듯, 너는 네 백성을 자랑할 것이다.
바울이 이사야 49장을 어찌 읽는지 알 수 있습니다.
A : 이스라엘은 스스로에 대해서 '헛수고'와 '헛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헛수고와 헛됨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헛됨"과 공명합니다.
B : 자신에 대해서 헛되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종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택했다'라는 말은, 어느 시점에 택함을 받았는지 그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체성을 '거저' 얻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나됨을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서, 내가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의미부여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저' 정체성을 주셨는데, 그 정체성은 "모든 민족의 빛"으로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 '거저' '모든 민족의 빛"의 정체성을 받은 사람은 사실 남들에게 멸시받는 사람이고,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받는 사람이고, 통치자들에게 종살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전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왕들이 이 비천했던 에클레시아에게 예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이 구절을 메시아의 최후의 심판으로 읽고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승소판정을 이미 받았고, 그것이 만천하에 밝혀질 끝날만을 남겨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비천함은 역전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비천했던 한 사람의 죽음과 부활이 증명합니다.
C : 여기서부터 '너'가 '너희들'로 전환됩니다. 바울에게는 "'너'에 참여하고 '너희들'"로 읽혔을 것이고, 이것은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주님께 속한 이들이 구원받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포로 해방의 때고, 승소판결이 마침내 드러날 때입니다.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는" 온전함을 향해 이끌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 온전함을 향한 여행에는, 먼 곳에 살던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D : A에서 자신들을 헛되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과 그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잊으셨다"고 말하는, 힘빠지게 하는 이들에게 다시금 용기를 주십니다.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예루살렘아!" 마치 어미가 자식을 잊지 않듯,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그 이름을 새겨서 결코 잊을 수 없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축할 사람들이 곧 올 것이고,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이들은 곧 떠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축할 사람들"을 바울은, 자신들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들(고린도후서 2:17)에 대해서 이미 바울은 언급했습니다.
이사야 49장 본문의 말미에는 '자랑'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에서 '자부심'으로 번역했던 그 내용 말입니다.
이사야 49장을 에클레시아에 관한 예언으로 완벽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내용과 고린도후서의 내용은 구석구석 그 세부 내용들이 맞아들어 갑니다. 따라서 어디를 인용해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할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인용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받을만한 카이로스에 내가 너에게 귀 기울였다
그리고 구원의 날에 너에게 도움을 주었다."
보십시오, 지금이 잘받을만한 카이로스,
보십시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구원의 날"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 바울이 고르고 골랐던 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간에 대한 내용은, 나머지 모든 내용을 포괄합니다. 이 에클레시아의 시간 속에서, 이사야의 갈망이 성취되고 있고, 하나님께서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잊지 않으시며, 이들을 돕고자 하시고, 이 에클레시아를 위해 준비하신 영광은, 이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헛헛함을 역전시키고도 남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에 있는 에클레시아는,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과 화해하고, 의가 되기 위한 시간입니다. 곧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기억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안심하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5:16~6:2
그 결과 우리는 그 때로부터 어떤 것도 살몸을 따라 알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메시아를 살몸을 따라 깨달았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금 어떤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만일 무언가가 메시아 안에
있다면, 새 피조물입니다. 옛창조의 것들은 비껴갔습니다, 보십시오 새창조의 것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있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메시아를 통해 화해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그 화해의 섬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 계셨고, 코스모스를 자신과 화해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 잘못된 걸음들을 그들에게 산정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 화해의 로고스를 놓았던 분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는 사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파라클레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대신하여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 비뚤어짐을 알지 못하는 이를 우리를 위해서 비뚤어짐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더불어 여러분을 파라클레시스합니다, 그 하나님의 거저를 헛됨으로 받지 마세요, 그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받을만한 카이로스에 내가 너에게 귀 기울였다
그리고 구원의 날에 너에게 도움을 주었다."
보십시오, 지금이 잘받을만한 카이로스,
보십시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 <행간>, p. 2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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