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5:1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님의 그 두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3장부터 시작되었던 바울의 긴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멈추고 숨을 돌리며, 이 이야기의 작은 결론을 말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바울이 무엇을 알고 있다 말하는 것인지 확인해왔습니다. 그에게 '알다'라는 말은 언제나 자신이 겪었던 충격적인 그 사건과 함께 다가옵니다. 에클레시아를 법의 수렁으로 몰아넣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와 함께 했던 추억이 없습니다(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추악한 과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어떤 사도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은 바울의 작품이니 말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부활이 그에게 새로운 앎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앎'이란 이전에 몰랐던 정보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새로이 이해하게 만드는 사유의 전복입니다. 부활 이후 바울이 보는 것은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기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말하던 하나님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구약의 구절들이 새로이 이해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앎은, 그가 이전에 살아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삶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자신의 앎의 내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두려움". "그 두려움"이란 심판주로서 예수에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신체 상해의 두려움'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를 부활하게 하시는 예수, 우리의 몸을 완성시키시는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는 신체 상해의 두려움 외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그 부활한 이들에게 영광의 옷을 입히시는 예수에 대한 경외가, 바울일행이 느끼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부활'은 '최후의 심판'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자체가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은 사람들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의 승소판정이 부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바울은 "마지막 때"가 되면, 유대인들이 단체부활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즉 그에게 최후의 심판이란, 이방인들이 틀렸음이 판명되고 유대인들이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제가 언급했듯, 다마스커스로 가는 바울이 알게 된 것은, 예수 한 사람의 단독 부활이었습니다. 즉 최후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예수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이 홀로 부활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선고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벌어졌습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결말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선고를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법(토라)은 그 타락한 인간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법이 가진 장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에게 선고된 죄인의 판결, 죽음의 결과가 오늘 나에 대한 판결과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게 해줍니다. 인간은 법 앞에서, 법 대로 살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느낍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도덕법 또한 포함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 모두가 법이 금지하는 상황을 바라는 타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내리신 판결 결과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이후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이 예상할 수 없었던 예외상황이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패소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 한 사람만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많은 사람들의 (영광의) 부활을 위한, 새창조의 사건이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시간, 메시아 예수께서 죽고 사심으로 열어재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시간을 설득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신실함'이라 번역하는 '피스티스(πιστις)'는 '설득하다'라는 뜻의 페이쏘마이(πειθομαι)에서 왔습니다. 즉 하나님께 설득된 상태를 가리켜 믿음이라 부릅니다. 범법자들에게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고, 그 가능성에 뛰어들어 사는 것을 신실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의 결말이 영광의 부활입니다.

  이렇듯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함께 사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안다'는 동사를 써서 말하는 것은, 모두 이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반면) 나는 소망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양심들 안에서도 드러나 있기를 바랍니다.

  즉 지금은 심판 중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드러나 있다는 것은, 그의 판결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요한복음 3: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드러나있듯,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양심에도 하나님께서 이미 드러나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 있기"라고 번역된 말은 '완료형'입니다. 즉 바울은 과거에 이미 그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 것처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가온에도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났기를 말입니다. 이는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아는 영광의 빛이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비춰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형상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바란다'는 말은 지금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상황이 하나님의 판단에 그리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우리 자신들을 여러분과 함께 세우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우리에 대해 자부심 가질(자랑할) 계기를 주려는 것입니다, 이는 얼굴로 자랑받는 이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가온 안에서 자랑받는 이들을 향해서는 아닙니다.

  '다시' 바울 일행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내세우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미 바울일행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에클레시아'가 된 것이니 말입니다. 자격 논쟁을 넘어서, 바울은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자랑할 계기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자랑은 외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에클레시아)가 가진 내밀한 성령의 영광입니다. 허름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바울 안에는 그 영광이 비추었습니다. 같은 영광이 코린토스 에클레이사의 양심 안에도 비췄습니다. 이것은 자부심 가질만한 일입니다. 아직도 모세를 따르며 밖으로 빛나는 얼굴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꼭 전해줘야 하는 자부심입니다.

즉 우리가 정신 나갔다면, 하나님께 그러합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여러분에게 그렇습니다. 즉 메시아의 사랑이 우리를 함께 갖습니다,

  아마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일부가, 바울을 향해 "정신이 나갔다"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신 나감'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봤던 것을 의미한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즉 바울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현명하다"입니다. '소프로네오(σωφρονεω)'를 쓰는데, 개역한글에서는 '정신의 온전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소(σω)'는 '구원하다'라 번역되는 '소조(σωζω)'에서 왔습니다. '온전함', '유지됨'의 뜻입니다. '프렌(φρην)'은 횡경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정신'이라 번역한 것은, 아마도 고대에는 정신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횡경막으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추청에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프로네오는 정신에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온전한 몸'입니다. '온전한 몸', 즉 몸적 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소프로네오의 뜻에는 'exercise self control'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15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누가복음 8: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복음서에도 소프로네오가 사용된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모두 "정신이 들다", "정신이 온전해졌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가 갖고 있는 몸에 대한 강조점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은, 이제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옷"이라는 상징이 갖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소프로네오 앞에 있는 "옷을 입고" 역시 몸의 온전함(곧 부활)을 가리키는 의미로 읽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마가복음에 없는 단어가 추가됩니다. "예수의 발치에 앉다"입니다. 이 말은 누가복음 10:39에도 나오는데, '제자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는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제자란 옷을 덧입기 위해 지금 몸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연결하는 매개가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고난에 넘겨지면서도 성령의 생명력으로 일어나는 '몸'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바울이 제시한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인간성과, 그 인간성이 구현되는 고난받는 몸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이 '몸'에 대한 바울의 주장이 연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수도 있고, 몸을 떠나서 여러 환상들을 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바울이 보여준 것은, 몸을 떠난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몸 생활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부활, 즉 죽을 몸에 새로운 몸을 덧입음으로, 수치를 완전히 해결한 모습으로 최후의 심판 앞에 드러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몸 생활은 남다른 함의를 갖습니다. 몸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부활의 몸을 준비하는 삶이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Vor Gott, Ohne Gott!"라 말했습니다. 번역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가 됩니다. 언뜻 들으면 "하나님 없이"라는 말이 이상히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이 오늘 고린도후서 본문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즉 늘 하나님 앞에 있지만, 굳이 '하나님'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몸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미쳐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몸의 온전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점은 고린도전서가 보여주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모습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에 집착했고, 몸과 무관한 영성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다시 자신들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앞에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울일행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메시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격을 가졌는지 갖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실상 모두 메시아의 사랑이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의 소유'을 ESV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2Co 5:14, ESV
For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앞에서 봤던 소프로네오의 의미와도 중첩됩니다. 에클레시아 속에서 비춘 영광의 빛은, 사랑 안에서 몸을 온전히 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음을 심판했습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럼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다시금 심판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는 최후의 심판 결과가 미리 선언된 것을 가리킵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최후의 심판에 영광의 부활로 나타날 사람들로 미리 선언된 사람들입니다. 온전한 몸을 덧입을 결말로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온전한 몸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그 온전한 몸생활이란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금 몸이 닳아가는 삶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을 종말론이라 부릅니다. 예수의 단독부활을 통해, 미래를 먼저 사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이 열렸습니다. 그 시간에 들어선 바울일행은 '심판'했습니다. 즉 미래의 판결을 현실로 가져와 판단했다는 말입니다. '심판'이란 말을 이러한 용례로 사용하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난바 있습니다. 아버지의 첩과 살림을 차린 남자를, 당장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로 그 본문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5:12,13, 개인번역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그 악인을 우리로부터 내쫓으십시오.

  성령을 통해 새인격을 받아, 미래를 안(본) 바울이 판단하는 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
b) 그 한 사람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죽게 했다.
c) 이 죽음의 목적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모두를 위해 죽고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죽게 합니다. 즉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게 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라 답하게 합니다. 곧 나를 위해 사는 삶의 죽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의 가능성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죽고 살아나신 이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는 몸적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넘겨지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메시아가 다시 일어나셨듯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몸을 덧입고서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14
그 주 예수를 일으키신 이가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며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세우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5:1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님의 그 두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 모두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반면) 나는 여러분의 양심들 안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시 우리 자신들을 여러분과 함께 세우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우리에 대해 자부심 가질(자랑할) 계기를 주려는 것입니다, 이는 얼굴로 자랑받는 이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가온 안에서 자랑받는(자부심 갖는) 이들을 향해서는 아닙니다. 즉 우리가 정신 나갔다면, 하나님께 그러합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여러분에게 그렇습니다. 즉 메시아의 사랑이 우리를 함께 세웁니다, 우리는 다음을 판단했습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럼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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