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5:6~10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서 민중 안에 있으면서 주로부터는 민중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실함을 통해서 걷고 있지, 뵈는 것을 통해서 걷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부터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것은 하늘로부터 새 몸을 덧입는 것, 곧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인격을 성령을 통해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대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감히 시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대담함"은 바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법의 한계 영역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일어났던,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렸던 그의 삶이야 말로 대담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알고 있습니다"가 등장했습니다. 바울의 "알고 있습니다"는 4:14에서 부활을, 5:1에서 하늘로부터 받는 부활몸을 목적어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울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내용은 '안과 밖'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가 "민중 안에 있다"로 번역한 말은, '엔데모스(ἐνδημέω)'를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데모스(δημος)'는 '민중'입니다. 즉 일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후서에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기준을 설정합니다. 하나는 "몸 안에서"와, 다른 하나는 "주로부터"입니다. 몸으로 있을 때 바울은 민중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주'에 대해서 말할 때, 바울은 민중들 바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주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를 알고 있는 바울과, 주를 모르는 민중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는, 바로 죽음으로 넘겨지는, 닳아감으로 고난받는 바울의 몸입니다. 몸이 매개입니다.
민중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그의 몸은 제 갈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신실함'이라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와, 보이지 않는 성령으로 연결되어, 그 형상을 닮아가며 걷는 걸음이 곧 신실합입니다.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민중과는 다른 걸음입니다. 그 걸음은 민중이 보기에 대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법의 한계 상황을 돌파하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타자를 향해 걷는, 진실한 사랑의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담하고 또한 훨씬 좋게여기고 있습니다, 이 몸으로부터 민중에게서 떨어져있는 것과 주를 향해 민중 안에 있는 것을. 이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영예롭습니다, 민중 안에 있던지, 민중 바깥에 있던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딱 맞게 여깁니다.
이 '대담함'이야말로 바울일행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절합니다. 또한 바울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바울이 죽으면, 이 몸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요, 이 주를 모르는 민중으로부터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를 향해서 민중 안에 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민중을 벗어나든, 민중틈에 있든 바울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삶이 영예롭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예로운 삶은 주께 속한 사람들의 삶이고, 바울은 이것을 기뻐합니다(딱 맞게 여깁니다).
바울은 분명 민중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정치인들마냥 민중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민중과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바울은 바울입니다. 그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주를 향할 뿐입니다. 보이는 것 밖에 모르는 민중에게 보이지 않는 차원을 드러내는 '몸'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빌립보서 1장의 내용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개념들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빌립보서 1:21~25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대담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메시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메시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메시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이 바울의 편지에 끼어들 곳이 없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동일하게 메시아의 존귀함을 위해 있고, 이 존귀함은 '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즉 사는 몸과 죽는 몸 모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을 강조하는 바울은, 몸과 무관한 세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어나가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을 보라는 호소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이란 몸이 완성되는 부활의 차원이고, 완성된 몸은 모든 수치(부끄러움)를 덮습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야고보서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베드로전서 4:8, 개인번역
왜냐하면 사랑은 비뚤어짐들의 넘친 것을 덮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의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준비하신 것임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비의 초대, 허물을 가려줄 온전한 인간성의 길을 거절하는 민중들 사이에 바울이 서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민중에게 대담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대담함은 사랑의 대담함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이 그 실천을 향해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좋음이든 열악함이든 되돌려받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논의는 '메시아의 심판석'으로 귀결됩니다. 곧 최후의 심판입니다. 희랍어로는 베마(βημα)를 씁니다. 이 '베마'가 심판대가 될 수도 있고, 시상대도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베마'에서 자신이 몸으로 했던 것들을 되돌려받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8, 개역개정(볼드체는 수정)
그에게 신실한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신실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따르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의 길을 따르는 자가 베마에 섰을 때, 그는 심판받을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물은 모두 가려졌고, 예수를 따랐던 그의 삶은 그 삶에 걸맞는 옷으로 되돌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5:29, 개인번역
그리고 좋음들을 만들었던 이들은 삶의 부활로,
파울로스들을 만들었던 이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것이다.
부활은 몸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부활"은 몸으로 일어났으나, 그 몸의 수치를 가릴 옷이 없는 부활일 것입니다. 예복이 없어 하늘과 땅의 혼인잔치를 기뻐할 수 없는 부활일 것입니다.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되돌려받는다는 사실에 다시금 주목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삶, 최후의 심판주이신 예수를 '지금'으로 모셔서(곧 내가 주 앞에 서서) 사는 삶이란, 온전한 몸 생활임을 가르쳐줍니다. 몸과 무관한 실존, 내지는 세계를 바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몸을 빼놓고는 별로 말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현재도 몸생활이요, 우리의 미래는 그 몸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인간성은 바로 그 몸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5:6~10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서 민중 안에 있으면서 주로부터는 민중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실함을 통해서 걷고 있지, 뵈는 것을 통해서 걷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담하고 또한 훨씬 좋게여기고 있습니다, 이 몸으로부터 민중에게서 떨어져있는 것과 주를 향해 민중 안에 있는 것을. 이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영예롭습니다, 민중 안에 있던지, 민중 바깥에 있던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딱 맞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메시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각이 그 실천을 향해 그 몸으로 했던 것들을, 좋음이든 열악함이든 되돌려받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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