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5:1~5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땅에 속한 이 장막의 집이 멸망당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하늘에 밑도 끝도 없는, 손으로 짓지 않은 집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알고 있다"가 등장했습니다. "알고 있다"는 4:14에서 나온 바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시편 116:10을 인용하며, "그 주 예수를 일으키신 이가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며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세우실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다시금 '안다'고 말한 것은, 집에 대한 얘기입니다. 두 가지 집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땅에 속한 이 장막의 집"입니다. 다른 집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하늘에 밑도 끝도 없는 손으로 짓지 않는 집"입니다.
  여기서 "집"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몸을 "장막"으로 표현합니다. 즉 "집"이라는 심상을 사용했지만, 이것은 "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고난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가져올 가장 처참한 상황을 그려봅니다. "우리의 땅에 속한 이 장막의 집이 멸망당한다면"이란 말은 "우리가 죽는다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죽음이란 상황에 낙심할 수는 있어도 나쁨으로 빠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하늘에 밑도 끝도 없는, 손으로 짓지 않는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도 "갖는다"는 동사를 쓴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2017.3.21 추가해둡니다.
  '하늘집'에 대한 두 가지 수식이 붙었습니다. 1) 밑도 끝도 없는, 2) 손으로 짓지 않은.

1) 밑도 끝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은 제 선생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입니다. 저는 "영원한"이란 단어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영원'이라고 하면, 시간을 그저 무한정 늘린 것 같은 지루함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원과 비교하면, 나의 현실은 그저 하나의 점, 덧없는 것,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지루하게 늘어난 고무줄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차처럼 이어지고 있는 크로노스를, 단번에 절단하는 카이로스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원한'이라는 말 대신에 성전의 공간적 차원을 설명하는 "밑도 끝도 없는"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희랍어로는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를 쓰는데, 사전에는 그 뜻이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without beginning and end"

2) 손으로 짓지 않은
  오늘날에는 핸드-메이드라면 가격이 좀 더 붙겠지만, 성경에서 손으로 지었다는 말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손으로 짓지 않은"이라는 표현 앞에는 '사람'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완전하신 분의 완전한 작품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입니다. non-handmade is God-made.

그리고 즉 우리는 이 안에서 슬퍼하며, 우리의 살 곳 즉 하늘로부터 덧입는 것을 갈망합니다, 실로 만일 우리가 덧입었음에도 벌거벗은채로 발견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안에서"는 사멸할 몸을 가리킵니다. 즉 어려움 속에서 아프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몸을 가지고, 줄곧 죽음에 내어지는 삶이란 슬프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갈망이 그 슬픔을 압도합니다. 그 갈망이란 곧 새로운 몸입니다. 부활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 앞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했을 때, 우리는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죽을 몸에 새로운 몸을 덧입을 것입니다. 마치 토니 스타크의 몸에 아이언맨 슈트가 입혀지듯 말입니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벌거벗은채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현실의 고난을 견디며 사는 삶은, 부활때 입을 새로운 몸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입니다. 곧 신실함입니다. 이 신실함의 과정 없이는 결혼잔치에 참여할 예복도 없이, 수치스러운 몸으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현실 속에서 화려하거나 자랑할만한 외모를 갖지 않는 바울의 상황을 뒤집어 읽게 만듭니다. 현실 속에서 수치스러운 신실함의 길을 걷는 이들은, 역사의 끝에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반대로 현실 속에서 수치를 모르고 살던 이들은(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수치를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즉 이 장막 안에 있는 우리는 눌려있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벗기를 바라기는 커녕 덧입기를 바랍니다, 이는 이 죽은 것이 그 삶에 의해서 삼켜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계속 바울이 '덧입음'을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벗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인간성은 갖춰 입는 것이고, 덧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덧입음에 대한 갈망이야 말로, 이 죽을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실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슬퍼하고 있음에도 나쁘게 될 수 없는 희망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죽은 것"이란 우리가 입고 살아가는 이 현실의 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현실의 몸이 온전한 몸으로 삼켜지는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현실과 미래 사이를 '고난-견딤'의 삶이 잇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후서 5장은 죽어서 가는 어떠한 장소, 몸을 벗은 실존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의 비젼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성경적인 비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고 즉"으로 시작된 앞의 두 문장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미 말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이 위로부터 덧입을 몸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을까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단, 시큰둥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바울이 같은 내용을 두 번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것을 향하도록 창조해서 만들어 내신(κατεργαζομαι)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그 숨결의 그 보증(αρραβω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요약하면 '새창조'입니다. 바울은 카테르가조마이((κατεργαζομαι)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것은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통해서 무언가 작품을 생산해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위에서 "손으로 짓지 않은"이란 표현은,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킵니다.
  '고난-극복'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몸을 덧입기를 갈망하며 사는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새창조의 결과물입니다. 그것이 새창조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압니다. 이 '보증'이란 표현은 이미 고린도후서 1:22에서 등장했었지요. 몸은 닳아가지만, 인격은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새로워진 인격에 걸맞는 몸 또한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몸 밖의 자격증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워진 인격,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새로운 인간성,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영광'이었습니다. 영광만이 하나님의 거저를 확신하게 합니다. 곧 하나님을 통해서 변화된 인격, 곧 성령으로 새창조가 시작된 사람만이 그 새창조의 결말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5:1~5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땅에 속한 이 장막의 집이 멸망당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하늘에 밑도 끝도 없는, 손으로 짓지 않은 집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즉 우리는 이 안에서 슬퍼하며, 우리의 살 곳 즉 하늘로부터 덧입는 것을 갈망합니다, 실로 만일 우리가 덧입었음에도 벌거벗은채로 발견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즉 이 장막 안에 있는 우리는 눌려있어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벗기를 바라기는 커녕 덧입기를 바랍니다, 이는 이 죽은 것이 그 삶에 의해서 삼켜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것을 향하도록 창조해서 만들어 내신(κατεργαζομαι)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그 숨결의 그 보증(αρραβω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고린도후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 5:11~15  (0) 2017.01.26
고린도후서 5:6~10  (0) 2017.01.25
고린도후서 4:13~18  (0) 2017.01.24
고린도후서 4:7~12  (0) 2017.01.20
고린도후서 4:1~6  (0) 2017.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