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4:13~18

  그런데 우리는 그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을 갖습니다, 이 기록을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신실했다, 이 때문에 내가 말도 했다."

  다시 "갖습니다"가 나왔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격이 있다는 말을, 여러 단어들을 쓰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갖습니다" 동사에 붙은 목적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4:1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섬김을 갖습니다.
4:7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4:13 그런데 우리는 그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을 갖습니다,

  그리고 매번 단어를 달리 쓰긴 했지만, 이 표현들은 같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의 사건이 갖는 다양한 강조점들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다채로운 표현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을 개역성경은 "믿음의 마음"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영'이 성령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개개인이 갖는 영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갖습니다"라는 표현의 연속 속에서 이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이란, 숨결의 섬김을 통한 새 창조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시편 116:10을 인용합니다. 좀 더 넓은 문맥을 가져오겠습니다. 이 본문은 바울이 구약, 특히 시편을 어찌 읽었을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합니다.

시편 116:7~12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바울이 "내가 신실했다, 이 때문에 내가 말도 했다"라고 말한 것은, 시편 116편의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혹은 겪고있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시편기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앞의 내용을 반추하며 시편 구절을 내용을 곰곰히 곱씹어본다면, 몸이 고난 속에 "넘겨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을 "넘어서게 하는" 성령적 인간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분명 구약 시편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전에는 타인을 판단하기 위한 법(法)이나 다름 없었던 구약성경이, 이제는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게 하는 자유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신실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말합니다, 다음을 알면서(보면서) 말입니다, 그 주 예수를 일으키신 이가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며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세우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통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 흘러넘쳤던 '거저'가 넘침들의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에 이르도록 넘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위에서 시편을 인용하며 다뤘던 문장에서 주어만 바꾸어 다시 사용합니다. "우리" 역시 신실합니다, 이 떄문에 "우리"도 말합니다. 즉 시편 116:10의 고백은 바울의 고백뿐만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숨결의 섬김을 하고 있는 바울의 동료들의 고백이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 고난으로 넘겨지면서도, 2) 다시 일어나며, 3) 이 사실을 감사할 줄 아는 새로운 정체성은 다음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4) 예수와 함께 일어나는 영광의 부활입니다. 이 같은 결말로, 바울일행과 코린토스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흘러넘치는 '거저'"입니다. 무언가 '거저'가 흘러넘치는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은 거저에 참여한 이들이 부활에 이를 것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거저'로 시작된 새로운 정체성은, 1)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2) 자신들 안에서 넘치는 생명력으로 일어나고, 3) 이것은 감사의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4) 그들은 하나님을 뚜렷히 드러내는 부활에 이르도록 넘치게 됩니다.

  제가 위에 번호 매겼던 것들을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지금 같은 내용을 다른 어휘들을 써서 두 번 썼습니다. 거저로 시작해서, 고난을 만날 때 마다, 다시 일어나며, 그것이 감사한 사람들의 최종 부활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쁨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일 우리의 밖에 있는 사람은 닳아가고 있다면, 오히려 우리의 안에 있는 사람은 (위로부터/다시)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나쁨으로 빠지다"를 개역성경은 "낙심하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장에서 살 소망을 거의 포기했을 정도로 낙심했던 때를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강인한 남자로 여겨선 안되겠습니다. 그는 낙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낙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눈물 흘리셨던 예수처럼 말입니다.
  "낙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쁨으로 빠지지 않는다"입니다.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특정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드는 감정은 오히려 생각보다 정직하기까지 합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생불가능의 지경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은 탄식하나(슬퍼하나), 그 슬픔에 잠식당해 주저 앉게 하지 않으십니다. 겟세마네의 고뇌를 겪을 수는 있으나, 그 고뇌 끝에는 당당히 넘겨지고자 원수의 도래를 응시합니다.

  희랍어 원문은 알라(αλλα)를 써서, '나쁨으로 빠지지 않음'과 대비되는 두 개의 내용을 연결시켰습니다. 하나는 밖 사람(개역개정 "겉사람)이 닳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에 있는 사람(개역개정 "속사람')이 날로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구성적 사고는 히브리인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논의를 잘 따라가고 있다면, 닳아가고 있는 밖에 있는 사람이란, 넘겨져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날로날로 새로워지고 있는 안에 있는 사람이란, 우리 안에 있는 영혼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강해지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즉 이 안 사람과 밖 사람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즉 닳아감과 새로워짐은 동시에 벌어집니다.

  이 "새로워짐"은 디도서 3:5, 골로새서 3:10, 로마서 12:10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어려움의 짧은 순간은 넘어섬을 따라 오는시대의 넘어섬으로 우리에게 영광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들여다보지 않게 하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카이로스를 향해 있지만, 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밑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영광의 무게"를 짊어진 자신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 영광의 무게란, '넘어섬의 연속'이 가져오는 고됨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오는시대로 넘어서고, 다시 또 오는시대로 넘어서는 삶이 갖는 고됨이 곧 영광의 무게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부활로 드러나게 될 위대한 결말입니다. 그 결말에 비한다면,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란 그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상심리가 아니냐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보상심리는 자기과시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뛸듯이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보상심리에 빠졌다고 혀를 차지는 못할 것입니다.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하나님 한 분의 인정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순수한 보상을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보상을 치워버리려는 삶은 매말랐습니다. 그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않기 때문에,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영광의 무게>라는 책에서 C.S.루이스가 한 것인데, 이 제목은 위의 본문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광의 무게를 짊어진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을 무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 볼 때, 보이는 것들 마저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 보이는 사람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내치려고 합니다만,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비현실, 미래, 아름다움, 사랑등)을 추구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란, 곧 지금 허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활의 미래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집니다. 사랑하기 위한 무게. 나처럼 이 사람도 부활하게 될 귀한 사람이라는 무게. 무엇보다도 공명정대하신 하나님 한 분이 뚜렷이 드러나게 될 그 역사의 종국을, 현실로 끊엄없이 소환하는 무게.

  바울은 보이는 것들 모두가 카이로스를 향해 있다고 말합니다. 즉 보이는 모든 것들은 표지판입니다.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이정표가 이 길을 따라가면 무엇이 나오는지 알려주듯이 말입니다. 시인의 아름다운 싯구는 무언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음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는 정의로움을 가리키지 않고는 플롯을 짤 수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카이로스', 즉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침내 나타나게 될 한 점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 한 점이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끝 말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자신을 나타내시는 순간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고 그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과 차가운 거절을 받는 사람이 생겨날 것입니다. 인류가 그 끝을 확인하지 못한 우주보다 더 크신 분께서, 말그대로 보이지 않는 한 분의 심판이 마침내 드러날 것입니다. 카이로스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4:13~18

  그런데 우리는 그 신실함에 속한 그 같은 성령을 갖습니다, 이 기록을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신실했다, 이 때문에 내가 말도 했다."

  우리 역시 신실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말합니다, 다음을 알면서(보면서) 말입니다, 그 주 예수를 일으키신 이가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이며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세우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통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 흘러넘쳤던 '거저'가 넘침들의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에 이르도록 넘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쁨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밖에 있는 사람은 닳아가고 있고, 오히려 우리의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부터/다시)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어려움의 짧은 순간은 넘어섬을 따라 오는시대 넘어섬으로 우리에게 영광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들여다보지 않게 하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카이로스를 위해 있지만, 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밑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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