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4:7~12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갖습니다"가 등장했습니다. 개역개정이 "받다"로, 새번역이 "맡다"로 번역한 이 단어는 본래 "갖다"입니다. 4:1에 등장했던 이 단어는 바울 주장의 핵심입니다. 자신의 자격을 논쟁에 붙이려는 이들에게 "나는 자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자격을 "이 보물"이라 표현합니다. "이 보물"은 앞에서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숨결의 섬김", "새 언약", "메시아의 형상과 함께 하는 인격(양심)", "새 창조의 빛이 속에서부터 비춰짐"을 의미합니다. 즉 "이 보물"과 "갖습니다"는 바울이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표현, 그리고 우리가 오늘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보려는 어휘는 "토기 그릇들"입니다.
"토기 그릇"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수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즉 "이 보물"을 갖고 있는 복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토기 그릇들"입니다. 허름하고 누추한, 뭔가 고급스럽지 않은 이들이라 "토기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이 보물"이 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자격 논쟁의 대답으로 내놓았던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새로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이 자격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 위대한 권리가 기꺼이 사용되는 방식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 잠재력의 넘어섬"입니다.
"잠재력"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희랍어 뒤나미스(δυναμις)입니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액체로 만들어진 폭액이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해 큰 피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불을 붙이기 전에는 그 '잠재력'을 발휘하지 않는 고체 폭약을 만든 노벨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뒤나미스는 잠재력입니다.
"넘어섬"이라고 번역한 말은 '휘페르볼레(`υπερβολη)'입니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심히 큰"으로, 새번역은 "엄청난"으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ESV의 번역이 맘에 듭니다. surpass입니다. surpass는 무언가를 초월, 초과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넘어서는 잠재력일까요? 두려움, 신체의 연약함, 생존욕구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법(法)에 대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할 때, 그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 자격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이것이 '몸 밖 기준'을 의지하던 이들에게 바울이 말하던 바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잠재력의 넘어섬"은 토기 그릇들에게 속하지(belong to) 않았습니다. 이 잠재력의 넘어섬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토기 그릇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속하지 않은 힘이 이들 안에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할 수 있도록 주어진 넘어서는 잠재력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바울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성령의 자격과 실천으로 살아가는 이는 주체적입니다. 수동성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연결 지점이 바로 이 "잠재력의 넘어섬"임을 알게 됩니다. 토기 그릇들에게 넘어섬의 잠재력이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넘어섬의 잠재력이 토기 그릇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 때, 이 넘어섬의 잠재력은 "신께 속함"과 더불어 "인간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새창조의 변화가 신과 인간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지만 짓이겨있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쫓김 당하지만 버림받지 않으며, 아래로 던져지지만 멸망당하지 않으며, 모든 때에 우리는 그 예수의 그 죽으심을 몸에 짊어집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이 우리의 몸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토기 그릇들의 "넘어섬"을 말합니다. 즉 그들에게 주어진 잠재력이 넘어섬으로 발현되던 순간들을 상기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살 소망이 거의 끊어졌다 생각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삶이 다시금 자신에게 "거저" 주어졌다고 말하며,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위의 본문은 같은 내용입니다. 바울은 눌려있지만 이것으로 그의 잠재력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찌할 바 모를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넘어섰습니다. 바울을 위법자라며 추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래로 던져지기까지 했지만,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 그릇으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자신이 받은 숨결, 빛, 형상, 그리고 그것이 보장하는 새창조의 결말을 바라며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면에서 넘어섬의 잠재력을 발현하는 토기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시간을 가리키는 부사를 씁니다. "모든 때에". 즉 그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는 매번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오는시대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종말론적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고생들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몸"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었다고.
몸으로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집니다. 개역성경은 "예수 죽인 것"을 이라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에클레시아를 핍박했던 인물임을 반영하는 번역같네요. 바울은 이제 자신이 핍박하던 에클레시아의 일원으로서, 그 핍박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하자는 유대인들의 살해위협 속에서, 그는 줄곧 어려움을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은, 그 몸을 통해서 새로운 것으로 전환됩니다. 곧 예수의 삶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그 어떠한 어려움도 좌절시킬 수 없는, 그 어떠한 어려움도 막아놓을 수 없는, 그 어떠한 핍박도 무릎꿇릴 수 없는 생명의 일어섬입니다. 그는 넘어섬은 곧 예수의 넘어섬입니다. 그의 몸이 겪는 고생 속에서, 그의 몸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매번 일어났습니다. 그 생명력이 곧 예수의 삶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즉 법과 죽음으로도 강제할 수 없는 생명의 잠재력이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이 예수 죽음 짊어짐과 예수 생명 나타냄을 위해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적 생활이야말로, 전과 달라진 바울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격이요 능력입니다. 몸 밖 자격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잠재력을 실현하고 있는 몸 자체가 자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빛난 얼굴이 아니라, "이 보물"을 담은 "토기그릇들"이어야 합니다.
즉 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면서 예수를 통해 넘겨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 또한 우리의 죽을 살몸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다시 익숙한 시간부사가 보입니다. "늘". 종말론적 시간, 오는시대, 최후의 심판관을 사랑의 아버지로서 소환한 에클레시아의 현실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번역하면서, "죽음을 향해"를 "살면서"에 붙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란 죽음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미셀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죽음'을 도맡아 관리하는 기관인 감옥과 병원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죽음은 변두리로 밀려났지만, 이 죽음마저도 통제하는 기관들은 이상하게도 학교, 군대, 국가를 닮아있습니다. 죽음을 통제하려는 것은 곧 삶을 통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죽음의 문제를 다시 삶의 한복판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성실히 답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그는 십자가 죽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면밀히 조정하셨고, 의미화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삶의 마무리에만 해당하는 질문, 즉 내가 존엄사를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삶 전체를 관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죽음을 이미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을까'에 대한 답변이 곧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인간에게, 바울의 죽는 방식(곧 삶의 방식)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바울은 예수를 통해서 넘겨지는 방식으로 죽음을 향합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이 죽을 몸으로 예수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방식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를 통해서"라는 말은, 어제 살펴봤던 것처럼 새창조를 반영합니다. 예수는 창조의 빛. 그를 통해서 만물이 이미 그 옛날 창조되었고, 지금 바울은 "그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통한 새 창조는 "넘겨짐"으로 시작됩니다. 이 "넘겨짐(παραδιδωμι)"은 예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복음 17:22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0:19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마태복음 26:15,16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태복음 26:48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마태복음 27:2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마태복음 27:26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
예수의 이야기는 '넘겨짐'의 이야기입니다. 이 넘겨짐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넘겨짐이 예수의 삶으로의 진입이고, 새창조의 필연적인 과정이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이미 "우리의 넘겨짐"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어려움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저는 오늘 본문을 "넘겨짐"을 통해서 "넘어섬"이라 하겠습니다. 죽음으로 매순간 넘겨지고, 그럼에도 매번 넘어서는 바울의 삶이야 말로, 십자가와 부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성령, 곧 넘어서게 하는 잠재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자격과 잠재력을, 바울 홀로 특별한 사람이라서 받은 게 아니라, "토기 그릇들"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토기 그릇들에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자는 것이, 법으로서 강제되어선 안되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이러한 삶을 살고 설득할 뿐입니다. 기꺼움으로 하지 않으면, 다시금 법의 한계상황에 속박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번 조심스럽습니다. 강제가 아닌 자발적 넘겨짐. 그것을 통해서만이 예수 생명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 넘겨짐을 통해 넘어섬을 '기꺼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매번 한계 상황을 극복하며 줄기차게 생명을 추구하는 것은, 기꺼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일을 누가 시킬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도 이 일을 법으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기꺼이 하셨을 뿐입니다.
그결과 죽음은 우리 안에서 일하는 반면, 그 삶은 여러분 안에서 일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음과 가까이 사는 삶입니다. 죽음의 그 끔찍한 영향력과 가까운 삶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삶으로 기꺼이 넘겨지려는 것입니까? 예수의 삶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걸 나타내서 무엇 합니까? 그 삶을 관찰하는 사람들, 바로 "여러분" 때문입니다. 예수의 넘치는 생명을 그들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결론을 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넘겨져 그것을 극복하면 극복할 수록, 그 삶은 여러분 안에서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고생합니다.
결국 바울은 먼 길 돌아서 다시 "여러분"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고생도, 모든 극복도, 바로 여러분을 위함입니다. 나의 죽음이 여러분의 삶 될 것을 믿기에, 그리고 이것을 메시아가 보여주셨고, 메시아를 통해서 우리가 그의 생명을 얻었기에, 이렇게 기꺼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 우리의 "죽을 몸"이 바로 이것을 위해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4:7~12
그런데 우리는 이 보물을 토기 그릇들 안에 갖습니다, 이는 이 잠재력의 넘어섬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우리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눌려있지만 짓이겨있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쫓김 당하지만 버림받지 않으며, 아래로 던져지지만 멸망당하지 않으며, 모든 때에 그 예수의 그 죽으심을 몸에 짊어집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이 우리의 몸들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면서 예수를 통해 넘겨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 예수의 삶 또한 우리의 죽을 살몸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결과 죽음은 우리 안에서 일하는 반면, 그 삶은 여러분 안에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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