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후서 4:1~6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섬김을 갖습니다, 우리가 자비얻은 것을 따라 나쁨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끊었다 말하고, 우리는 온갖 속임으로 걷지 않으며,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참의 드러남과 함께 우리를 세웁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쉬네이데시스를 향해서 (말입니다).
"이 때문에(διο)"라는 말은, 바울은 지금까지 이어온 논의의 결론이 될만한 내용을 말할 것이란 점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는 바로 이 섬김을 갖습니다"입니다. 여기서 "이 섬김"이란, 앞에서 언급한 "숨결의 섬김"을 가리킵니다. 즉 새언약의 섬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단어는 "갖습니다"입니다. 고린도후서 3,4장의 문맥이 바울의 자격 논쟁에 대한 바울의 대답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갖습니다"에서 바울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 자격 가졌어!" 즉 바울은 자신이 자격증은 없으나 자격은 가졌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라는 결론적 진술을 이끄는 접속사를 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바울은 이 자격을 '자비'로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자비'라는 말을 바울이 왜 썼을지를 고민해봅시다. 이 '자비'라는 말이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인들에게 어찌 들렸을지도 상상해봅시다. 바울의 사역에 의문을 갖고, 그 사역 정당성에 대한 '자격증'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바울이 지금껏 설명했던 것은 토라의 한계였습니다. 법은 인간성의 문제를 '처벌'할 수는 있지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토라의 한계는, 토라를 어긴 적이 없는 예수를 타락한 인간성의 사람들이 바로 그 토라를 이용해서 죽였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성령으로 대변되는 새 언약이었습니다. 법을 고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인간존재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 이것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자비'로 주어졌습니다.
'법'은 바울이 에클레시아를 상대로 휘둘렀던 채찍이었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는 이들을 '고발'하고, 심지어 스데반이 죽임당한 사건에는 바울도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손엔 법이 있었고, 그 법으로 에클레시아를 핍박하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숨님을 만나 "숨결의 섬김"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자비"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자비를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보는듯한(즉 법에 매여있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자비로 주어진 자격"이 어찌 들렸을까요?
하나님께서 자비로 주신 성령이 법의 화신인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를, 바울은 부정과 긍정의 나열을 통해 상술합니다.
부정 |
긍정 |
나쁨으로 빠지지 않음 |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끊었다 말함 |
온갖 속임으로 걷지 않음, |
참의 드러남과 함께 자신을 세움, |
바울은 자신이 나쁨으로 빠지지 않는다(εκκακεω)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은 "낙심하지 않다"로 번역했습니다. 나쁨으로 빠지기는 커녕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끊었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부끄러움'과 '껍데기'는 처음 타락했던 사람,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비뚤어지자 타인 앞에선 자신이 부끄러웠고, 부끄러웠기 때문에 자신의 수치를 가릴수도 없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을 둘러야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수치를 느끼며,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 '몸 밖에 붙일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 밖에 무언가'가 필요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자신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창조의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또한 온갖 속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말합니다. 그는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에게 자신의 자격을 인정하라고 내세우는데, 그 기준은 "참의 드러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참의 드러남"이 바울의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바울이 했던 주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참의 드러남"이 자신 안에서, 혹은 자신에게서, 혹은 자신이 이 참의 드러남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중입니다. 이 "참의 드러남"과 바울 자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모두 "쉬네이데시스(συνεινδεσις)"가 있습니다. 저는 개역성경이 "양심"이라 번역한 쉬네이데시스를 "형상과 함께"라 번역했습니다(1:12).(이 '형상'의 정체에 대해서 바울은 감추지 않고 4:4에서 밝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쉬네이데시스"라는 긴 수식어에는 바울이 앞에서 다뤘던 내용들이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얼굴'과 '영광'에 대해서 출애굽기 34장을 해설하기도 했고, 형상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3:18). 왜냐하면 이 수식어가 지시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종말론적 삶을 살고 있는 공동체는, 인격 안에 계신 "메시아의 형상"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신"하고 있는 중인 사람들인데,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숨결로 창조되고 있는 바로 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숨결의 자격'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그 복음 마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받은 이들 안에서 가려진 것이며, 그들 안에서 이 현시대의 신이 신실하지 못한 생각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메시아(그이는 하나님의 형상인데)의 영광의 복음의 광휘를 빛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숨결로 시작된 새창조를 섬기는 바울을, 새창조의 공동체가 못알아본다면, 그 못알아보는 사람은 적어도 새창조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법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그래서 숨결을 받지 못한, 다시 말해 새롭게 창조되지 못한, (말 그대로) 못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멸망받음이 분명한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망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멸에 가깝습니다. 토라를 끝까지 밀어붙인 이스라엘의 결말이, 토라를 위반하고 있는 로마에 대한 전면전이었음을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법은 그 법을 어길 가능성을 상정합니다. 즉 'if not' 없이는 법조문 구성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if not 상황의 가능성'은 불안을 떨쳐내기는 커녕, 불안을 유지 보존하고, 오히려 법은 'if not 상황'에 대한 인간의 불안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 불안 속에서 누군가를 끝없이 법에 의해 판단합니다. 그 판단은 배제를 낳습니다. 배제하는 사람과 배제당한 사람이 충돌합니다. 부정문으로 구성한 법에만 의존했다간 이런 파국이 닥치게 됩니다. 분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법 때문에 분열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중에는, 그 법의 목적인 '온전한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유대도 로마도 서로의 법을 주장했습니다. A.D.1세기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5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본문의 "현시대의 신"는 본래 "현시대의 하나님"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바울의 용례는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고,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실하지 못한 생각들을 모르고서 저지르게 만듭니다. 신실함에 대해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령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맹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쉬네이데시스를 가졌을리 없습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메시아가 드러낸 새창조의 영광과 무관합니다. 그를 통해서는 처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살림의 숨결로 다스리시는 새로운 지배자의 소식이 들려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 예수를 주로 선언하는 반면, 우리 자신들은 예수를 통해 여러분의 종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어둠들로부터 빛이 빛추리라"고 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온들 속에 빛을 발하셨습니다, 메시아 얼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깨달음의 빛을 향하여.
왜냐하면 그들은 이 새로운 지배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지배자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선언'이라 번역한 말은 케뤼쏘(κηρύσσω)로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아 예수께서 승천으로 왕위에 오르신 이후, 바울일행은 줄곧 메시아 예수, 곧 참된 왕의 소식을 전달해왔습니다.
왕께서 그 전령들을 통해 알리시는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바울일행이 "여러분의 종들"이라는 소식입니다. 이 "종들"은 "예수를 통하여" 된 종들입니다. 곧 바울 자신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은 창세기 1:3을 가져와서, 그 "종됨"을 설명합니다.
창세기 1:3, 새번역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의 빛은 태양이 아닙니다. 태양은 14절에 가서야 달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럼 이 창세기 1:3의 빛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창세기 1장에 대한 에클레시아의 이해를 요한복음 1장으로 기술해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8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숨 계시길 하나님 향해,
그리고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이.
그이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이를 통해 지은 바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도 그이 없이 된 것이 없다.
그이 안에 삶이 있었으니 이 삶이 사람들의 빛,
이 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고, 어둠은 그 빛을 감당 못했다.
요한은 태초에 있던 말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하나님 자신인 그 말씀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곧 빛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어둠을 압도하고 만물을 창조해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를 통해서"는 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가 창세기 1:3의 빛입니다. 즉 창조의 빛 예수는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했고, 존재하게 되었지만 타락한 만물 위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새창조인 하나님이신 예수를 통해서 바울은 에클레시아의 종으로 새로이 지음받았습니다. 자신의 자격을 설명하기 위한 본문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기 1:3을 인용하면서, 다소 구절을 수정합니다.
"어둠들로부터 빛이 빛추리라"
창세기 1:3에는 "~로부터"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의도적 수정에는 그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어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둠인 자신에게서 빛이 창조되었고, 비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인 자신이 빛으로 새로이 창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혹은 "거저"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것은 바울 한 사람에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숨결의 섬김"을 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시작된 새창조였습니다. 어떤 자격증도 대신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 새창조의 빛은, 모세의 빛과는 달리, 바울의 가온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을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빛이 바울일행의 인식과 실천을 바꿔가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바울일행의 가온에서 보이지 않게 빛나고 있는 그 빛은 그의 인식과 실천을 지나 밖으로 뻗어나갑니다. 그 빛을 코린토스 에클레시아는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같은 빛이 그들 안에서도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숨결받은 각자 안에서 방사되는 빛은 서로 안에서 메시아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빛 아래서 함께 깨닫게 되기를.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 "메시아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깨닫는 빛을, 바울의 가온에서 비추는 빛과 같은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ESV는 이 두 빛을 of로 연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빛이 각자에게서 빛나는 빛이면서도, 서로를 연결해주는 빛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새창조 언급은, 바울이 누구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코린토스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각자에게서 시작된 새창조는, 결국 메시아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깨닫도록 뻗어나갈 것이고, 공동체를 비추는 그 빛의 방사 속에서 어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고든 피는 προς를 '목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가온 속 빛나는 빛이, 메시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4:1~6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섬김을 갖습니다, 우리가 자비얻은 것을 따라 나쁨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부끄러움의 껍데기를 끊었다 말하고, 우리는 온갖 속임으로 걷지 않으며,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참의 드러남과 함께 우리를 세웁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쉬네이데시스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그 복음 마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받은 이들 안에서 가려진 것이며, 그들 안에서 이 현시대의 신이 신실하지 못한 생각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메시아(그이는 하나님의 형상인데)의 영광의 복음의 광휘를 빛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 예수를 주로 선언하는 반면, 우리 자신들은 예수를 통해 여러분의 종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어둠들로부터 빛이 빛추리라"고 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온들 속에 빛을 발하셨습니다, 메시아 얼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깨달음의 빛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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