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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5:8~14
여러분 술취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일으키십시오! 여러분의 소송상대인 고발자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걷고 있습니다. 그에게 여러분은 강하게 그 신실함으로 맞서십시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 코스모스 안에 있는 겪음들의 같은 것들이 여러분의 형제들에게도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본문. "술취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접적인 뜻을 가진 동사가, 개역성경에서는 "근신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네포νήφω는 술취함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동사다.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술취하지 않은 결과로서 파생된 뜻이다.
"생각을 일으키다"는 '그레고레우오γρηγορεύω'라는 동사가 '에게이로εγειρω'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번역했다. "생각을 일으킨다"는 추상적 생각을 구체화한다는 말이요, 누워있는 2차원의 글자들을 3차원의 삶으로 재현한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두 가지 명령을 거절하면 어찌 되는가? 즉 술 취해있고, 생각은 누워있다면 말이다. 본문의 '고발자'는 사탄이다. 사탄과 에클레시아는 모든 상황 속에서 신적 법정 앞에 서있고, 사탄과 에클레시아는 서로를 고발한다. 사탄은 에클레시아의 죄악을 하나님께 아뢰고, 에클레시아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간구한다.(요한계시록 8장) 그러나 메시아 예수의 승천이후 전세는 역전되었다. 사탄은 하늘의 자리를 박탈당했고, 그 자리엔 대언자가 계시다. 더 이상 하나님은 사탄의 말에 귀 기울이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 이후 누군가 사탄에게 삼켜진다면 그 말의 의미는 그가 하늘의 상황을 전혀 모른채 공중에 갇혀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최초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지만 그 죄책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죄책감을 잊을 수 있는데, 그러한 선택은 더욱 그의 인격을 뒤틀리게 만들 것이다. 즉 점차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을 단절시키는 공중은 그러한 인격을 만들어낸다. 아니, '만들어낸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인격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인류는 하나님을 내버렸고, 그 결과 사탄도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1 전성은 선생이 말하듯, 사랑과 무관한 것을 뭉뚱그려 인격이라 가르치는 현대교육은 하나님도 모르고 사탄도 모른다. 현대인은 '자신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데에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랑없음'은 그 문제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늘 선택사항으로 치부된다. 현저한 실명.
예수는 시각 장애인의 눈에 흙을 발라 새창조를 예고하셨다. 지체 장애인에게는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베드로의 명령 앞에서 이런 의문을 갖는다.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의심과 무기력에 강하게 맞서라고 말한다. 바로 그 신실함, 메시아 예수가 삶 속에서 만들어나갔던 바로 그 신실함으로. 그리고 나는 그 신실함으로 맞서 나감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베드로전서의 끝에서 발견했다. "이 코스모스 안에 있는 겪음들의 같은 것들이 여러분의 형제들에게도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같은 것을 겪는 누군가. 사랑할 수 없다는 데에 괴로워하는 이가 있는가? 사랑해야겠다는 결의에 수도 없이 스스로를 배신했던 비겁자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말해야 한다. 그떄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같은 것을 겪어나가고 있고, 함께 생각을 일으켜야 하는 에클레시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이미 집어 삼켜있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문제에 빠져있는 현저한 실명의 상태로.
그런데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여러분을 메시아 안에 있는 그의 오는시대의 뚜렷속으로 부르신 분은,
잠깐적게 (고난) 겪은 이들을 직접 고치실 것입니다, 굳건히 서게하실 것입니다, 힘있게 하실 것입니다, 기초 위에 두실 것입니다. 그이에게 강력이 시대들의 시대들에 이르도록, 아멘.
베드로는 접속사 '데δε'를 써서 사람과 다른, 그러나 사람을 도우시는 한 분에 대한 문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미 2000년전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메시아 안에 있는, 그의 오는시대의 뚜렷 속으로".
"메시아 안"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어휘가 아니다. 구약은 이 "메시아 안"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지도 모른다. 성막에서 시작해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성전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었고, 따라서 "메시아 안"은 곧 성전 내부의 다채로운 그림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성전 내부를 상상해보라. 하나님의 숨결로 가득하며, 그 숨결로 가득한 안에는 하나님의 일곱 금촛대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기름으로 태운 빛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성전 자체는 옴팔로스(Omphalos). 대지 위의 배꼽, 곧 지구의 중심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독보적인 성격. 세상이 겪는 괴로움에 대해서 평안을 주려는 목적. 부처가 태어나면서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은, 어느 특정 개인의 몫이 아니라 기실 메시아 안에 사는 공동체 삶의 모습에 부합한다. 하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이 전대미문의 공동체를 통해, 평화를 창조해가실 것이다. 그 과정으로서의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을 겪는 이들을 1) 직접 고쳐가시며, 2) 굳건히 서게 하시고, 3) 힘있게 하시고, 4) 기초 위에 두실 것이다. 이 네 개의 미래형 문장들은 성전 공동체를 통해 새창조를 구현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명과도 같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회복이 거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공동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 즉 망가져있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으며, 힘 빠지고, 기초적인 부분이 흔들리는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어려움을 '잠깐'으로 역전시키는 것이 '강력'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미 이 '강력'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베드로전서 3:17
왜냐하면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의도하신다면,
좋음 만드는 이들이 겪는 것이, 열악함 만드는 이들이 겪는 것보다.
베드로전서 4:11
모든 것 안에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뚜렷해지시기 위함입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는 그 뚜렷과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는
강력(크라토스)이 있습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력의 손 아래 낮추십시오,
여러분들을 카이로스 때에 들어올리시기 위함입니다,
메시아는 정말 '강력'한가? 강력하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이와 동일한 신실함으로 사탄과 맞서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맥 빠진 공동체의 상황을 잠깐으로 일축시킬 수 있기 떄문일 것이다.
실루아노(내가 판단하기에 신실한 형제인)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내가 얼른 썼습니다, 숨님처럼 말하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참 거저임을 증언했습니다. 이 (참 거저) 속으로 들어 서십시오.
실루아노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단 접속사 δια는 실루아노가 '대필자'인지, '전달자'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웨인 그루뎀은 "내가 판단하기에 신실한 형제인"이라는 말이 전달자에게 붙는 수식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실루아노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파트너였던 '실라'인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된 '실루아노'인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얼른 썼습니다"라는 말은 베드로전서가 짧은 시간에 긴박한 문제 앞에서 쓰인 서신서임을 짐작하게 한다. 더불어 이 금세 쓴 글이 가진 길이나 구성에 대해 찬탄하게 된다. 아마도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내가 얼른 썼습니다"와 비슷한 표현이, 히브리서에 등장한다.
히브리서 13:22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이 권면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짤막하게 썼습니다.
13장에 이르는 편지가 짤막하게라니.
베드로는 숨님처럼 말하고, 증언했다. 전자는 실천적인 측면이고, 후자는 인지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 같다. 즉 '증언'의 기능은 정보를 제공해서 새로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고, '권면(숨님처럼 말하기)'은 그 생각을 따라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기능을 갖는다.
베드로가 증언한 내용은 이 베드로전서의 내용이 "참 거저"라는 사실이다. 즉 대가와 인과관계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고대보다 자본으로 촘촘하게 짜인 오늘날이 더욱 심하지 않을까, 오늘날 정말로 '거저'가 있는가?) 참으로 거저 주어진 것과 그것을 가지고 사는 삶(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는시대의 먹거리를 위해 일"하는 삶)이 베드로전서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전치사 εις를 쓰며, 그 삶 안으로 "들어서라" 권면한다.
바벨론에 있는 선택된 것과 내 아들 마가가 여러분을 문안합니다. 여러분은 서로서로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십시오.
바벨론은 요한의 용례를 따라, 로마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바벨론은 솔로몬 성전을 무너뜨린 이방제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시기를, 성전을 무너뜨린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로마의 점령지 전역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들(1:1)이고, 적대적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베드로전서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다. 에클레시아 바깥과의 관계.
베드로는 적절하게 그들을 '바벨론'으로 부르는 것 같다. 아마 신약의 저자들은 메시아를 통해 예레메야를 새롭게 읽게 되었고, 그 읽기을 통해 현실을 조망했는지도 모르겠다. 바울의 <로마서> 9장에서는 예레미야의 토기장이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고,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 언표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말미에, 자신의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바벨론'을 사용했다.
신천지에서는 개신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바벨론을 쓴다. 근거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해석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어휘를 통해 현실을 읽으려는 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아닐까? 오늘 우리는 바벨론이란 단어를 현실의 무엇에 갖다 놓아야 하는가? 피조세계에 적절한 이름을 붙일 권한이 아담에게 주어졌다.
"선택된 것"은 로마 안에서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소규모 모임을 지칭한다. 그러나 바울과 달리 베드로는 '에클레시아(부름받은 이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단어가 아직까지는 베드로에게까지 통용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바벨론에서 선택된 것"이라 말할 뿐이다. 이 짧은 어구에 출애굽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하라. 그리고 "것"은 우리말로는 표현되지 않지만, 여성이다. 공동체가 여성명사를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이야기들의 반영이 느껴진다. 이사야 54장의 맟미내 해산을 하게 된 여자, 성경 내러티브에 나오는 불임 여성들. 마침내 시작된 종말론적 출산.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서의 공동체.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여자.
마가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에게 거절당한 "마가라 불리는 요한"이다.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말한 것을 이 마가 요한이 대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디모데후서 4:9~11에서는 마가와 바울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함께 메시아 안에 들어온 이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평화가 여러분 각각에게 메시아 안에서.
평화는 싸움없음의 소극적 상태 뿐만 아니라 서로 거룩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아우른다. 그러나 나 같았으면,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메시아 안에서"라고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는 "각각에게"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왜 각각인가?
만일 "모두에게"라고 썼다면, 이는 동어반복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적 속성은 "메시아 안에서"라는 말로 충분히 표현되기 떄문에. 2000년전 신약성경에는 보편과 개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다. 개별로 치우쳐 파편회되는 개체주의나, 보편으로 치우쳐 개별성이 말살되는 현상은 현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난립하는 철학학파들이나 메시아 운동들을 통해서, 혹은 로마 황제의 통치와 팍스 로마나의 거짓 보편 속에서 이런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은사에 관한 바울의 본문(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도 보편과 개별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지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균형을 잡는다. 각각이 있어야 메시아라는 공통성도 있다. 반대로 메시아 안에서만이 개인은 참다운 개인이 된다. 이처럼 신약 저자들이 자신들의 저술 면면에 새겨놓은 보편과 개별의 조화, 여럿과 하나의 조화는 이후 300여년이 지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으로 자리를 잡는다.
- "200년 전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로 과감한 이동한 이동을 했을 때, 때로 사회무대에서 하나님이나 공적 종교를 과감하게 버리는 일도 일어났다.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두 세기 동안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그에 따른 위험은, 하나님을 제거하니 마귀 역시 제거하게 되었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친구나 정당이나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역할을 떠맡는 한편, 우리의 적들이 마귀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모두를 위한 공동서신>, 톰라이트, p. 141 [본문으로]</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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