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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의 시간표를 생각해봅시다. 성경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누구나 그 시간을 전제하고 개별 본문을 들여다봅니다. 예컨데 '신천지'라는 이단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신천지인은 자신들만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 시간표에 입각해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이 시간표가 틀렸다는 인식을 하지 않고서는 개별 본문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소 귀에 경읽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성경의 저자이기도 한 베드로의 시간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만의 시간표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 사유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어떠한 시간관을 가지고 성경을 썼는지를 아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베드로는 예언자들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모세와 엘리야"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모세는 토라(창세기~계시록)의 대표요, 엘리야는 예언서들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 구약의 예언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목해봅시다.

 

 

베드로전서 1:10-21

  이 구원에 관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실히 연구하고 살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향한 이 거저에 관하여 예언했고, 누구인지 혹은 어느 때인지를 말했습니다, 그것들은 예언자들 안에 계신 메시아의 숨결이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었는데, (그 숨님은) 미리 증거하셨습니다, 메시아를 향한 그 고난들과 이 일들 이후의 뚜렷함들을. 그리고 그들(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것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늘로부터 보내진 거룩한 숨결 안에 있는 복음전달자들'을 통해서 알려진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향해서 천사들도 곁에서 들여다보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9에서 말했던 구원에 관해,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실히 연구하고 살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은 신적 계시를 황홀경 속에서 받아적은 결과물이 아닙니다. 성실한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인간 예언자들의 연구 논문이었다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연구 안에 성령이 계셨기 떄문입니다. 즉 메시아의 숨결이, 그 예언자들의 연구를 통해 어떠한 내용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하위 질문이 따라옵니다.

 

1)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2) 어느 때에 받을 것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로서 "메시아를 향한 고난들과 이 일들 이후의 뚜렷함들을"이 주어집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시간표에서 핵심이 되는 사건은 "메시아를 향한 고난들"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들 이후에 "뚜렷함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을, 이 내용을 예언하고 있는 구약의 예언자들 마저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메시아 고난 이후 나타날 구원이 예언자들 자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그들 이후에 나타날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들은 미래에 나타날 그들을 위해 지금 섬기고 있다는 것. 즉 구약의 예언서들의 초점은, 메시아의 고난 이후에 나타날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고난 이후에도 2000년간 실패의 역사만을 겪다가,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이 태동하고나서야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하는 신천지와는 전혀 다른 시간표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하는 (그 예언들이 그들의 연구 안에서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된) 그 구원받는 사람들은 다른 아닌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수신자들이 구원받는 때가, 바로 예언자들이 말하던 바로 '그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 베드로를 만나서, 예언자들이 연구했던 저 구원에 과한 두 가지 하위 질문에 대해서 묻는다면, 베드로는 단번에 답할 것입니다.

 

1)

Q. 베드로씨, 베드로전서에서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란 질문은 누구를 염두하고 하신 건가요?

A. "지금 메시아를 따르고 있는 난민 공동체, 곧 에클레시아입니다."

 

2)

Q. 그럼 "어느 때"는 대체 언제입니까?

A. "메시아의 고난 이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들(위 번역에서는 "뚜렷함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 질문을 더해봅시다.

 

3)

Q. 베드로씨,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영광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A.

 

  베드로가 무엇이라 답할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남은 내용들을 읽어가며 확인해봅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속한 사고의 끈을 단단히 맨 여러분은, 맨정신으로, 텔로스에 걸맞게, 메시아 예수의 계시 안에서 여러분에게 전달된 바로 그 은혜를 소망하십시오. 잘 듣는 아이들로서, 이전에 여러분이 알지 못했을 때의 열망의 껍데기를 닮지말고, 오히려 여러분을 거룩으로 부르신 이를 따라 모든 생활방식에 거룩한 이가 되세요, 왜냐하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본문이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는 논증 이후, 이제 실천으로 옮겨야할 내용들을 직접적으로 말하려고 할 때 쓰이는 접속사입니다. 그리고 위 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이미 여러분은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메시아의 고난 이후에 나타날 영광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1) 먼저는 "여러분에게 속한 사고의 끈을 단단히 맬 것, 맨정신으로" 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마음을 동이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 '마음'이라 번역된 단어는 디아노이아(διανοια)입니다. 지성, 이해, 사고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앞에 "여러분에게 속한"이란 말이 붙은 것으로 보아, 에클레시아만이 할 수 있는 특정한 사고방식이 있었으리라 예상이 됩니다.

  "단단히 맨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입던 겉옷의 허리띠를 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달리기를 하기 전에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듯, 유대인들도 무언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겉옷이 펄럭거리지 않도록 허리띠를 단단히 매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이렇듯, 에클레시아에게 걸맞는 생각을 꼭꼭 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맨정신으로"라는 부사는(개역성경에선 "근신하여"), "술취하지 않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정신으로"라고 번역해봤습니다. 첫번째 권면과도 잘 어울리는 부사입니다.

 

2) 그리고 "텔로스에 걸맞게 소망하십시오, 메시아 예수 드러나심 안에 있는 거저를 여러분에게 가져오고 있음을." 입니다.

  텔로스는 '끝', '목적', '이룸'의 의미가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 "되었다. 나는 ㄱ이고 ㅎ이다, 아르케이고 텔로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텔로스라는 단어는 베드로전서에서도 앞에 이미 나왔습니다. "여러분 (가진) 신실함의 텔로스, 곧 삶이 출애굽될 것입니다."(1:9) 텔로스에 걸맞게 바란다는 말은,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즉 그들은 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걸맞는 바람은 단순히 바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미래에 대한 바람은 구체적인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 드러나심이 곧 텔로스일텐데, 그날에 있을 '거저'가 지금 이 사람들에게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소망'은 이뤄질 미래로부터 힘을 얻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 '거저'는 희년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들은 약속을 받았으나, 아직 땅을 상속받지는 못한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희년이 선언되어 자유가 선언되었으나, 아직 땅을 받지 못한 상속자와 같습니다. 이들에게 메시아 예수 드러나시는 그 텔로스의 날에 '거저'가 이뤄질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속.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그에 걸맞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주는 두 번째 권면입니다.

 

3) 마지막으로, "잘 듣는 아이들로서, 이전에 여러분이 알지 못했을 때의 열망의 껍데기를 닮지말고, 오히려 여러분을 거룩으로 부르신 이를 따라 모든 생활방식에 거룩한 이가 되세요"가 세번째 권면으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잘 듣는'이 '순종'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 무비판적인 복종이 아닌, 인지과정을 포함한 능동적인 따름입니다. 생각은 설득되었고, 몸은 충성을 다하는 상태입니다. 앞에서 첫번째, 두번째 권면이 사고와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 실천에 해당하는 권면이 주어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했을 때"는, 이들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아니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즉 열망의 껍데기를 닮았을 때입니다. 여기서 '열망'은 "~를 향해 콧김을 내뿜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느 한 가지에 붙들려있는 육체적 욕망을 뜻합니다. "껍데기를 닮지 말고"라는 말은 로마서에도 등장하는데,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라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도 바울고 어떠한 틀(스케마)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틀은 에클레시아가 아니었을 때, 욕망대로 살던 생활방식의 틀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하자면 "현시대의 틀(로마서 12:2)"입니다. 이 틀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말라는 말입니다. 단순히 고매한 삶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고, 49일만에 당도한 시내산에서 이들에게 '거룩'을 명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 이후 출애굽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거룩을 명하셨습니다.(이것 때문에 이들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출애굽한 이들이 닮아가야 할 성품입니다. '거룩'은 "구별된, 분리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경계를 만들라는 말이 아닌, "구별된 생활방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입니다.

 

  제가 '생활방식'으로 번역한 말은 아나스트로페(αναστροφη)인데, 이 말은 아나(ανα)와 스트로페(στροφη)로 파자할 수 있습니다. 아나는 '위로부터', '다시'라는 의미고, 스트로페는 '돌다'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갈림길을 만났을 때, 위로부터의 기준, 혹은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갖게 된 기준에 따라 몸을 틀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방식입니다. 거룩을 명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합한 생황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각각 지(知), 정(情), 의(意)에 관련된 권면을 하고서, 그 정당성을 구약성경에서 찾습니다. 다음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도, 사도의 구약읽기 방식을 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이들이 되어라,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구절은 <레위기>에 등장합니다. 11:44.45, 19:2, 20:7,26에 나옵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레위기>일까요? 레위기는 토라를 구성하는 다섯권의 책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이른 광야백성에게 주어진 생활방식에 관련된 책입닌다. 단단히 붙들어 맨 사고, 끝에 걸맞는 바람, 거룩한 생활방식에 관한 얘기를 한 베드로는, (그 사고의 흐름에 따라) 출애굽 이후 새로운 생활방식을 수여받는 광야 공동체의 그림을 에클레시아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이 마치 너희를 위한 책이라고 말하는듯. 왜냐하면 메시아 고난 이후에는, 에클레시아가 "확장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로만 구성되었던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메시아 고난이후, 다민족 공동체로 확장되었고, 믿기만 한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성원은 달라졌지만(민족적 제한이 없어졌지만), 그 역할은 동일합니다. '제사장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온 땅에 흘려보낼, 세계 대표로서 부름받은 것입니다. 레위기는 바로 그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 레위기 중 한 구절을 보면,

 

레위기 11:43~46

너희는, 기어 다니는 어떤 길짐승에든 닿아, 너희 자신을 꺼려야 할 사람이 되게 하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런 것으로 자신을 더럽혀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너희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여라.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몸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땅에 기어 다니는 어떤 길짐승 때문에, 너희가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은, 짐승과 새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고기 떼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것에 관한 규례다.

 

  베드로가 인용한 앞 뒤 문맥을 살펴봅시다. 레위기 11장이 말하는 거룩(구별됨)의 의미는 우리에게 낯섭니다. 이 맥락에서의 거룩은 "길짐승, 새, 고기 떼, 기어다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습니다.

 

  충격적인 변용입니다. 베드로는 레위기에서의 '길짐승'을 '열망의 껍데기를 닮는 것'으로 읽고 있습니다. 광야로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것이 길짐승이었다면, 메시아의 십자가 이후 생겨난 에클레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생활방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 공동체에게 '길짐승들로부터의 거룩'을 요구하셨다면, 이제는 에클레시아에게 '열망의 껍데기를 따르는 생활방식으로부터의 거룩'을 요구하신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구약 읽기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에 관한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유대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먹지 못할 음식들이 담긴 꾸러미를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에클레시아의 일원이면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그 환상은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별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토라에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음식의 목록이 차별을 위함이 아니라, 거룩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입니다. 다만 그들은 함께 더 큰 차원의 구별을 실천합니다. 바로 생활방식의 구별입니다. 이것이 곧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주변은 언제나 더러웠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그 더러움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러운 현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이 땅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제사장 나라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아빠 이름 깨끗을 위해). 난민 상황을 통해 에클레시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바로 이 새로운 삶의 목적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각자의 일에 따라 판단하시는 차별없으신(통으로 보시는) 분을 '아빠'라 부르고 있다면, 그 체류의 크로노스(현시대)를 두려움으로 생활하십시오, 

 

  이제 사고의 끈을 분명히 해봅시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아빠'는 어떤 아빠입니까? '아빠'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는 아빠는 "각자의 일에 따라 판단하시는 차별없으신 분"으로서 아빠입니다. 즉 공평무사한 아빠입니다. 아빠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친밀함의 이미지와 공평하게 판단하는 재판관의 이미지를 겹쳐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빠와 친밀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각자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 역도 참입니다. 각자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빠와 친밀해야 합니다. 올바른 생활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빙그레 웃어주시는 아빠는 없습니다. 올바른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이에게 차가운 표정으로 반응하지 않는 아빠도 없습니다. 우리의 아빠는 정서적 친밀함과 공정한 판단 모두가 우리 아빠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분을 '아빠'라 부르는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빠'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다시 두려움에 빠지는 종의 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 되는 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숨결로 부르짖습니다, 아빠 아버지!"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생활방식에 빠져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잘못된 생활방식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이때 '돌아서다'는 말도 아나스트로페와 동족어입니다. 위로부터의 기준에 따라 올바른 생활방식으로 몸을 돌려야 합니다.

 

  그 위로부터의 기준에 대해서 베드로가 상술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여러분은 사멸할 은이나 금으로 풀려났던 게 아니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건내받은 여러분 생활방식의 쓸모없음으로부터, 오히려 점도 흠도 없는 어린양 메시아로서 가치있는 피로 (풀려났습니다),

 

  여기서 '풀려나다'라는 말은 노예 시장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노예에게 적정 금액을 치르고, 마침내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풀려났을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에클레시아가 거룩으로 부름받기 위해 치뤘던 금액(속전)에 대해서 말합니다. 금과 은으로 치를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양 메시아의 피를 주어야만 했던, 그렇게만 얻을 수 있었던 자유요 새 길이었습니다.

  메시아의 피로 값을 치르기 전에, 이들을 붙잡고 있었던 주인은 바로 "조상으로부터 건내받은 여러분 생활방식의 쓸모없음"이었습니다.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내려왔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이, 그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던 막강한 주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업(karma)'이라 불러도 좋고,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길 수 없었던 생활방식이 이들을 옥죄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가치있는(τιμη) 피"는 올바른 생활방식으로 이들을 출애굽시켰습니다. 메시아의 피가 아니고서야 거룩을 알 수 없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집트는 뒤돌아보지 말고, 줄곧 이 길을 줄곧 가야합니다. 그 출애굽을 위한 피가 가치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들은 그 가치있는 피가 열어준 길로 곧장 가야 합니다. 그 길은 거룩의 길, 생활방식을 온전하게 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이 땅에 구현하는 길입니다. 제사장 나라의 길입니다.

 

  베드로는 "어린 양 메시아"를 언급하자, 그 분에 대한 설명을 또 이어갑니다.

 

(그 메시아는) 한편으로는 창조세계의 기초를 넘어 알려지셨고(하나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크로노스의 끝에 여러분을 통해 드러나셨습니다. (그 여러분은 이렇듯) 그이를 통해 하나님께로 신실한 여러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그이를 죽은자들로부터 일으키셨고 그이에게 뚜렷을 주셨으며, 그 결과 여러분의 신실함과 소망이 하나님께로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아는 창조세계를 초월하십니다. 즉 창조세계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는 계셨으며(요한계시록 13:8, 17:8), 현시대의 끝에 에클레시아를 통해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여러분을 통해 드러나셨습니다"는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예수는 승천하셨지만, 이 땅에는 그를 따르는 에클레시아를 통해, 메시아는 여전히 이 땅에 계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다스리는 현시대의 끝자락에 에클레시아가 메시아의 현현으로서 있습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시작을 넘어선 시작이, 마침내 끝에 드러나셨음을 보여주는 방식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논의를 일단락 짓습니다. "이렇듯 그이를 통해 하나님께로 신실한 여러분입니다." 즉 에클레시아가 보여주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은 창조된 우주 전체를 관통합니다. 오히려 우주보다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 신실함의 '기원'에 대해서 창조세계를 말했다면, 그 신실함의 '지금 나타남'에 대해서 베드로는 부활을 말합니다. 에클레시아가 신실할 수 있는 것은, 즉 거룩한 생활방식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부활이라는 등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자들로 가득한 망망대해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뚜렷을 주시어 그 망망대해를 비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실함의 대상이자, 신실함의 모범이신 한 분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에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메시아의 고난들 이후 나타난 첫번째 영광, 그가 바로 예수였고, 나중 영광들로서 에클레시아는 메시아 예수를 따릅니다. 거룩한 생활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1. 1) 창세기 시대, 2) 율법 시대, 3) 사사 시대, 4) 왕권 시대, 5) 선지 시대, 6) 하늘복음 시대, 7) 서신 시대, 8) 계시록 완성 시대로 구분한다. 이로써 8)에 해당하는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경 구절들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되고, 교주의 계시록 해석에 비추어 나머지 성경들을 읽게 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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