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늘 그렇듯 저 개인의 번역과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연구를 진행합니다. 스캇 맥나이트의 <NIV 적용주석 베드로전서>와 웨인 그루뎀의 <틴테일 주석 베드로전서>, 톰 라이트의 <에브리원 주석 공동번역>을 곁들여 봤습니다.
톰 라이트의 <에브리원 주석 공동서신>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연재하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1-9 진실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
베드로전서 1:10-21 은혜로 해방되다
베드로전서 1:22-2:3 갓난아기
베드로전서 2:4-10 살아 있는 돌
베드로전서 2:11-17 이방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
베드로전서 2:18-25 메시아가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
베드로전서 3:1-7 결혼과 그 도전
베드로전서 3:8-16 새로운 생명의 길
베드로전서 3:17-22 의로운 일을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 4:1-11 변화된 삶
베드로전서 4:12-19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라
베드로전서 5:1-7 겸손한 목자
베드로전서 5:8-14 하나님의 능력으로 굳게 서라
베드로전서 1:1~9
메시아 예수의 보냄받은 이, 나 베드로가, 폰토스, 갈라티아, 캎파도키아, 아시아 그리고 비뛰니아의 부름받아 체류자된 디아스포라들에게 편지씁니다.
신약의 편지글들이 그렇듯 맨처음에는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낸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메시아 예수의 보냄받은 이, 나 베드로"라고 소개합니다. "보냄받은 이"는 '사도'로 번역되는데 예수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과 달리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의심받은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저 "메시아 예수의 보냄받은 이"에서 '의'라는 글자 하나가 보여주는 친밀함을, 사복음서가 증언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무식한 제자로 알려져있지만, 베드로전서는 무식한 사람이 우직하게 쓴 편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복음서에서 비춰지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인데, 사실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오해한 것은 유대 사회 전체의
오해라 봐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그는 배를 가진 선주, 그 배의 리더,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의 희랍어는 다양한 표현방식들이 포진되어 있는 장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이 땅에 출범한
에클레시아를 30년 가량 성실히 섬긴 그입니다. 에클레시아를 잘 목양한 지도자로서, 그의 사상과 경험을 녹여 쓴 편지가
베드로전서입니다.
이번엔 받는 사람을 확인해봅시다. 여러 지역들이 명시되는데, 이는 베드로전서가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회람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일곱 에클레시아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지역에서 읽혔습니다. 아래의 지도를 봅시다.
오른 쪽 위 바다가 흑해입니다. 그 아래 지역이 폰투스(Pontus, 개역성경에서는 '본도')입니다. 학자들은 베드로전서 서두에 언급된 지역들이 회람 순서에 따른 순서라고 합니다. 웨인 그루뎀의 묘사를 따라서 베드로전서 회람 순서를 상상해봅시다.
"전달자는 폰투스의 한 항구에 상륙하여, 갈라티아로 여행하고, 젤라를 통해 캎파도키아에 있는 카이사랴로 가고, 그후에 칼라티아 남부를 횡당하는 큰 무역로 상으로 서쪽으로 향하여 가서, 아시아에 있는 라오디케아로, 그 다음엔 아무도 아시아의 교회들(골로새? 에베소?)로 가고 마지막으로 비뛰니아의 주요교회들(니케아, 니코메디아, 칼케돈)을 통과해서 갔을 것이다. 그는 칼케돈으로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비잔티움까지 로마로 직행하여 돌아보는 배를 타고 소아시아에 있던 기독교의 영향력이 미치던 모든 주요 장소들을 방문했을 것이다." 1
베드로는 위에 언급한 지역들에 살고 있는 "택하심을 받은 흩어진 체류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들은 로마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임시 거주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지배 아래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기 땅을 뒤로 하고 남의 나라에서 아무런 제도적인 보호 없이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저는 요즘 자주 들리는 한 단어가 생각납니다. '난민'입니다. 이것을 은유적으로 이해해서 오늘날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은 이 텍스트가 기록된 당대 역사의 맥락을 누락시킨 해석이 됩니다. 당대 로마의 지배 아래서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이들에게 1차적으로 주목해야 합니다.
이 글을 썼던 8월 29일은 공교롭게도 '경술국치'였습니다. 유대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은 로마의 침략으로 A.D.72년에 지도에서 지워저버렸습니다"라는 표현을 저는 자주 썼었는데, 저 지도에서 지워진 역사가 실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조선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진 날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맞서든지 피하든지간에 무수한 난민들이 해외 각지로 퍼져나갑니다. 이 조국을 잃고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베드로전서 저작시기인 A.D.1에는 저 지도 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고향을 뒤로 하고 난민으로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난민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고, 난민 공동체 안에서 에클레시아가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회람서신의 수신자들이 난민이기 이전에 또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빠의 초지(超知)를 따라,
거룩한 숨결 안에서,
잘들음과 메시아 예수의 피 뿌려짐 속으로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지중해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난민들이 메시아 예수를 받아들이고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을 것이 분명하고, 언제 국가에서 강제 추방이 집행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들을 무엇이라 지칭하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빠의 초지(超知)를 따라,
거룩한 숨결 안에서,
잘들음과 메시아 예수의 피 뿌려짐으로(eis)
(있습니다).
이 '따라(ek)', '안에서(en)', '으로(eis)'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전치사들입니다. '출처'와 '과정'과 '목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초지를 따라
먼저 "하나님 아빠의 초지를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초지(超知)'는 개역성경에는 '미리 아심'이라 번역되습니다. 그런데 이 '미리'라는 말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과거에 미리 결정하셨다는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선 안되겠습니다. 개역성경에서 "미리"라고 번역된 말은 희랍어 접두어 pro입니다. 물론 이것은 "미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단순히 시간상 과거를 뜻한다고 봐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에 갇혀 계시지 않고, 시간을 오히려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미리'라는 말로 과거에 가두어둘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시간 안에 가두면, 우리는 현실에 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던지, 아니면 하나님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던지 둘 중 하나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프로그노시스(προγνοσις)'는 '넘어선 앎', '초월적 앎'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초월적 앎의 내용이 그 앞뒤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초월적으로 아시는 것은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된 난민 상황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들이 임시 체류자가 되어 힘겨운 상황을 보내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난민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에클레시아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난민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난민 상황은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니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낙담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인간적 앎이 아니라, '초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에클레시아에겐 현실을 극복하는 새로운 삶이 요구됩니다. 이 점이 성경의 묘미입니다. 저 '아시면서도'와 '현실 극복'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베드로전서를 통해 저 아시면서도가 아시기 때문에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숱한 오해들 중 하나를 푸는 일이 될 것입니다.
2) 거룩한 숨결 안에서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이제 난민 상황이 아니라, 에클레시아 상황으로 카메라를 줌-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난민 상황 안에서도 자신들의 자녀를 거룩한 숨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어두운 캔버스 위에 흰 점이 찍히듯,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에클레시아가 피어났던 것입니다.
3) 잘 들음과 메시아의 피뿌림으로
그리고 카메라는 그 에클레시아 안에 숨겨진 그들의 목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전치사 '으로(eis)'로 표현됩니다. 이들이 난민 상황 속에서 에클레시아로 부름받은 목적은, '잘들음'과 '메시아 예수의 피 뿌려짐'입니다. '잘 들음'은 개역 성경에 '순종'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몸만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잘 들음'은 '이해와 동의'의 인지과정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으로'라는 전치사와 함께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해봅시다. 즉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뜻에 동의하여 점점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이 즉각적인 완성이 아니라 우리가 이뤄가야할 목적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더불어 나의 부족함이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바울의 글에서도 발견됩니다.
고린도전서 13:12
즉 우리가
아직은 거울을 통해 어른대는 것을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분으로부터 깨닫지만,
그때에는 하나님 나를 아시듯 꿰뚫어 알게 될 것입니다.
A.D. 1세기 에클레시아와 오늘날 현대교회가 닮은 점이 별로 없다고들 하지만, 이 앎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점점 알아간다는 목적은 동일한듯 싶습니다.
'잘 들음'과 함께 또다른 목적으로 제시된 '피 뿌림'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구약성경에 친숙한 베드로는 피 뿌림의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피 뿌림은 모두가 이집트를 탈출한 공동체에 관련해서 언급됩니다.
1) 언약맺음(출애굽기 24:5~8)
2) 제사장 임명(출애굽기 29:21)
3) 한센병 환자 정결의식(레위기 14:6,7)
어느 한 그림만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피 뿌림'이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의 머리 속에는 복합적인 그림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먼저 이 피 뿌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를 보여줍니다. 제물의 피가 절반은 언약궤 위에, 절반은 이스라엘 씨알 위에 뿌려지며 이 제물의 죽음으로 양쪽이 연결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임명식에도 피가 뿌려집니다. 아론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임명할 때 피가 뿌려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 예수로 인해 출애굽한 에클레시아에게 피 뿌림이란, 자신들이 '제사장 나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한센 병 걸린 사람이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다가, 그 병이 나아서 다시금 공동체의 삶으로 돌아올 때, 그 사람 병이 다 나았다는 선언이 피 뿌림으로 이뤄집니다. 즉 현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되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을 선취한 이들, 곧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잘 들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이 온전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이미 이뤄졌고, 그 선언 아래서 그들은 분명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 뿌림이 잘 들음과 함께 '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야 하고, 제사장 나라로서 온전해야 하며, 온전치 못함이 치유될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비춥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이들을 두 가지 정체성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에 흩어진 난민들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입니다. 어느 정체성이 먼저인지가 그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할 것입니다. 늘 난민 상황의 고됨과 에클레시아에게 약속된 영광이 부딪칠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봤을 때, 베드로가 건내는 인삿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흘러넘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인식하고, 그 인식된 은혜로 평화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은, 그들이 '난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얻음을 알 수 있고, 그 거저 얻음을 평화로 구현할 가능성을 얻습니다.
제가 지금 위의 문장을 쓰면서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하나님이 은혜를 에클레시아에게만 내려주신다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거저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2016년의 8월 마지막째 주를 떠올려보십시오. 하늘이 유난히도 맑고, 구름이 기가 막혀서 SNS에는 온종일 하늘 찍은 사진들로 도배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 하늘을 에클레시아에게만 주신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에클레시아와 그 여집합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인식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알고 좋아하고, 그 밖은 모르고 좋아합니다.
사도행전 17:23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에클레시아에게 하나님은 은혜와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인식 때문에, 정체성의 역전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은혜'가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난민'이라는 상황은 오히려 그들이 섬겨야 할 필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짐은 제사장 나라로의 임명이요, 제사장 나라는 민족의 죄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안 상황을 온 몸으로 대변하면서도, 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또한 이 제사장 나라를 통해서 제사장 나라가 태동한 인근 지역은 하나님의 통치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접점이 됩니다. 말 그대로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에클레시아의 개념이 다양한 표현을 통해 풍성하게 제시됩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이 신조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구약의 풍성한 그림들을 통해 에클레시아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에클레시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책으로서 베드로전서입니다.
유대인답게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 서두에 찬송시를 넣어놨습니다. 발신자, 수신자, 첫 인사를 제외하면, 이제 본문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의 찬양을 들어봅시다.
찬양 받으실 분, 하나님 곧 메시아 예수의 아빠입니다.
그 분은 많은 자비를 따라 우리를 위로부터 낳으셨고,
살아있는 소망으로 이끄셨습니다.
(이 일은) 죽은자들로부터 메시아 예수를 위로부터 일으키심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곧 우리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유업으로 이끄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여러분을 향해 하늘에 보관된 것이고,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기에,
신실함을 통해 이집트 탈출 여정을 따라 나아가며
끝 때에는 그 정체가 드러나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의미군대로 띄어쓰기를 해봤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이 곧 메시아 예수의 아빠임을 밝히고, 이제 그분이 왜 찬양받을만한 분인지를 열거합니다. 먼저 큰 틀을 제시하는데, 낳음과 이끄심입니다. 그 낳음은 '위로부터 낳으심'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생각나게 합니다. 저 '위로부터'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나(ανα)'라는 접두어인데, 1) 다시 2) 위로부터 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선 '위로부터 나야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어찌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반문에는 '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령과 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개역성경에선 '거듭남')'은 하나님께서부터 부여받은 새로운 정체성을 뜻합니다.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되기 위한 새 정체성이자, 이는 세례라는 입문의식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숨님으로부터 새 정체성을 얻어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출산'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아담의 과오를 뒤집고 하나님의 숨결로 새로이 창조된 새 아담들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살아있는 소망'으로 인도됩니다. 이 그림은 마치 파라오에게 이스라엘을 나의 맏아들이라 선언하며 그들을 출애굽시키셨던 장면과 오버랩됩니다. 하나님은 아들들을 출애굽시키셔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 출애굽을 겪은 이들은 광야에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난민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줄곧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살아있는 소망'은 땅입니다. 그러나 얻기 위해 경쟁하고 투쟁하며, 인류가 벌인 전쟁의 무대가 된 그 땅이 아닙니다. 메시아 예수를 위로부터 일으키심을 통해 밝혀진 땅,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아담으로 선언되었듯, 새로운 아담들에 걸맞는 창조세계의 새로움이 그들을 위해 상속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 상속물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 보관된 것이지만, 곧 눈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20~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날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고, 그 날에 상속물에 걸맞는 상속자임이 드러날 그 날을 위해 에클레시아도 준비되어가고 있고, 새 하늘과 새 땅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목적어를 "우리를"로 썼던 베드로는, 그 유업이 하늘에 보관되었다는 바로 이 대목에서만 목적어를 "여러분"으로 바꿉니다. 왜 이렇게 썼을까요? 무엇에 강조점을 두고 싶었던 것일까요? 지금 에클레시아로서 살아가는 난민들의 참 실존이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당시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에게는 어찌 읽혔을까요?
"하늘에 보관되었다"의 보관은 군사용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칼이 되어서 새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환상을 말했습니다. 또한 이 예언은 불칼든 천사가 에덴의 동쪽을 지키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초가 되어서, 하늘에 보관된 상속물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6:19~2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유업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유업"이라 말하는 베드로는 분명, "썩고, 더럽혀지고, 사라졌던 유업"을 염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35:34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히려 약속의 실패를 보여주는듯 합니다. 가나안에 살던 모든 이들은 죽음의 노예가 되었고(그래서 살기 위해 권력 투쟁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죄악으로 더럽혀졌으며, 심지어는 이방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빼앗겨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유업이 가나안 땅돼기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 정복된 세계, 죄악이 씻겨진 세계, 그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새(καινη)'라는 형용사를 붙여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없던 나중에 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새 피조물, 새 언약,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
뒤에는 상속자에게 주어지는 헤택이 이어집니다. 상속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다는 것이, 난민 상황을 피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1) 줄곧 신실함(언약에 충실함)의 태도를 가지고, 2) 이 메시아의 부활로 시작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끝나는 출애굽 여정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보호하심의 결과로 그들은 이 출애굽 여정의 끝날에(곧 요한이 말한 일곱대접 심판이후에), 영광의 부활로 나타난 이 난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진정한 주인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이 베드로가 하나님, 곧 메시아 예수의 아빠를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이 안에서 여러분들이 기뻐합니다, 이 순간 잠깐 지금 다양한 시험들로 비통해해야 마땅하지만, 여러분들은 여러분 신실함의 증명된 바가(그 증명은 불로 이뤄지는 증명입니다)이 멸망할 금보다 풍성하다는 사실, 곧 메시아 예수의 폭로 안에서 여러분이 찬양과 뚜렷과 영예로 발견된다는 사실로 기뻐합니다.
"이 안에서"의 '이'는 남성, 혹은 중성명사입니다. (이 한 단어의 대명사가 세 가지 성중 하나를 갖기 때문에 의미를 구체화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안에서"는 앞에 언급한 내용 전체를 받던지(중성), 아니면 남자 사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앞에 나온 모든 내용들은 예수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내용들은, 예수 안에서 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안에서"를 무엇으로 해석하든지, 그들이 지금 고되고 힘들기 짝이 없는 난민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만일 베드로의 말대로 정말 기뻐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 기쁨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상황을 뛰어넘는 더 큰 무언가가 그들을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고난의 현실의 한복판으로 돌입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두 가지 정체성은 이제 갈등이 아니라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잠깐'과 '이제'를, 그리고 '근심'과 '기쁨'을 대조하고 있습니(마치 요한계시록의 요한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의 수신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비통히 여겨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과 같아서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불 속에서도 삼켜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불 속에서 견디고 견뎠던(다시 말해 신실했던)이는 반드시 남게 됩니다. 불에 그을려 볼품없이 남는 게 아니라, "찬양과 뚜렷과 영예"로 발견됩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 안에서 순도 높은 금이 나오듯이, 이 금과는 비교도 안될 '나'라는 인격이 그 고난의 불 속에서 참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불 속에서 견디는 시험에 관해서는 바울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3~15
만일 누가 이 토대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한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들의 업적을 밝히되, 불 가운데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은 모든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검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운 업적이 검증을 이겨내면, 그들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업적이 불에 타 버리면, 그들은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구원을 얻겠지만, 마치 불을 통과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같은 이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의 때를 '잠깐'으로, '불'로 이해하고 있고, 이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금'이 아니라, '신실함'이라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발견되다'라는 동사 또한 이 둘의 공통 이해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표준새번역은 "발견되려 함이니"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로 번역했지만, 많은 부분 의미의 소실이 발생하는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식'에 관해 말합니다. 저는 오늘 해설을 쓰면서 '인식'이라는 측면을 신경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종말론적 새창조를 시작한 에클레시아는 어떤 인식을 갖는가' 또한 그들의 인식 속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찌 인식하고 계시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에클레시아가 신랑과 신부로서 서로 알아주는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 관계를 사도들이 인식에 관련된 동사로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알아주심'은 불길 속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앎을 지켜나간 에클레시아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8:3
만일 어떤 이가 무엇을 '안다' 여긴다면, 그는 아직 마땅히 알아야 하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어떤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주십니다.
금과 증명에 관한 내용도,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이라면 익숙한 예시입니다.
이사야 48:10
보아라, 내가 너를 단련시켰으나, 은처럼 정련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의 풀무질로 달구어 너를 시험하였다.
여러분은 보지 못한 그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했으면서도 이 순간 그이를 향해 신실한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지만 뚜렷한 환희로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돌보는) 여러분의 신실함의 끝, 곧 호흡의 구원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가 13장,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결말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메시아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을 한 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즉 사도들이 하나님과 에클레시아 사이의 앎을 말할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그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이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 그이와 앎과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이 순간"에 대한 해석이 뒤집힙니다. 같은 현실 상황, 다른 현실 인식. 이 다른 현실 인식은 메시아와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순간 잠깐 지금 다양한 시험들로 비통해해야 마땅하지만
이 순간 그이를 향해 신실한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지만 뚜렷한 환희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에 대한 '새' 이해를 가지고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 '신실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신실함의 궁극이, 결말이, '삶(프쉬케)의 구원'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구원은 죄로부터 탈출한 여정의 결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난민이 된 것입니까? 베드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보나마나 부당한 이유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위에서, 났으면서도 그 생명이 질식당할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 부당한 난민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에 기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부당한 현실을 뚫고 새로운 길을 낼 것입니다. 이들이 에클레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반드시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증거이자, 미래에 이뤄질 궁극의 예고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끝을 만났고, 끝 안에서,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 웨인 그루뎀 <틴테일 주석 베드로전서> p.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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