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31~19:28
여리고에서 있었던 일
0. 무시당하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곁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거야. 즉 인자가 민족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놀림 받고, 업신여김 당하고, 침뱉음 당할 것이고, 그들은 채찍질하고는 그이를 죽일 것(이것이 새창조를 위한 과정이었다!)이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경악했습니다. 제자들은 인자가 와서 로마 제국(민족들)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인자가 민족들에게 넘겨지고, 놀림받고, 업신여김 당하고, 침뱉음 당하고, 심지어 채찍 맞고 죽임당한다니요! 뒤에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일어난다"는 말씀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덤덤하게 이 모든 일들이 "예언자들이 인자에 대해 예언한 바로 그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토라 이야기가 그들에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눈 앞에 있는 것을 봐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들은 코 앞에서 예수님 얘기를 듣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뜻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던 것일까요?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로 제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망설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여리고라는 도시를 지나야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듯,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사람도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이는 여호수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실 작정이지만 말입니다.
1. 눈 감은 제자들과 눈 뜬 시각 장애인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입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입니다. 해수면보다도 무려 200M나 낮습니다. 그 낮은 도시 여리고로부터 산 꼭대기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등산로같은 오르막길입니다. 그리고 이 '여리고~예루살렘'의 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못 알아먹은 제자들과 예수님은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서시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어떤 시각 장애인이 그 웅성거림을 듣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저기 무슨 일이 났소? 왜 이렇게 주변이 시끄러운게요?'
주변에 서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출신인 예수라는 사람이 왔소. 사람들이 바로 저 사람이 인자라고, 메시아라고 합디다.'
이 말을 듣자, 시각 장애인은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끄러운 소리가 구걸하던 사람의 입에서 들리는 것을 보고, 그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이 이 사람을 혼내기 시작했습니다. "아, 조용히 좀 해! 이 거지 자식!" 그러나 이 소리를 듣고도 이 시각장애인은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푸는 것.' 이 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갑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이 곳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참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자비를 이 시각 장애인이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말씀하신대로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실까요?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역겨운 냄새가 풀풀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휘젓는데 사람들은 서로 이 사람과 닿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피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내가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떠라. 네 신실함이 너를 온전케 했다."
이 장면을 여리고 주민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늘 제자들에게 꽂혀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힌트였습니다. "눈을 떠라. 네 신실함이 너를 온전케 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각 장애인은 정상인이 되었고,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라고 기뻐 춤췄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구걸하던 자리를 치우고 예수를 기쁘게 따라나섰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의 말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망했던 것을 찾아 아브라함 자손으로
예수님은 아직 여리고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성안을 지나가시고, 그 뒤를 눈 뜬 사람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 직업은 세리(tax collector)였습니다. 세리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세금을 걷어다가 로마에 갖다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동족 유대인들은 당연히 이 세리들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세리들 중에서도 세리장입니다. 세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친구도 없고, 민족을 배신했다고 손가락질 당하고, 일을 열심히 한들 그건 더 욕먹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삭개오는 일평생 당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돈만 많았습니다. 삭개오는 이 사실에 무척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세리장인 자신은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받을 수 없다고 체념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각 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소문은 여리고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이 소식이 세관장인 삭개오의 귀에도 들어갔고,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거리로 나섰습니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예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작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이러단 군중에 치여서 예수는 보지도 못할 것이고, 예수 일행은 지나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삭개오는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저기 돌 무화과나무가 예수일행이 지나는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릴 적 밥 먹듯이 올라가던 그 나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도 많고, 가뜩이나 놀림받는 세관장인데 나무에 올라갔다간 사람들에게 더 업신여김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나무에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상처받은 자존심도 하나하나 버립니다.
예수께서 돌 무화과나무 아래서 눈을 뜨십니다(이 '눈을 뜨다'라는 말은 시각 장애인에게 썼던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왜냐하면 오늘 내가 네 집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도 알고 계셨고, 오늘 삭개오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지금 어서 내려와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오늘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눈이 가려진 제자들과 여리고 주민들 사이에서, 눈 뜬 예수님과 삭개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기대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눈 뜬 시각 장애인도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얼른 내려왔고, 기뻐하며 예수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이름도 알고, 오늘 자신의 집에 머물러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궁금하고 기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주민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 곁에서 망하려고 들어갔네."
이 말 한 마디로 여리고 주민들이 세리장 삭개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이스라엘을 배신한 세리장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망하게 하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집을 지나갈 때마다 욕하고, 삭개오와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삭개오 근처에 가면 뭔가 더러운 게 묻는 것처럼 삭개오를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삭개오네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려고 하신다니, 저 말이 툭하고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삭개오도 들었습니다. 삭개오가 다시금 불안해졌습니다. 예수님도 저 여리고 주민들처럼 자기를 미워하시면 어떡하나, 나랑 같이 있으면 망할 것 같아서 친구 한 번 초대한 적 없는 이 집에 안들어오시면 어떡하나. 삭개오가 얼른 허리를 펴고 일어나 예수님께 호소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무화과를 보자하는 공무원처럼 터문이없는 고발을 통해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당시 무화과 열매를 수출하던 사람들은 그 수출을 담당한 공무원들을 끔찍이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공무원이 와서 "무화과 좀 봅시다"라고 말하고선, 괜한 트집을 잡아서 수출을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뇌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무화과를 보다"라는 말을 "부당하게 남의 것을 빼앗다"는 말로 썼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그 부폐한 공무원 보듯 삭개오를 생각했던 것 같고, 삭개오도 자기를 미워하는 여리고 주민들의 재산을 부당하게 많이도 빼앗은듯 싶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말했습니다. 일단 제 가진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가 부당하게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 말은,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우리집에서 떠나지 마세요."입니다. 가난해져도 좋습니다. 손해를 봐도 좋습니다.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입니다.
그 마음 다 아시는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되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망했던 것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늘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뜻이 뒤에 나옵니다. '아브라함 자손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해결책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결책 이스라엘이 되는 사람은 망했던 사람입니다. 망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망했다고 손가락질 한 삭개오. 그런데 예수님은 보란듯이 사람들 들으라고, 제자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망했던 것을 찾아서 구원하러!"
3. 새 창조를 위한 과정
그런데 이 놀랍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장면을 보며 눈 뜨지 못한 제자들과 여리고 주민들의 마음 속에선 또다른 오해가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한 번에 아브라함 자손이 되듯, 하나님 나라도 과정 없이 갑자기 이 땅에 나타날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만 도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왕 되기에 걸맞은 사람이 이제 왕위 대관식을 하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났단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다니엘서 7장을 떠올렸습니다. 거기서 '인자'는 왕위를 받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거든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 왕위 대관식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왕위 대관식 얘기를 꺼내신 것은, 자신의 승천에 대해 얘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오늘 우리가 사는 시절까지 멀리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이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열 사람 자기 노예를 불러다가 열 므나를 줬어. 그러고는 '내가 올때까지 이걸 가지고 일을 시작해라'라고 말했단다.
인자가 하늘로 올라가 왕위를 인정받을 때, 열 사람의 노예에게는 열 므나가 쥐어집니다. 1므나는 노동자들이 3개월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1000만원이라고 칩시다. 승천의 주님은 자신이 종들에게 뭔가 귀한 것을 맡기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주민들은 그 사람을 미워해서, 왕위 대관식이 열리는 나라로 사람을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왕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가 이상하게 꼬입니다. 정작 인자는 왕위 대관식을 하러 가는데, 그 나라의 주민들은 그 인자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왕위 대관식이 열리는 나라로 사람을 보냅니다. 다시 말해서 왕위 대관식이 열리는 하늘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저는 다른 것 주세요. 저 예수 같은 인자 말고요. 힘센 인자, 돈 많은 인자, 우리만 잘 되게 해주는 인자가 우리 왕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인자는 정말로 왕이 되어서 다시 노예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곤 각각 므나를 맡긴 노예들에게 결과를 보고하게끔 했습니다. 1번 노예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착한 종아, 잘했다.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줄게.'
1번 노예는 한 므나 받은 것으로 열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번 노예는 인자의 칭찬을 받습니다. "착한 종아, 잘 했어!" 그런데 칭찬받는 그 이유가 특이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신실했기 때문에!". 이 얘기를 듣는 사람들 중 눈 뜬 사람의 눈이 번뜩입니다. 왜냐하면 시각 장애인이 눈을 떴던 이유가 '신실함'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신실함 때문에 한 므나는 열 므나가 되었고, 1번 노예는 나중에 열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열 개 도시를 맡아서 가꾸고 사랑하는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2번 노예가 나왔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벌었습니다.'
'너도 다섯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줄게.'
마찬가지입니다. 한 므나로 다섯 므나 만든 2번 노예는 다섯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도 역시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왕으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섯 도시를 맡아 다스릴만한 사람이라 인정을 받았습니다.
승천하셔서 왕위를 받으러 가신 예수는 땅에 남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거저 받은 므나를, 아브라함 자손에 걸맞게 사용해!' 우리는 삭개오처럼 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망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망했던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창조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우리에게 므나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므나를 가지고 우리가 열심히 애쓰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뀌고,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에 걸맞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새창조는 이런 식으로 이뤄집니다. 왕 되기에 걸맞은 사람이 왕위 대관식을 하기까지 고난과 시간이 필요하듯(예루살렘도 이 과정을 위해 가야 합니다), 므나를 받은 노예들도 아브라함 자손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힘들어도 애써야 합니다. 왕이 다시 오실 때까지 꾸준해야 합니다. 그게 신실함입니다. 즉 므나를 가지고 애쓰는 게, 망했던 것이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애썼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롭게 된 이 땅의 도시들을 맡기십니다. 그 사람이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여리고 주민들은 이 과정없이 하나님 나라가 짠 하고 이뤄지면 그만이라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 나라에 걸맞는지는 생각도 않고서 말입니다.
4. '낀 시대"는 거저받은 것으로 힘써야 할 때!
그런데 다른 노예 하나는 조금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신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너무 가혹하세요. 주지도 않고 달라하실 때도 있고, 심지 않은 걸 거두기도 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럴바엔 차라리 받은 것 고대로 드리려고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한 므나 받았지만, 노력하길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므나를 그대로 가져다 드리면 자기 할 일 다한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엄격하고 가혹한 왕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잘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문제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금세 이뤄지면 좋겠다는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 나라에 자신들이 걸맞은 사람인지는 생각 안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주인에게 받은 것 가지고 잘 해보려고 애쓰지 않은 노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내가 너를 판단하겠다, 이 나쁜 종아! 내가 가혹한 사람이라서, 주지도 않은 것을 달라하고,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둔다고? 그건 이자 받고 사는 고리대금업자를 말하는게 아니냐? 내가 이자나 받으려고 너에게 그 돈을 맡겼다고 생각했느냐?'
노력 않고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고리대금업자입니다. 이 다른 노예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 생각하니 자신도 노력없이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하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혹시 애쓰고 힘든 과정을 거쳐 인자가 왕위를 인정받은 지금도 이러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도 왕위를 얻기 위해 힘쓰는 과정이 필요했다면, 우리 역시 우리 자신들을 바꾸고 묵은 때를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힘들에 산 정상에 오른 뒤 나중에서야 땀을 닦으며 하는 말입니다. 거저 받은 것 가지고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 오시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혼나게 될겁니다. 정말 끔찍하게 혼이 날 것입니다. 왕위를 받아온 사람은 그 다른 노예의 옆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그는 이미 열 므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주인에게 거저받은 므나를 소홀히 하고 수건으로 싸둔 사람은, 그 므나마저도 빼앗겼습니다. 왕은 이익을 바라는 고리대금업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종이 그 므나 가지고 열심히 살아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금세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선 안됩니다. 받은 것을 잘 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을 이웃을 위해 거저 잘 쓰는 것입니다. 이 연습을 열심히 하라고 승천하신 왕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이 끝났을 때, 우리는 왕께 무슨 말을 듣게 될까요? 그것은 '오늘'에 달려있습니다. 삭개오에게 오늘이 중요했듯, 오늘 우리에게도 오늘이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삭개오네 집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끔찍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걸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여리고에서 있던 일입니다. 이제 여리고를 지나 올리브산 근처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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