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44日 : 요한복음 8:32

from 치부책 2015. 8. 19. 10:24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 공동체적 말씀


  이 한 줄의 말씀을 놓고, 이 구절을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봅시다. '내'가 고민하면 안되고, '우리'가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공동체에게 주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유대 공동체에게 주신 책이요, 바울의 편지들도 개인이 아닌 공동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는 공동체적 진리입니다. 성경 해석을 순전히 개인적으로 하지 않고, 공동체의 맥락 위에서 해본다는 것은, 성령께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실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질 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떻게 구현이 되어야 할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 안의 지체이기 때문에, 이 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를 일으키고, 도우며, 협력해서, '하나님의 좋음'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뚜렷하게 드러나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기독 공동체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라 성경을 읽어갑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서 발견한 의미를 함께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됩니다. 휘양찬란한 네온사인 빛나는 거리도 감출 수 없는, 빛된 삶이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빛이신데, 그 아버지따라 사는 우리가 빛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몰라준다면, 그것은 세상 책임이 아니라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소통은 '내가 무엇을 전하느냐보다, 전달받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공동체는 함께 성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공동체가 이 한 구절 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서 이 구절을 뚜렷하게 공동체적 삶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게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하나님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1. 자유


  다시 성경 말씀의 구절로 돌아갑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 참 익숙합니다. 저는 그 동안 이 말씀을 "성경 말씀을 잘 알찌니, 잘 아는 것이 너의 생각을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간 이 구절을 잘못 읽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는 "말씀을 알찌니"라고 쓰여있지 않고, "진리를 알찌니"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럼 진리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만일 제가 진리를 안다면, 저는 지금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자유롭지 않다면, 제가 붙잡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닐 것입니다. 


  먼저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요근래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만나며 던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여태까지 삶 속에서 자유가 더 중요했니, 아니면 화해가 더 중요했니?" 이렇게 물으면 열에 여덟 아홉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는 자유가 더 중요해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요즘 친구들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말이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말은 사람들을 두 패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한 쪽은 억압당하는 쪽이고, 다른 한 쪽은 억압하는 쪽입니다. "그럼 너는 누구로부터 자유롭고 싶은데?" 라고 물으면, 대번에 말합니다. "부모님이요". 왜 부모님이 너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냐고 물으면, '말이 안통한다, 자꾸 뭐라 한다' 이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럼 부모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니?' 답은 '집을 나와야지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지요' 이런 답변이 나옵니다. 그럼 지금은 부모님과 어떻게 지내고 있어? 이렇게 물으면, 그냥 말 안하고 지낸다 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요새 자꾸 길거리에서 칼부림이 많이 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또한 자유의 문제입니다. 나 외에 다른 존재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고, 나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방법이 폭력입니다. '나 건드리지 말아라'입니다. 폭력은 자유의 갈망이 낳은 사생아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자유가 이런 자유겠습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라고 했을 때, 반드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글자는 똑같이 쓰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는 '누군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사람과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짐으로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자유가 중요해, 화해가 중요해?'라고 물었을 때, 자유를 선택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하나되게 할 수 없습니다. 홀로 자유롭기를 추구하나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인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는 자유로워지기는 커녕, 이스라엘은 자유를 부르짖다가 A.D.70년에 로마에게 멸망당해서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일은 망하기 불과 몇 십년 전에, "로마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옛날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는,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되면 착해지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도 잘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길이,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끝까지 붙잡고 사랑하는 것이, 나도 자유로워지고, 그 사람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하나 뿐인 길입니다. 이것이 다른 자유,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상자에서 나가기 두려워요

에고의 좁고 작은 상자 안이지만

바깥은 야수와 괴물 상처받을 위험들

난 부서져요, 부서지는 건 나인데

나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자유로운 것


 - 이상은, The Box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장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라고. 그러다가 의견이 안맞고, 싸우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아버지와 언젠가는 시원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됨을 추구하라고. 그 길의 끝에 진짜 자유가 있다고. 이것은 어른들께도 마찬가지로 드려야 하는 얘기입니다. 모든 사람의 관계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랑 사이가 좋은 사람보다, 나랑 사이가 안좋은 사람에게 전심을 쏟다보면, 이 작은 공동체 정말 하나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어렵냐하면 나 하나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그 모양이라서 어려운게 아닙니다. 내가 아직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2. 진리


  그럼 이제 '진리' 문제로 넘어갑시다. 진리를 알면, '나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의 자유를 '누군가로부터의 자유', 특히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로부터의 자유'로 들었겠지만, 예수의 말씀은 편나누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알면 나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그 진리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요한복음 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노예입니다. 죄는 비뚤어짐입니다. 비뚤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죄'라는 말은 특정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라기 보단, 존재 자체에 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온전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이란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목적에 부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비뚤어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하게 느끼고 행동하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겪는 모든 시간은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는 모든 순간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죄의 노예이면서도,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이 고깝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멀어지려 합니다. 다시 헛된 자유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이집트에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집트 땅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파라오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진노에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열번째 재앙 아래서 첫째 아들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는 우상숭배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이나, 자유를 억압당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었고, 비뚤어진 자신의 인격을 지키려하니 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마음에 자유를 억압당하는 사람쪽 편을 들어주고 싶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파라오나 히브리 노예나 매양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서 문제를 찾기 때문에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럼 3000년 전 이집트는 그랬다손 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어떻습니까? '나'에 대한 전지구적 우상숭배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리차드 포스터가 말한대로, 이 땅은 돈, 권력, 섹스에 대한 숭배가 만연해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좋은 사람이고, 돈이 많으면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든, 많든, 모두가 비뚤어져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집트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죄의 종인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십니다. 36절의 "너희"가 뒤에 나오는 44절의 "너희"입니다.  


8:44(오늘은 11844日)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죄의 종은 마귀자식입니다. 얼마 전에 만난 어떤 집사님이, 한국교회를 비판하시면서 죄다 마귀자식들뿐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참으로 자유롭지 못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마귀 자식들 다 망해버려라'라며 비판일색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 자식이라는 말을 앞에서 우리가 읽었던 36절의 "너희"와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만난 진리는, 우리가 따르는 진리는, "그러므로 아들이 마귀자식들을 자유롭게 하면, 마귀자식이었던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같은 내용을 광복절을 연상시키는 로마서 8:15의 위대한 구절로 선언합니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말은 마귀자식이었던 자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은 출애굽의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즉 어린양 예수가 죽어주시고, 그것으로 마귀자식이었던 이집트에 살고 있던 이들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양아들, 양딸로 입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노예들을 출애굽시키시면서,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출애굽기 4:2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순간이, 죄의 노예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는 순간입니다. 같은 일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하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지 않습니까?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이집트에서 문지방과 문설주에 피를 발라 탈출할 적에, 제가 그 모세의 소식을 들은 이집트 사람이라 생각해봅니다. 히브리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 망할 이집트를 떠나 올바르게 살아야지 하면서, 집 문설주와 문지방에다가 피 바르고 함께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다면 그 사람은 어찌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넌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데 왜 탈출했어?' 이러셨을까요? 아니면, '그래, 내가 네 마음을 봤다. 너도 내 언약백성이다. 아들이다' 하셨을까요? 후자라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던 마귀자식이었다는 사실이 진리의 한 쪽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말하면 반쪽 진리입니다. 진리를 온전하게 하는 나머지 반쪽은 하나님께서 마귀 자식이었던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거 두 개를 다 말해야 합니다. 앞의 것만 말하면 저주가 되고, 뒤엣 것만 말하면 세상에서 주는 값싼 힐링과 다를바가 없어집니다. 심판과 구원.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붙잡고 나가야할 진리입니다.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 상황 속에서, 메시아 예수꼐서 대신 심판 받으시고, 모두를 위한 구원의 문이 지금 열려있음을 아는 것이, 참으로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 진정한 화해의 길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문으로 들어가면 들어갔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그 사람들과 분열을 조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은 경쟁의 문이 아닌데, 어찌 우리가 화해보다 자유를 더 좋게 생각하며, 타인을 밀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우리 역시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구할 것은, '나의 자유'가 아니라, '너와의 화해'입니다. 메시아께서 이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말뿐이 아닙니다. 역사입니다. 실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실제로 죽으셔서, 위대한 출애굽을 이뤄내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우리 대신 죽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죄의 노예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3. exchanged

 

  따라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진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보여준 죄로부터의 출애굽이요, 그 위대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로부터 자유가 아니라,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화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5장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할 지옥자식들을 위해 예수께서 죽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봅시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할만할 때만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랑하기 어려울 때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그렇습니다. 위기 때 더욱 빛나는 사랑이니, 눈에 보기에 좋은 사랑만 말하는 도시 속에서, 더욱 빛이 나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이었습니까?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 심지어 마귀자식들을 위해서도 죽어주시는 죽으심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죽으심과 합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에게 돌팔매를 하는 동족 유대인을 위해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고(심지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말을 할 정도로) 복음 전하는 바울이, 바로 그의 죽으심과 합한 자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그 사랑의 수혜자입니다라는 고백을 넘어서, 우리 역시 그 사랑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의 그러한 죽으심에 나도 합쳐져야 합니다. 나의 자유가 아닌 우리의 화해를 위한 사랑입니다. 비로소 그 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강연을 많이 듣고,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changed)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중심은 변하지 않으면서, 그저 껍데기만 바뀌는 변화는 기독인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변화는 출애굽입니다. 내가 죽고 메시아와 하나되는 변화입니다. 출애굽은 중심이 바뀌는 것이고, 내 죄된 인격과 예수의 인격이 십자가로 맞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화가 아니라 맞교환입니다. 나의 죄됨이라는 똥을 주고, 메시아의 인격이라는 보석을 얻어왔으니, 이런 법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의 출애굽,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인 양아들, 양딸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속에 빛이 있으니, 어둔 밤이든, 밝은 낮이든 한 길을 걷습니다. 속에 빛이 없는 사람은,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셨던 그 빛은 태양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속알을 밝히니, 내 속에서부터 밝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인데, 그 속에 빛이 있는 사람은 더이상 더러운 것을 뱉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낮에 다닌다 했는데, 그 예수가 성령으로 우리 속에 계시니, 우리는 해가 떠도 낮이고, 달이 떠도 낮입니다. 


  빛을 속에 모신 여러분, 곧 죽어도 예수와 하나되는 길을 갑시다. 세상에 길은 많지만,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길은, 그가 죽으셨던 것과 하나되는 한 길 뿐입니다. 그러니 타인과 줄기차게 화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화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같습니다. 


  언약백성을 죽이려고, 하만이 제비를 뽑았던 날이 부림절입니다. 그런데 부림절날 죽은 것은 언약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만 본인이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라는 쳐형도구로 인류를 분열시키고 하나됨을 막으려고 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 처형도구로 온우주의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날마다가 부림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만이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그 순간이, 우리가 하나되는 순간이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사탄을 이깁니다. 


  예수 공동체는 바로 이것으로 하나되고, 바로 이것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김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것을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됨을 추구해서, 분열을 이김이라"고 읽습니다. 십자가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뚜렷이 드러나십니다. 영광입니다. 분열을 통해 편을 나누고 싸우는 것이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 마저도 사랑하시어, 진정한 하나됨을 이 땅에 보여주십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말씀에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누가복음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끝까지 자신의 명줄을 놓고 쥐어짜듯 괴롭게 하는 이 유대인들과 로마 사람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였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추구하신 자유는, 누군가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나로부터의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때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내어줌으로, 아들도 얻고 마귀자식들도 새롭게 되어 자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들은 죽음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아버지"라 부르셨을 때, 그 분은 진정한 자유가 화해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불러, 나로부터 자유한 사람, 더이상 분열에 끌려다니지 않고, 곧 죽어도 화해를 추구하는 사람.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이신 아버지를 따르는데, 우리가 자유를 추구한답시고, 둘을 만들어선 되겠습니까? 나 하나 자유롭다고,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을 닫아선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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