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수직선 위에서 태어난다. 그 수직선 위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은 양분된다. 내 오른쪽에 있든지, 내 왼쪽에 있든지. 수직선 어디에 서있어도 마찬가지.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야. 나는 양쪽을 하나되게 하지 못하고, 있음과 없음으로, 좋음과 싫음으로, 보수와 진보로, 옳고 그름으로 세상을 반으로 쪼개놓고서 저울질한다. 비뚤어졌다는 건 다른게 아니다. 기준이 아닌 내가 기준행세 하는게 비뚤어짐이지.
그럼 어떻게 할까?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나아질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든 가볼까? 여기저기를 다니면 이 상대계에서 문제가 해결될까? 수직선 위에서는 나만 답이다. 어딜가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끊임없이 나뉘고, 나는 분열의 중심에 있을 뿐이야. 그리고 똑같이 자신이 답이라 생각하는 무수한 점들이 수직선 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적이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어느 편에, 자신과 얼마나 붙어있고 떨어져있는지를 끊임없이 재가며, 또다시 쪼개놓고서 저울질한다. 나는 그 짓을 안하려고 하는데, 이미 나는 다른 점들에 의해 평가받고, 그것에 상처받지. 그러나 나만 모르는 듯.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은 인간성의 지향이 아니라, 무생물의 지향. 그런데도 이러한 수직선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더이상 (상대적으로) 평가받기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도 지쳐버려서 스스로 0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너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너는 0이 될 수 없어.
그러나 버리면 0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끝내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0이 될 수 없어. 그리고 0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분열의 중심이 되어 세상을 찢어놓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해버려. 아까워하지 말고 자신을 내어놓아! 자신마저도 내어놓은 사람의 외침은 "내가 비뚤어졌으니, 나를 고쳐주세요!"야. 그래야 진짜 나를 얻을 수 있어.
나는 비로소 0을 만난다. 자신을 버려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그 제로 포인트. 비뚤어진 세상 전체가 새롭게 시작되었던 한 점에서, 나는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한 사람을 만났지. 그리고 그이와 함께 매달리고 싶었어. 그렇게 죽어야, 다시 새로이 산다는 사실을 믿었어. 그리고 그 죽고 산 자리가, 세상 모든 참과 거짓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점임을 알아. 내가 답인게 아니라, 그가 답인 지점. 거기엔 위로부터 내려오는 다른 선이 있어서, 양자택일에 빠지지 않고, 위로 오를 수 있다고. 멀리서 풍월로만 들어왔던 바로 그 점. 거기가 벧엘이야.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가 걸려있는.
풍월이라. 이상하지? 모든 것에 숫자를 매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땅 위에 그런 바람 소리가 들려온 다는 건. 그리고 그 바람 소리가 지금 너에게는 나의 숨소리로 들리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는 그 숨소리를 따라 오늘도 제로 포인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어. 거기에서 스스로 자신을 매달아 죽이고서, 새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 수직선의 숫자를 '함께' 지워가고 있어!
'치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856일. (0) | 2015.09.03 |
---|---|
11844日 : 요한복음 8:32 (0) | 2015.08.19 |
별들의 침묵 - 데이비드 웨이고너 (0) | 2015.07.19 |
11811日. (0) | 2015.07.18 |
YOUTH - Samuel Ullman (0) | 2015.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