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60장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출애굽기 29:1~18


  이제 출애굽기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식을 위임식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위임식을 위한 제물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는 위임식 때 임을 예복이 나오고, 그 다음 제사를 어찌 드리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물을 준비합니다. 제물은 세 마리의 짐승과 세 종류의 떡이 필요합니다. 수송아지 한 마리, 숫양 두마리, 그리고 무교병, 기름 섞인 무교 과자, 그리고 기름 바른 무교 전병입니다. 떡들은 모두 가루로 만들어서 광주리에 담아, 제물될 짐승들과 함께 모세에게로 가져갑니다. 


  모세는 회막뜰 입구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 네 명을 물로 씻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 살펴본 옷을 그들에게 입힙니다. 즉 속바지를 입고, 겉옷을 입고, 에봇을 두르고, 에봇 위에 판결흉패를 부착하고, 머리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쓴 금패를 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영원한 규례에 따라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됩니다. 


  이어서 제사가 진행됩니다. 먼저 수송아지를 끌고와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그런 다음 회막뜰 입구에서 수송아지를 죽이고, 그 송아지의 피를 받아다가 모세의 손가락으로 피를 번제단의 네 귀퉁이에 달린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아래 붓습니다. 내장, 간, 콩팥에 붙어있는 기름을 떼어다가 다 태웁니다. 송아지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아예 이스라엘 텐트촌 바깥에서 태워 없앱니다. 이것이 죄를 씻는 제사인 속죄제입니다.


  모든 제사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특히 속죄제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에 등장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가 속죄제사였다고 말합니다. 속죄제는 고의로 저지르지 않는 죄에 대해 용서하는 것이 속죄제입니다. 바울은 8장에서 십자가를 속죄제사로 설명하기 전에,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즉 고의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자꾸 죄를 짓기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성의 정체입니다. 옳은 것을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속죄제는 이러한 죄에 대한 제사입니다. 고의적으로 짓지 않은 죄들을 용서해줍니다. 즉 마음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데, 타락한 인간성 때문에 자꾸 짓게 되는 지은 죄들을 용서해주는 제사가 속죄제사입니다. 그래서 그 때 죽었던 제물의 고기는 성막 안으로 못들어갑니다. 육체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서 태워버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피만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를 통해 타락한 인간성이 죽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 속죄제사를 여러번 치르는 구약시대와 단 번에 이루신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속죄제사는 우리가 마음에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속죄제사는 계속해서 드려야 했던 제사였습니다. 마음으로 원하더라도, 연약한 육체가 끝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다시금 무너집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다시금 죄의 노예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은채 제사는 줄곧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드려진 십자가의 제사는 다릅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는 우주에 단 한 번 뿐인 속죄제사요, 그 속죄제사를 통해 우리는 마음에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붙어 있던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속죄제물 예수와 함께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노예생활에서, 즉 마음과 달리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생활에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아담의 본성이 죽은 자리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전에는 죄가 살던 내 속에, 이제는 성령이 사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십자가의 속죄제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성령에 의지하여 죄로 기울어져가는 나약한 나를 굴복시켜서,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들과 신약의 십자가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부어주신 선하신 뜻을 우리가 끝까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제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우리 속에 모시게 되었으니, 더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늘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을 넘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메시아와 합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본문은 속죄제사에 이어, 번제를 말합니다. 준비했던 양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아다가 피를 번제단 둘레에 뿌리고, 조각내어서 수양 전체를 번제단에서 태웁니다. 이 태워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양 한 마리와 광주리에 담아온 떡가루들에 대해서는 내일 보게 될텐데,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양이 두 마리인 이유는, 하나는 하나님께 태우고,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서 태우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는 그 양 통째로 하나님께 태워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번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제자가 바로 번제입니다. 이 번제는 연결입니다. 제물은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하늘과 땅을 잇는 연기를 만들어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속죄제사임과 동시에 번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아래 던지셨고, 그 결과 십자가로 하늘과 땅이, 사람과 하나님이 연결되었습니다. 


  또다른 양인 화목제물에 대해서는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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