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74日, humanitas

from 치부책 2015. 6. 11. 14:01

  머리를 감을 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에 풀리지 않던 질문이 마침내 해결되고, '아 그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온다. 만물이 창조될 때 생겨난 그 물이 돌고 돌아, 오늘 상수도관을 타고서 우리집까지 왔다. 아마도 물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목격한 목격자가 아닐까. 그래서 그 물이 머리에 쏟아지면서 그 역사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머리를 대강 툭툭 털어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불연듯 찾아온 새로운 생각은 깨닫는 그 순간은 '아!'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꿈 처럼, 정연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서두른다. 


1.


  사람이 창조되었다. 창조된 사람은 사랑할 수 있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사랑은 하나님을 반영(reflection)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타락이다. 곧 존재의 전락. 사람이 하나님을 반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반영하여, 땅을 다스리라는 신의 뜻은, 사랑하기를 거절한 인간을 통해서 무시되었다. 


  사랑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의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서로를 살게 하기 때문에. 사랑이 꼭 필요하다. 사랑없이는 우리의 몸도 맘도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한 사람의 맘은 이미 죽었고, 이제 몸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인간에게 남아 있다. 아마 이 당위가, 망가지기전 인간 본래 모습의 흔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당위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기에, 사랑은 전체다. 그래서 사랑은 세계평화다.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인간다움(humanitas)'을 추구하는 길이 사랑의 길이다. 누군가가 배제될 때 그것은 편 나누기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전체를 사랑하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공자도, 노자도, 석가도, 스토아 학파도, 속에서 발견한 '전체'를 말했다.[각주:1] 그러나 그 흔적을 누가 완성했나? 전체 중의 전체를 거절했는데, 전체를 사랑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던 것이, 인간 존재의 전락을 가져왔고,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숙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로 육체다. 사람의 육체는 신기하다. 육체는 사랑의 도구임과 동시에, 사랑과 정 반대되는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사랑은 '나'라는 글자에 'ㅁ'을 더하는 힘이다. 그런데 육체는 그 힘이 없다. 오직 나의 육체적 필요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결국 '나' 때문에 '전체'에 이르지 못하고, 참 사랑은 두번째 문제가 된다


  이것이 앞서 말한 '타락'의 징후다. 타락은 힘없음이다. 자신이 'ㅁ'을 더할 힘이 없을 때, 이것이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나는 참나가 아니다. 본래 '나'에서 degrade된 것이다. 이 degrade는 인간의 인식과 능력의 전락을 가져온다. 사랑은 당위로 남아 있으나, 참으로 인식할 수 없고, 참으로 실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자체가 degrade되었기 때문에[각주:2],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한채 다음의 양자택일에 빠져들게 된다.


2.


  두 가지 일반적인 반응이 남는다. 하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육체를 만족시키는 일이다. 이것 위해서 사람들은 많이 벌고, 펑펑 쓰고자 한다.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며, 함께 세력을 형성한다. 재벌 카르텔. 부패한 권력. 우리가 욕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의 암묵적 지지 속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다들 육체를 만족시키고 싶고, 이 일에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돈 많은 사람이 영웅이다. 그럼 이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사랑이냐? 이것이 신을 반영한 삶이냐? 오늘날 교계가 이것이 정말 밥맛 떨어지는 일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정 반대의 반응이 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정 떨어져서, 이게 육체의 만족을 최소화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석가, 에피쿠로스가 여기에 속한다. 사랑하는데에 육체가 성가신 문제라면, 이 육체를 내놓겠다는 사람들이다. 최소한의 것으로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고를 따라가면,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육체를 버리는데 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육체와는 무관해지는 것이다. 육체를 버리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자유'다. 스토아 학파와 장자는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들의 사상은 '죽음 예찬'이 된다. 마침내 몸을 벗고, 전체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들은 끝까지 개인적이다. 고매하게 홀로, 전체와 하나되기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을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면서도, 육체가 걸림돌이 된다. 이것을 투박한 양자택일로 극복할 수 없다. 세상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3.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상기해보라. 


1) 앞에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2)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이 전락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를 살찌우거나, 버리거나 하는 양자택일에 빠질 뿐이다. 건강 없이 요요현상만 반복될 뿐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다. 이 사랑의 관계가 깨질 때는, 어느 한 쪽이 사랑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을 때 뿐이다. 사랑의 관계가 끝장났을 때의 존재의 전락을 경험해봤는가? 실연의 아픔 말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러한 일이 우주적으로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을 때, 존재의 degrade가 벌어졌다. 곧 하나님을 반영할 수 없어서 사랑할 수 없게 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그 육체는 죽음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당위가 남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죽음 앞에서 당위를 이루기 위해서 다시금 양자택일의 요요현상으로 빠져든다. 육체를 키울까, 버릴까. 둘 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해법들이다. 참으로 사랑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니 해법을 찾는 질문은, '왜 내가 사랑할 수 없으며', '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가'의 문제이다. 답이 싱겁게도 사랑에 있다. 사랑의 문제가, 인간 존재의 문제보다 앞선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육체를 버린 희생이 값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죽음을 사랑으로 이긴다는 부활이 옳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의 문제가, 있고 없음의 문제보다 앞선다.


  이것을 예수께서 보여주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전지전능한 사람'이라 알고 있다면, 당신은 예수를 모르는 것과 진배없다. 예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뚜렷이 드러내는 것 뿐이었다. 이 대전제 아래서, 예수의 모든 디테일한 삶들이 이해된다.[각주:3]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서사 안에서 이해되는데, 짧게 말하자면, 고난 받는 한 사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degrade에서 벗어나 새로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다시금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전락이, 다시금 회복된다는 서사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는 죽었다.

  사랑할 수 없는 이가, 다시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사랑하는 참사람을 내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출애굽의 어린양 삼는 아버지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그의 죽음은 양자택일에서 벗어난 새로운 길이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같이, 최소한의 삶에서 느끼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지도 않았고, 육체를 벗는 것이 자유라 생각해서 죽음으로 돌진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하나님이 진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기 위해 아들이 나선 것이고, 자신이 목숨을 다 한 것이다. 그의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라. '아버지를 뚜렷(영광)'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였고, 사람과도 하나였으며, 마침내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여다봐도, 전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신'이란 금시초문이다. 사랑의 신이라봐야 성적 욕구의 여신들 뿐이었다.[각주:4] 그런데 새로운 공동체가 출범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사랑으로 그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사랑의 문제가 존재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


  게다가 예수는 육체를 버린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얻었다. 부활은 곧, 육체가 있으면서도, 더이상 육체 때문에 사랑이 어렵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부활은 참된 인간성(humanitas) 그 자체다. 그러니 부활을 믿으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 이유가 사라진다. 부활을 믿으면, 자신의 육체를 버려서 얻는 자유가 아닌, 육체를 가지고도 사랑함으로 얻는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참 자유다. 

  부활을 말하면서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부활을 '죽음을 부정한다'로 설명할 때, 이것이 마치 살아서 자기 배를 불리는 생존의 추구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활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이다.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사랑할 수 없는 죽음의 전락을 가져왔다면, 예수 역시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내면에서부터 인간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믿음은 맘의 회복이다. 그리고 몸의 회복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맘으로, 사랑할 수 없는 몸을 정복해나간다. 좁은 의미에서 살몸은 곧 기독인의 약속의 땅이다. 온 우주를 유업으로 받는 일이, 제 살몸 이김에서부터 시작한다.


4.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좁은 길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보라. 죽음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죽을 몸이 새로워졌다는 새로운 소식,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었다는 충격적인 소식. 단선적으로 사고해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산물이 아니다.


  실제 벌어진 역사다. 세상 전체가 degrade되던 흐름이, 갑자기 전환되었다. 그 일을 통해 일어난 일을 보라. 노예를 형제라 부르고, 여자를 재산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우며, 어린이를 모범적 인간상으로 삼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불가촉천민의 신원을 위해 전력했던 공동체의 태동이 십자가와 부활의 연장선이었다. 곧 새로운 인간의 출범, 이 새로운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의도된 본래의 인간성(humanitas)이다. 태초에 복지가 있었다. 태초에 남녀평등이 있었다. 태초에 어린이 사역이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태초의 인간성이 2000년에 한 사람에 의해서 드러났고, 인류 역사는 거대한 전환을 맞았다. 그리고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람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랑을 했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육체를 배불리려고도, 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모든 차별을 깨뜨리며, 진정한 하나를 이뤄나갔다. 하나님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그래서 랑은 인식만이 아닌,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켰고, 시키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공동체에게 이러한 인식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전환을 배제한 양자택일은, 그것이 육체가 되었든, 정신이 되었든 인간성에 속하는 어느 한 측면을 버릴 수 밖에 없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냐,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이냐?"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양자택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이른바 제3의 길, 전체를 갱신하는 길이다. 양자택일이 아니기에 좁은 길이다. 사랑을 들고 나선, 세계 평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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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그 좁은 길을, 많은 말 없이도 아주 자연스럽게 밟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이 육체를 다시 얻은 사람들이다. 전락에서 일어나, 새 인격으로 육체를 정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와 함께 부활할 것일 고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몸으로 그 사랑을 쓰며 살고 있다. 허나 내 몸에는 아직 여백이 많은듯 하다. 글자로나 잘 붙잡혔는지 모르겠다. 믿는 이들의 공동생활을 갈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종교가 정치성을 잃어버리고, 내적인 무언가로 여겨지는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계시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한다. 외부 계시 없이, 인간은 제 속에 새겨진 '당위의 흔적'을 붙잡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위의 흔적으로부터 단선적인 논리를 발전시킨다. '이'와 '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유학이든지, '공'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석가든지, '무위'라는 노자의 개념이든지. 제 속에서 발견한 특정 개념에 의지하여 세상을 읽게 된다. 그래서 '내면적'. 이 내면적이란, 계시 없이 속에있는 '당위'를 가지고 이뤄냈던 추론과정이, 그간 '종교'로 읽혔던 동양의 상황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2. 사랑의 부재는 인식의 문제를 가져온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누군가를 사랑했을때, 그는 '새로이' 인식된다. 어느 쪽이 참이냐. 사랑을 통한 새로운 인식이 참이냐, 아니면 사랑없이 인식했던 것이 참이냐. 데카르트식 '의심의 해석학'은 사랑없이도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의심으로 찾는 것은, '맞다, 틀리다'의 양자택일. 돌아서 제3의 인식을 얻는 것이 사랑이다. 희망없는 것에서 희망을 본다는 말은, 본래 그 속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고, 그 희망('참'이기도 하다)을 발견하게 하는 '인식의 창'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새로이 보게 한다. 사랑없이 봤던 것들이 모두 거짓으로 보일만큼, 인식이 제자리를 찾는다. [본문으로]
  3. 그리고 첨언하자면, 여기가 막벨라 종교들이 갈라지는 분수령이다. 사람들은 야훼나 알라나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온건한 이스람이든, 과격한 이슬람이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교도들을 척살하는 것이 마호메트의 주장이다. 또한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적 읽기가 유대인들이 고수하고 있는 토라 읽기다. 그러나 예수는 토라를 달리 읽었다. 아니 제대로 읽었다. 본래 하나님의 뜻대로 읽고, 그 뜻대로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내어놓았다. [본문으로]
  4. 사실상 그리스, 로마의 모든 신들이 성적 욕구를 가지고 일을 진행해나간다. 특히 제우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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