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94日,

from 치부책 2015. 7. 1. 13:17

0. 들어가기 전에


  저는 요새 <로마서>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여러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는 중에 있는데요.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친밀하게 말씀이 몸에 익을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매일 아침 7시에 커피숖에서 동네 청년들과 함께 로마서를 읽고 흩어지면 좋겠다 싶어서 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읽어나가던 도중에, 로마서 1장 후반부를 볼 차례가 되었을 때, 시기가 적절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참으로 뜻밖의 일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오늘 로마서 7,8장에 대해서 설교하고자 했으나, 오늘 본문을 바꾸어 로마서 1:18~2:16 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7,8장도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7,8장에 나오는 내용이 세상 모든 일의 전환점이기 때문입니다.


1. 복음은 심판에서부터(로마서 1:18~2:16)

1)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

  로마서 1:1~1:17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보여주는 부분이고,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는 부분은 18절부터입니다. 그런데 본론으로 들어간 바울은 대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부터 말을 꺼냅니다. 이 점이 저로서는 참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저를 싫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귀를 막고 안들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동안 설교한 원고들을 보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의 본격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심판을 말하지 않으니까, 복음이 그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한 논란도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비인간화를 걷고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태어난 그대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동성애 문제 앞에서도 올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진노'라 하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와 대치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하나님은 자녀들이 무슨 일을 해도 받아주시는 성격 좋은 할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 분은 정의의 하나님,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불의를 보고도 눈감아주는 경찰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부패한 경찰이라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눈감아주심이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죄도 용서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성경과 무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올바르지 않은 사람을 봐주는 뇌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속죄제사로서 고의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도 고의적인 죄를 반복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께 씻을 수 없는 중한 죄를 범했거나 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고의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 알기 때문에 물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명하는 바울의 방식을 잘 살펴봅시다.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먼저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저희 속에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장엄한 자연 경관을 보는 사람이, '와 대단하다'할 때, 그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속에 죄책감이 생겼을 때, 그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고 느끼는 찬사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생겨난 죄책감을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아는데도 하지 않은 것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의 큰 전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앎이 온전한 앎은 아니라도,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생각들이 모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릇된 사고방식과 행동을 고집하는 것은 마지막 날 심판받을 내용들을 쌓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산에 올라가서 경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비탄을 느낍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그 때 내가 만든 자연에 경탄하면서 나를 알았을텐데, 왜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니?' 그들이 즐기러 올라간 자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먹을 때나, 마실 때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모든 생각과 일상 속에서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 분을 변두리로 밀어놓는 그 어떠한 생각과, 그 어떠한 행동도 옳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만, 정작 문제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밀어내는 왜곡된 생각이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행동의 문제가 나타나기 이전에, 생각의 문제가 먼저라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서의 아담과 같습니다. 뱀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지혜를 얻으라고 최초 사람을 유혹했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지혜, 하나님을 밀어낸 사고방식이 타락의 시작입니다. 


3) 그릇된 사고방식이 그릇된 행동을 낳는다


로마서 1:21,22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그리고 하나님을 배제한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배의 실패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생각을 바로 잡아, 내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때 비로소 참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지혜가 아니라, 그 분으로부터 얻는 지혜로 살면 그 분을 참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때가 지금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악을 이기시는 세상의 왕이시고,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며, 미래를 만들어갈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 생각을 중심 아닌 변두리로 밀어놓으려 하더라도, 찬양과 기도로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배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곧은지 뒤틀렸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심이고,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안 되는데 무언가 하려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워놓고 옷을 잘 입어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께 예배할 수 없는, 그 분을 밀어놓은 왜곡된 사고방식은, 왜곡된 행동을 낳습니다. 그 행동은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오늘날은 나무를 깎아다가 신이라 부르던지, 돌 앞에서 절하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는 여전합니다. 돈과 권력, 그리고 성적 탐닉이 곧 오늘날 피조물 숭배의 흔한 모습입니다. 돈도 모여진 힘도, 성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단들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예배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래서 질서있게 조화롭게 그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왜곡된 사고방식은 왜곡된 예배를 만듭니다. 일상이 예배인데, 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과 이질적인 세상의 메시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 숭배입니다. 자기 자신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예배합니다.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는데, 세상의 메시지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 사랑을 주고받으며 서로 확인할 때, 우리는 나를 사랑하자는 생각을 떠올릴 이유를 못 느낍니다.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맥락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1.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

2.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있기에 심판을 물으신다.

3. 그릇된 사고방식이 그릇된 행동, 피조물 숭배를 낳는다. 


  이 맥락을 잘 살펴야 합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 진노는 하나님과 끊어진 지혜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그릇된 사고방식은 그릇된 행동을 낳고, 그 그릇된 행동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 숭배의 일환으로 동성애가 등장합니다.


2. 동성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1)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 현재적 심판

  이것을 생각하면, 동성애라는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무수한 그릇된 사고방식과 그릇된 피조물 숭배가 전제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1장 후반부에서는 세 번의 '내버려두심'이 등장합니다.(24,26,28)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신의 진노'라 하면 천둥과 벼락을 그 사람 머리로 내리 꽂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창조주 우리 아버지의 진노는 그저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그릇된 행동에도 하나님이 그저 내버려두시는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는 말씀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릇된 사고방식과 행동은 자신을 점점 창조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즉 심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온전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심판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무관심이 얼마나 사람을 질식시키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하물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버려진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속에, 사람은 인간다움을 잃어갑니다. 그리고 끝내는 최후의 심판의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알면서도 저지른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2) 가장 끔찍한 잘못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동성애는 타락에 대한 그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다른 죄악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등 비단 동성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릇된 행동 모두가,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나왔고, 하나님과 끊어진 거짓된 지혜에서 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바울은 끔찍한 잘못을 하나 남겨두었습니다. 지금 말했던 죄악들보다, 심지어 동성애보다도 더욱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죄목이기에 가장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2장의 시작이 '그러므로'입니다.


로마서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앞에서 말했던 죄들은 모두 가치들을 뒤집어놓는 것들이었습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는 죄들이었습니다. 동성애도 그러합니다. 남녀의 연합이라는 창조의 원리를 '아니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러므로' 이후에 나오는 죄는 옳고 그름을 뒤집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자리를 뒤집는 가장 심각한 수준의 가치 전도입니다.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동성애보다 심각한 죄입니다.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자신도 죄를 짓게 되는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충격적인 죄가 언약백성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진 죄였습니다. 아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일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행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다른 민족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착각하며 이방민족들을 개라 부르며 혐오했습니다.


  저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도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동성애자 혐오 집단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욱 과격하게, 더욱 목소리 높여서,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발언들이 기독교 진영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죄인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현행범 여인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너 참 혐오스럽구나'가 아니었습니다.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도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선언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인간 혐오에 기독교인의 자리는 없습니다.


3) 모든 종류의 혐오를 거둬야 하는 이유

  인류는 모두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열 번째 재앙에 놓인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람과도 같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모두가 열번 째 재앙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이 있어야, 어린양 죽음이 귀한 것을 압니다. 이스라엘은 재앙 없이 그저 이집트를 걸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최후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전제되어야 복음이 복음 됩니다. 제가 그간 이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를 발라, 모든 장자들의 죽음에서 벗어난 출애굽 백성과 같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의 피를 발라, 최후의 심판에서 유월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심판받을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은 가장 악독한 사람입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성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그 최후의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무언가 잘한 것이 있어서 그러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저 파라오의 명령 아래 굴복하며, 흙벽돌이나 굽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자신들의 왕이라 착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이 아무런 공로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그 뜻 때문에, 어린양의 피를 마음에 발라 최후의 심판에서 유월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모든 하나님의 진노는 모조리 어린양이 온몸으로 대신 받아내었습니다. 우리도 우상 숭배자였고, 비인간화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으나, 그러한 우리를 고치는 예수의 방법은, 희생을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라 하시니, 우리의 방법 역시 동일해야 합니다.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기독인의 시선은, 내가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나의 옛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행동을 고집하는 모습이, 딱 나를 닮았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건져내신 이가 내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죄인이었을 때, 그들에게 혐오가 아닌 희생과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의 올바른 사고방식과, 올바른 실천이 우리의 몫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남을 판단하면서도, 그 죄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며, '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의 옛모습입니다. 비인간화로 치닫는 그들의 모습도 나의 옛 모습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동족들을 향한 모세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독교인이 혐오를 방편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3. 결론 : 성령으로 해야 하는 일


1) 죄와 사람을 분리하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세상은 알아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죄와 도매금으로 묶어서 사람을 같이 처리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반드시 죄로 물으실 것입니다. 아는데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했을때, 그 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데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 참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곧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사람을 분리하는 일, 즉 지레 판단하지 않고 사람 그 자체로 긍휼히 여기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은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출애굽으로 말하자면, 어린양의 죽음으로 죄악의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구름 기둥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구름 기둥이 의미하는 바가 성령입니다. 성막에 가득한 하나님 임재의 숨결입니다. 


  이 성령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따라서 믿는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으로 내가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전의 내 모습과 전혀 새로운 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주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 커지고, 그에 따라 나의 실천도 깊어져 갑니다. 그렇게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성경은, 새언약의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유대인이 실패한 그 일을, 성령으로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면적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카로운 메스를 가지고서 사람으로부터 죄를 섬세하게 수술해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과 죄를 예리하게 분리해냅니다. 자신이 알면서도 저지르는 모든 악행들이 모두 자기 속에 살고 있는 죄가 저지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곤고한 자'라 부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알면서도 실천할 수 없는 지경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곤고한 자'입니다. 바울은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몸은 다른 몸이 아닙니다. 아는대도 실천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몸입니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러하다고 말한다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7장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곧 예수 믿기 전 자신에 대해서 숙고한 바울은, 로마서 8장에 이르러, 성령으로 새로워진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죽은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이신데, 그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므로, 죄를 이기고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행동을 창조하시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결국은, 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전체가 새로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혐오를 긍휼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성령께 있습니다. 죄인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길이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지금도 열려있습니다. 이 길을 그들에게 소개하고픈데, 그러려면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서 혐오로 일관했던 유대인의 전철을 밟아선 안됩니다. 죄는 죄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어느 한 쪽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2) 복음 : 사랑으로 심판과 구원을 말하기

  그러니 동성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심판과 구원을 말해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복음이요, 복음 전함은 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나처럼 하지 맙시다. 니느웨에 대한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전합시다. 동성애자들 뿐입니까? 외국인 노동자들, 혼혈아들, 노숙자들, 고아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혐오를 거두고, 그들에게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심판과 십자가를 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점점 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동성애의 물결이 거세질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느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을 논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기독인의 길은 동성애자를 혐오하지 않으면서도, 동성애를 죄라고 선언하고, 그것을 고치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섬기는 좁은 길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회칠한 무덤!" 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냥 저주받고 죽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았음에도 점점 비인간화로 달려가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서 그 아들은 사람으로부터 죄를 갈라내어, 그 죄와 함께 죽으시고, 온전함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다만 우리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으니, 지금 우리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4. 글을 마치며


  동성결혼이 미국에서 합법으로 선언된 다음 날, 새벽에 한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 이 문제가 자신의 마음을 짓누른다면서 슬퍼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제가 아는대로 성경에 대해서 말해주었는데, 그때 그 친구의 한 마디 답변 속에서 저는 동성애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형,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고 완전해진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창조의 회복과 완성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새로운 삶을 선언하신 부활의 주님께, 우리의 온전함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 속에서 이 땅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바로 여기서부터 첫 단추를 끼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첫 단추가 꿰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광야 길로 다시 나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심판과 구원의 복음을 들고서 말입니다. 심판은 바로잡음이요, 구원은 새롭게 함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사람에게 심판은 더 이상 두려운 말이 아닙니다. 이제 그 분께 맡기는 일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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