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득(得)을 생각하라. 현실적인 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현실적인 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찌 쓰일 때가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 때에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쌓는 것에 대해 비판했던 야고보는, 다시 현실적인 득을 이야기한다. '신실함'은 일함을 통해서 현실적인 득을 생산해야 한다. 이 현실적인 득이란,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들에 대한 실제적 신원이다. 앞서 고아와 과부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살려야 믿음이다.
현실적인 득없이 피안의 영역을 갈망하는 것을 믿음이라 부르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요, 이 창조 세계를 버리고 다른 피난처를 구하는 발상은 그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창조 세계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이 땅에 오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며, 오늘의 하나님이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현실주의다.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두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추상적인 단어들을 붙들고, 현실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믿음이라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은유와 추상을 통해서 그 세계를 그려보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렸을 때는 말 그대로 공상이 된다. 야고보는 이것을 경고한다. 살려야 한다. 살림은 대지 위에 발을 굳건히 딛고서다. 그린 우리의 신실함은 타인의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는 현실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현실이다.
말로만 뗴우는 것을 신실함이라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2]
신실함은 반드시 일함도 있다. 아빠가 일하시니 우리도 일한다. 신실함과 일함을 분리해놓으려는 시도는 신실함을 질식시킨다. 일하지 않는 이여, 그대의 신실함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그를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의 차이를 발견한다. 바울은 '신실함만으로' 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신실함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하니, 이 둘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터는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바람에 야고보서는 한동안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역사도 있었다. 허나 시대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다시 고쳐 읽어보자.
인격화된 부활은 일한다. 예수는 자신이 부활'이라'하셨다. 인격화된 부활이 곧 빛이다. 빛이 있다. 이 빛은 태양보다 먼저 있던 빛, 바울의 눈을 멀게 만든 강렬한 빛이다. 그 빛 아래 있으니 낮이다. 인격화된 부활은 낮에는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빈 무덤의 충격적인 사건 이후, 우주는 온통 낮이다. 일할 때다. 그 일이란, 빛을 드러내는 일이다. 빛은 뻗어나간다. 발광하는 빛의 근원이 신실함이라면, 그 빛의 뻗어나감은 일함이다. 우리 속에 신실함이 주어졌으니, 우리의 신실함을 발현하여 그 보이지 않는 빛을 우리의 몸짓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신실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시고, 이 하나님과 사람의 강력한 유대관계 속에서 이 땅에 없었던 새로운 조화와 질서를 창조해나간다. 그 빛의 비춤은 새 창조다.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사람이 이 위대한 일에 초대됨의 근원은, 시작은 하나님이시다. 그로부터 거저 주어졌으니,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 그에게는 이 신실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신실함의 출처가 하나님 아빠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허나 그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의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따라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바울이다.
우리가 가진 신실함의 시작이 하나님이고, 그 신실함은 우리의 '몸씀'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일으킨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 하나님이다. 힘내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 철학의 자만을 깨뜨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의 시작이라 말한다. 이 일의 시작이 하나님이시기에, 할 수 없던 자들이 힘입는다. 힘내지 않고, 힘입는다. 글자를 일으켜 진리로 살 수 있는 힘이 아빠로부터! 그래서 아빠는 근원이요, 시작이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로부터 우리에게 신실함이, 참된 것이 주어졌다. 이는 사람의 것이 아니요, 야고보가 말한대로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온전한 것이다. 은혜.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실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기에, 온전한 것이며, 이것을 감히 아무도 막아서지 못한다. 심지어 영들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며,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
[3]
그러나 출발총성이 울렸는데, 아직도 시작점에서 만족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게으른 사람들이다. 왜 제 속에 신실함을 주셨는지, 그 목적을 모르는 자다. 우리에게 신실함을 주심은, 우리의 몸을 통해 새창조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아빠와 아들과 숨님의 관계 안으로 우리도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죽음으로 치닫는 사람과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신실함을 말하면서, 일함이 없다면 그 신실함은 죽은 것이다. 신실하다면서, 왜 그를 통해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가? 왜 그의 주변에 있는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들이 일으킴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왜 신실함은 망설임 속에서 아무런 일함도 없으면서, 떳떳한채 하는가? 절망으로 치닫는 세상살이 속에서 인격으로 드러나는 부활이 없는가? 바로 당신이 일어서야 한다. 바로 당신이 부활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 속에 신실함을 주심은, 바로 당신을 일으키시기 위함이다.
에르곤은, 일은, 신실함의 몸적 표현이다. 발상이 있다면 표현해야 하는 것이요, 그 표현이 나도 사람답게 하고, 너도 사람답게 한다. 살리는 생명의 힘이 나의 인격이 되었으니, 참으로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현하는 능력이라 읽자. 하나님은 빛이시고, 나도 빛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어둠을 밝힌다. 이것이 우리의 노동이요, 이 노동을 통해서 사람은 빛으로서 다시 거듭나고 부활한다. 인격화된 부활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은 빛을 보게 되고, 이 빛은 복음서가 말하는 산 위에 있는 동네도 감추지 못할 바로 그 빛이다.
야고보는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 신실함과 일함의 관계를 풀어낸다. 먼저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신실했으나, 그의 신실함은 추상이나 공상이 아니었다. 일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신실함 안에 일함이 있다. 하나님으로 제 속을 채웠으니 일하는 것이요, 일함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세상에 채우고자 함이다. 하나님은 이 '일함'을 신실함의 표현으로 보시고, 이 일함 이후에 아브라함을 친구라 인정해주셨다.
이 '친구'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하나님과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그 분은 우리 머리 위에서 그저 군림하시는 분 아닌가? 허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착각이다. 그는 우리와 수평관계를 원하신다. 이것이 아니라면 예수께서 모래먼지를 뒤집어 쓰고 팔레스타인 땅 위를 걸으셨을리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수평관계를 원하시고, 이 수평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연결된 관계다. 신뢰와 신용은 다르다. 담보를 맡겨놓고 서로를 재는 거래관계가 아니다. 무조건적인 신뢰관계. 하나님은 나를 믿으시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친구'다. 명령과 굴종이 아닌,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해나간다. 기도다. 보이지 않는 친구와 나누는, 신뢰와 사랑 속에서 나누는 교제. 역사 속에서 수직의 정점에 계신 그이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벼랑 끝에서 밀어 죽이고자 했다. 하물며 하나님을 친구라 부르는 말의 혁명적인 성격을 짐작하겠는가? 우리는 그 친구를 신뢰하고, 그 친구를 위해 우리의 몸을 움직여 친구의 뜻을 이룬다.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라합도 그러했다.
신실함과 일함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정신과 몸의 분리시키려는 꼴이다. 예수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의 수족이다. 신랑과 신부 관계를 맘대로 갈라놓을 수 없듯, 예수와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삼겹줄이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허나 이것을 끊어낸다면,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사람들을 일하게 하지 않고, 신실함의 허상에 묶어두려는 이는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무지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 사이의 상하관계와 복종 밖에 그 목적이 더 있겠는가? 친구되지 않고 주인되겠다는 심산 아니겠는가?
11709日. 7과 9잖아. 친구. 그 친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0). 그러니 신용이 아니라, 신뢰다. 나는 그에게 저당잡힌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나를 드린다. 그 하나에는 이렇게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