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서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기르시고, 그 시련을 끝장내시는 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분을 아빠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 아빠는 빛들의 아빠이시니, 그들은 빛이다. 빛들의 아버지를 향해 있으므로 어둠에 삼켜질 수 없다. 역(逆)소망 중 관(觀)소망하는 이들, 디아스포라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들에게 '경청'을 요구한다. 경청에 반대되는 것은 말함이요, 말함이 심해지면 화냄이 된다. 말하고 화내기 전에 경청하라. 화냄은 하나님의 옳음을 이루지 못한다. 빛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언제나 올곧은 뻗어나감으로 역사한다. 그러니 만일 자신에게 화가 있다면, 이것은 빛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므로 덜어내야 한다. 모든 더러움, 넘치는 나쁨들은 경계없이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가는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덜어내라. 빛이라면 덜어내라.
더불어 받아야 한다. 덜어냈으니 채우는 것이다. 무엇으로? '그 본래 심겨진 말숨'으로. 그 말숨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하는가? 우리가 본래 빛이라 말한다. 그 말숨을 가온에 채워, 우리가 한결같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야한다. 욕망이라 번역한 '에피뛰미아'는 특정 대상을 향해 콧김을 뿜는 모습을 나타낸다. 허나 본래 심겨진 말숨은 에피뛰미아를 잠재우는 유능한 조련사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른 호흡을 유지하니, 두 마음으로 출렁이지 않는다.
[2] 진리를 보지 말고, 진리가 되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줄 알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덜어내는 이는 제 속에 있는 말숨을 행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 거쳐야 할 것이 남았다. 들음에서 행함으로 넘어가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요구한다. 내 생각이 죽어야 진리를 말할 수 있고, 내 입장이 죽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내 바람이 죽어야 서로가 함께 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다. 참은 나를 꺾고 죽여야만 행할 수 있다. 그래서 행함은 곧 능동적 죽음이다. 내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있어서, 내 목숨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음이다. 이것은 마치 제사와 같은데, 제물이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만으로는 제물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드려져야 한다. 이 드려짐이 행함이요, 이 죽어서라도 행하겠다는 자세는 제물의 자세요, 드려짐이 아깝지 않은 것은 제 목숨보다 더 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듣기만 하고 죽을 줄 모르는 이가 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평가하고 있다! 죽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제물인양, 자신이 하나님의 그 크신 소망 안에 아무런 문제 없이 거하고 있노라 착각하고 있다. 그에게 야고보는 거울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한다. 거울을 보고 제 생김새를 들여다 보는 이는, 거울을 떠나면서 곧장 제 얼굴 생김을 잊어버린다. 이렇듯 진리를 듣고 있을 때는 옳은 말씀에 기뻐하다가도, 정작 자신이 삶을 마주할 때는 죽어야 함을 잊어버린다. 제가 누구인지를 들어서만 아는 이는 정작 죽을 수 없다. 제가 누구인지 들을 때만 기억하는 이는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모르는 이다. 그러한 자가 바로 나다. 말씀은 영생이거늘, 내가 주의 말씀을 거울보듯 하니 내 삶이 영생 없이 두 마음으로 위태롭다.
우리는 끊임없이 법(法)이 되어야 한다. 가끔씩 거울 보듯 하지 말고, 제 속에 그 법 있음을 알아서, 그 법으로부터 살아야 한다. 그 법은 죽음에 정복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법이며,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 곁에서 늘 함께 하는 법이다. 시련을 마무리 짓는 법이다. 빛이신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는 법이다. 이 법에 기대면 시련의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힘을 낸다. 어제 말했던 신실함이 이것이요, 신실함은 곧 힘냄이다. 차에 기름이 있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듯, 신실함이 있으면 사람은 힘낼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은 그 자신의 '함'으로 복을 받는다. 빛의 아버지를 신뢰하여, 자유의 법에 기대고, 자신을 내어주어 법을 이루는 사람이다. 이 사람 자체가 복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 되련다. 내 속에 빛이 있고, 법이 있음을 믿고서, 이제 시작하려고 한다.
[3]
야고보는 당부한다. 만일 자신이 종교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말하는데 끊임없이 실수하는 이는, 그 자유의 법에 기대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기 가온에 하나의 말과 숨을 채우고, 자기자신을 깨끗게 하여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의 종교성이란 사멸하게 될 자기 자신일 뿐이다. 텅 비어있다.
야고보가 말한대로다. 종교성이란, 하나님 아빠 앞에서 씻겨 깨끗한 것이고, 씻기고 정결하게 된 제물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다. 죽음을 관통하여 말을 이룬다. 시련 속에 있는 고아와 과부에게 찾아가는 발걸음은 여기에서 나온다.
맨 마지막 구절의 번역에 대해서 고심했는데, 이 본문의 '질서'를 '우주의 질서'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물들지 말아야 하는 세상'으로 이해하는지에 따라서 동사의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었다.
우주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만물에 대해서 대속을 이룬다. 이것은 류영모 선생에게 배운 것이다. 제 목숨을 위해 사는 것은 사람 밖에 없고, 실상 모든 것이 말없이 죽고, 죽어지며, 거대한 생명의 순환을 이루며 서로를 돕는다. 이 생명의 순환에 따라 사는 것이, 나의 죽음이요, 법을 이룸이요, 말씀을 행함이다.
다만 이 가르침에 첨언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나'는 윤재덕이다. 나다. 다른 나는 될 수 없다. '죽음'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 역시 생명의 순환이니 받아들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다르다. 나의 죽음은 제물로서의 당연한 수순이요, 그 뒤에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희극이나, 타인의 죽음은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우발적 사건이요, 비극이다. 이 문제는 흔히 '구원의 문제'라 부르는 것을 관통한다. 타인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나는 말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다만 나는 죽기로 했으니, 죽어서라도 너를 살리고 싶을 뿐이다. 너의 삶 없이 내가 죽기로 했다면, 그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내가 고매한 사람이 되고, 무언가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 너 없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 따위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물의 드려짐은 나 아닌 누군가의 용서를 위함이다. 나는 너를 위해 죽는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는 제물 흉내를 내고 있다. 죽지 못하면서도 죽어야 한다고 제물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흉내내는 이는 정말 제물이다. 그는 흠없는 제물이었고, 모두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제물이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졌고, 우주는 새로운 차원을 맞게 되었다. 그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감이다. 그 들어감은 나 역시 제물됨이다. 십자가를 짐이다. 이렇게 하겠다고, 하겠다고, 계속 하늘을 침노함이다. 그럼 나는 누구를 위해 제물될까. 바로 너다. 너를 위해 내가 제물 되겠다. 그렇게 나는 죽고, 너는 살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부디 내 죽음이 너의 생명되기를! 흉내만이 아니라, 내가 정말 제물되기를!
고린도후서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야고보는 시련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들의 제물되라 말한다. 그는 흉내가 아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제물 아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죽음을 통해 드려지는 삶을 말할 수 있다. 당신에게 나는 말할 수 없다. 말한다해도 아직 살지 않았으니, 더디, 더듬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듣겠다. 떠들지 않고 듣겠다. 당신의 제물되겠노라고 선언했으니, 일단 당신의 아픔을 듣겠다.
제물만 죽으면 된다. 타인더러 제물되라 말할 수 없고, 죽음에 관한 것은 하나님과 그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것이다. 자발적 죽음의 삶이란, 자신이 삶의 주체가 아니라는 주체적 결단을 통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역설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도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타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나는 말하기보단 들어야 한다. 듣고서 해야 할 것은 제물이 짊어지는 죽음으로의 삶, 이 삶만이 설득력이 있다. 단어의 배열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