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보이는 외모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갖지 마세요." 다소 어색한 문장으로 번역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서 '의 신실함'는 주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목적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될 수 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믿으신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후자 쪽을 택했다. 나는 그처럼 되고 싶다. 그의 생각을 알고 싶다. 그래서 그처럼 행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 속에서 가치를 찾으셨다. 가난한 사람, 세리, 병자, 귀신들린 자, 심지어 죽은 사람 안에서도. 신실함이란 믿는 마음인데, 예수는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믿으셨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일까? 우리가 무언가를 긍정하고 부정하는, 맞고 틀리고를 판단하는 그 미묘한 기준. 매시각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내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어디에 매달아 두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외모는 아니라는 것이지. 예수는 외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눈에 보이는 외모가 어찌되었든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셨다. 삭개오, 나사로, 과부, 어린아이, 한센병자, 귀신 들린 자. 겉으로 보기에 사람다운 모습이 없어, 당대 사람들에게 업신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는 무언가 발견하셨다. 외모를 뚫고, 인간성을 들여다 보셨다.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는 경고한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섬기는데, 즉 그 사람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긴 하는데, 신실함을 갖긴 갖는데, 이것이 외모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잘생긴 사람은 잘 섬겨주면서도,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매몰차다. 섬김 자체가 좋은가? 어느 한 쪽만 섬기게 되면 그것은 아부요, 파당 만들기요, 차별이요, 결국에는 분열이다. 섬김은 대상이 전체일 때만 그 참다운 가치가 드러난다. 허나 이 섬김이 전체를 향하지 않도록 가로 막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외모다.
외모로 차별적 섬김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얼굴에 보이는 외모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갖지 말라'는 말의 뜻이다. 흔히 젊고 예쁜 자매들만 대상으로 사역하려는 신학생들에게도 동일한 말을 해줄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특정 외모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된다. 또한 역으로, 특정 외모를 통해 타인의 신실함을 기대해서도 안되겠다. 외모는 참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쉬우냐?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누구든 차별없이 대하는 것이 쉬우냐?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예쁜 것, 자극적인 것을 쫓는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진화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우리 몸에 새겨진 법칙인가? 어쩔 수 없으니, 우리 고개는 돌아가고, 어쩔 수 없으니 우리는 차별해야 하는가? 아니, 몸은 정신의 다스림을 받고, 정신은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말씀은 신의 입에서 나온다. 신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육체의 욕구를 극복하고, 차별을 깨뜨린다.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우리 몸에 이르도록 관통하는 거룩한 숨결. 그 숨결을 따라 산다.
본문에 '굽실거리는 이'라 번역한 단어는 '프토코스'로 돈 없는 거지를 뜻하는 말이다. 교회 안에 한 푼 달라하면서 굽실거리며 들어온 노숙인을 생각해보라. 그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만일 이 사람에 대해서 얕보고 괄시한다면, 이것은 '디아크리노'다. 앞서 '지레 결론 내리다'라고 번역한 단어인데, 앞에서는 자신의 시련에 대해서 자신 스스로가 부정적인 결론을 내려버린 경우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은 가치 없다고 지레 결론을 내려버린 경우를 뜻한다. 외모를 가지고 알파에서부터 오메가까지 판단했으니, 그 속에서 아무 가치도 발견할 수 없었음이라.
[2]
어제는 부활절 연합 예배를 다녀왔다. 나는 요즘 부활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상황 중에 있다. 허나 나는 어제 예배 속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무엇에 박수를 치고, 무엇에 환호해야 하는가? 정치 권력인가? 목사의 업적인가? 더 낮출 수는 없는가? 더 겸손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더 진실할 수 없는가?
야고보는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굽실거리는 이들을 택하셨다! 이들은 사회에서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던 거지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데려다가, 신실함으로 넘치게 하셨다. 그들은 본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가진 것도 없었기에, 하나님을 더욱 붙들 수 있었다. 가난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개척초기 미국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오늘날의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힘에 굽실거릴 수 밖에 없는 약한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누리는 '그 다스림'을 상속 받게 하셨다. 예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참'. 이들이 상속자다, 이들이 램넌트다.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 역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그들을 향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새창조의 시작이고, 첫번째 신인류의 탄생이라면,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아와 과부 안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 안에서 참된 인간성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그 부활을 따른다는 내가, 굽실거리는 그 사람들을 얕보고 있다. 배우지 못했다고, 가진 게 없다고, 내 아랫사람 보듯한다. 지식과 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이여! 지식과 돈에 사람다움의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는 이여! 하나님은 지혜자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신다! 이 마지막 때에 모아놓았던 재산들은 자기 정신과 함께 썩을 것이다! 케뤼그마의 어리석은 방식으로, 가난한 씨알에게 복음을 믿게 하시는 주님, 찬양을 받으옵소서!
오히려 나를 괴롭게 하는 이들은 돈 많은 자들이고, 정치가들이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그들 꽁무니를 따라다닐 뿐, 정작 시련 속에서 괴로워 하는 이들이 내 눈에도, 내 마음에도 없질 않았느냐!
[3]
병원에 들어와서 자꾸만 생각하는 것은 야고보서 1:27 이다. 난 진짜 종교인이 되고 싶다. 깨끗하고 흠없는 경건으로,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정도로 자위하지 않고, 공감하기에 그들을 위해서 내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러한 갈망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구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 있음을 믿는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연대와, 그들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돈으로도 살 수 없이 귀한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는 사람을 알고 계셨다. 그들과의 연대를 말씀하셨다. 공동체다. 몸이다. 그 몸은 예수 자신이다.
율법을 지켜서 온전한 내가 되야겠다는 개인적인 포부, 윤리적 성취가 아니다. 이런 사람은 글자에, 율법에 갇혀 있다. 글자에 따라 자기의 삶과 남의 삶을 끊임없이 평가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몸에 있어서 질병이다.
그러나 속박의 법이 아닌, 자유의 법을 따르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율법을 온전히 이룬다. 그 사람 자체가 걸어다니는 율법이요, 그 사랑 속에서 모든 계명은 탐심이 아닌 사람다움을 낳는다. 참으로 사람살이다. 그가 따르는 것은 글자들이 아니라, 제 속에 있는 자유의 법이다. 자유의 법이 무엇이냐? 내 속에 비뚤어짐과 상관없이 있는, 성령의 법이다. 예수 안에서 내가 하나님과 화해했으므로, 나는 하나님을 따라 선한 일을 해야 하는 무한한 당위와 힘을 얻는다. 그 자격과 힘은 글자를 일으켜 살게 한다. 글자는 2차원이라면, 삶은 3차원이다. 글자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 마저 그의 삶에 이뤄지고 있다. 로마서 7:24~8:4 를 보라.
이 성령의 법에서부터 대가가 아닌 베풂이 흘러나오고, 이 베풂을 야고보는 자비라 부른다. 글자로 쓰인 법조문을 거울보듯 할 것이 아니라, 제 속에 하나님을 모시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들여다보라. 이 성령의 법은 자비의 법이다. 끝이 없는 법이다. 심판이 끝을 정하는 것이라면, 자비는 끝을 없애는 것이다. 차라리 심판은 마음이 편하다. 허나 삶과 죽음이 모호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사귀는 것인지 사귀지 않는 것인지 애매한 사이는 진이 빠진다. 자꾸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진 빠지고 힘든 자리를 자처하셨다. 오늘날이 그렇지 않은가? 분명 현시대는 끝나지 않았는데, 이 현시대 속에서 오는 시대도 시작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 이매한 시절, 예수의 시절, 자비의 시절이다. 그래서 중보자요, 중보자는 자비를 베푸신다. 제 속이 불편해도, 제 애가 끓어도, 그들을 위해서 울고 위로하며, 심판이 아닌 자비를 부르짖으신다. 자신의 유한함과, 미천함을 깨치는 가난한 씨알들은, 그의 자비의 소식을 듣고서 그 앞에 돌아온다. 케뤼그마의 미련한 방식으로.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는, 세상 지혜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 충격적인 소식으로.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이여, 제 속에 성령 계심을 알지 않는가. 그 성령은 내가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죄와 달리, 순수하고도 변함없는 분명한, 하나님이다. 제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가? 그가 당신과 호흡하는가? 그럼 그 말할 수 없는 자비로움으로, 이웃을 꿰뚫어보는 눈과, 사지가 그들을 아낌없이 베풀도록 살몸을 복종시켜야 한다.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참사람되고, 우리가 참공동체 되는 것 외에, 우리가 추구할 것이 무엇이랴. 참을 이룰 수 없는 지식은 헛되고, 참을 이룰 수 없는 삶이란 냄새만 날 뿐이다. 참은 향기다. 존재 자체로 향기다. 꽃이다. 이 꽃을 피우는 것이 거룩이요, 우리의 거룩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시다. 그러니 그 애매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 자비의 소식을 전하자. 우리가 강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도록 하자.
11708日. 오늘은 아버지에게도 첫날이요(어제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나에게도 첫 날이다. 첫 날을 맞이한 두 사람,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 끝까지 삶이다. 끝까지 뜻이다.
아버지는 참으로 순전한 씨알이시다. 어려운 말은 쓸 줄 모르셔도, 참으로 올곧게 믿고 사신다. 하나님이 아버지와 함께 하심을 느꼈다.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