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병상일기다. 글자를 붙잡고서, 이 안에 흐르는 숨결 내음을 맡아, 내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함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혹은 할 이들과 글자로 소통하기 위함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이란 '시련'이다. 나는 시련을 겪고 있다. 허나 나뿐인가? 모든 사람은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양식을 타고 났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사무치게 그리워해본 일이 있는가? 나는 어제 병원에서 이전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듣다가,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 시절로 내가 돌아갈 수 없음에 두려워졌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 이 땅에 태어난 나는 어찌되었든 시간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고, 나는 내가 밟고 나갈 시간들을 모두 알지 못하기에 울고 또 웃는다. 시간이란,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존재 양식이다.
디아스포라는 이러한 존재양식으로 사는 이들을 말한다. 본래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떠나,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디아스포라임을 아는 이들은 그의 소리를 듣는다.
[1]
시련을 겪고있는 디아스포라들이여, 당신이 겪는 시련을 전적인 기쁨으로 해석하라!
시련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이 말도 안되는 역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신실함이다. 신실함은 믿음에 대한 번역어다. '믿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짐', faithfulness. '견딤'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견딤은 '휘포모네'라는 단어로,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킴이다. 신실함이 내적 상태라면, 견딤은 그 신실함의 외적 표출이다. 신실함이 힘을 내는 모습이 견딤이다. 야고보는 이 견딤으로 끝장을 보라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견디는 이가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견디는 이는, 견디면 견딜수록, 끝(목적)에 닿은 사람, 부족함없이 모든 면에서 몫을 해내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견딤은 그 자신에게 좋은 것이다. 즉 내가 참사람될 수 있기에, 나에게 오는 시련은 나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것만으로 전적인 기쁨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시련을 끝내시는 이, 이 견딤을 지켜보는 이가 계셔야만 이 시련이 기쁨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시련 속 신실함의 대상이시다. 정녕 그러한 이가 계시다면, 시련을 통해 우리는 참사람이 되고, 그 시련은 끝이 난다. 시련을 견딤으로 맞서는 이는, 이 한 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통해 상황을 달리 읽을 수 있다. 시련을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는 없이 계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업신 여김을 당하시고, 또한 그를 본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거나, 그를 이용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나도 예외가 아닐텐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지혜란 신지식(神知識)이다. 시련을 끝내시는 이, 나를 참사람으로 길러내시는 이에 대한 앎이다. 이것을 알고자 하는 이는 알게 된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신비가 아니겠는가! 그를 알고자 하면, 그는 자신을 알게 하신다.
다만 그를 알고자 할 때, 주의사항이 있다.
1) 하나는 신실함으로 구할 것.
신실함이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그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아니, 신실함이란 그 분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 분만으로 나를 채우는 마음이다. 그의 뜻이니, 아니면 미래니, 이런 것 아니다. 그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람이다. 첫째 계명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이다. 제자리로 돌아감이다. 신실함이란, 그 분으로 내 속을 채움이다. 그 분으로부터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2) 두번째는, 결코 지레 결론을 내리지 말 것.
'지레 결론내리다'라는 말은 '디아크리노'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쭉 재보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허나 신을 알고자 할 때는, 자신이 전부를 조망할 수 없는, 전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모르기에 신은 아신다. 시련 속에서 당신은 어떠한 결말을 내리는가?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결론 내리기에 갈팡질팡하는 것이 시련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의 이 시련 앞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갖기가 너무 힘들어 무릎 꿇는다. 나는 비로소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남겨둔다. 내가 신실함으로 대하는 그 분께, 모든 것을 아는 그 분께, 결론을 남겨둔다. 그 분은 시련의 결말을 내실 수 있다고 믿기에, 이 과정을 통해서 나에게 새로운 나를 주실 것을 믿기에.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련 앞에 혼자 대면하려는 이는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 자신이 결론을 내렸기에, 그의 속에는 결론이 되시는 이가 쉴 자리가 없다. 그는 주변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조급한 마음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야고보는 말한다. "그는 두 가지 숨을 쉬는 이요, 그의 모든 길에 굳건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평안한 숨과, 거친 숨을 번갈아 쉬는 이의 삶을 생각해보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신뢰할 것 하나 없는 사람 말이다.
[2]
하나의 숨을 쉬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현재 짓눌려 힘든 이는, 이 짓눌림에 끝이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높이실 것이라는 신뢰 속에서 소리를 높인다. 그를 짓누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죽음이다. 죽음만이 사람을 괴롭게 짓누를 수 있다. 자신의 질병,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 사람의 사람다움을 앗아가는 그 충격적 사건이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그러나 현재 넘치는 이, 즉 부유한 이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허나 부유한 이는 자신의 부가 영원하지 않으며, 이 부유함은 햇볕 아래 식물처럼 시들고, 자신 역시 이 죽음에 짓눌리게 될 것을 알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 두 사람의 소리 높임을 보라. 가난한 자든 부한 자든, 죽음의 짓눌림 속에 같은 소리를 내라는 말이다. 이 소리내는 숨이 한 숨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허세를 부리지 말지니라. 같은 소리를 내라. 죽음을 이기시는 한 분께 소리를 높이는 것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일반이다. 죽음을 이기실 수 있는 분에 대한 한 목소리. 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시련을 견디는 사람이다. 디아스포라다. 이 사람에게 '복'이 있다. 죽음의 시련 앞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더욱 인간다워지며, 마침내는 죽음을 극복하게 되는 그 복이 이 사람에게 있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보라. "시험을 받은 이는 삶의 면류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삶의 면류관. 삶은 삶인데 면류관이 있다. 이는 시련을 겪어낸 삶을 뜻한다. 시련 앞에 무너지고 참혹해진 삶이 아니다. 시련을 이겨냈다는 영예로움으로 가득한 삶이다. 이 시련을 어찌 이겼냐? 죽음을 이기시는 한 분에 대한 신실함과 견딤으로 이겼다. 그럼 이 승리는 누구의 몫이냐? 우리는 그 한 분께 영광을 돌리겠지만, 그 분은 견뎌낸 우리를 잘 했다 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3) 또한 주의사항 세 번째. 시험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 것.
우리 속에 걸림이 있는 것은, 나의 연약함이요, 악이요, 불신인데, 이것들은 내가 이겨내야 할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겨내야 할 것이다. 삶은 다른 것 없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죽음의 시련을 한 분에 대한 신실함으로 극복해내는 삶이다. 이것이 '옳'이다. 허나 자기 속에 있는 끌림에 따라 휘청거린다면, 결국 이 '옳'은 '비뚤림'이 될 것이고, 그 기울기는 죽음에 대한 긍정, 삶을 파괴하는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 더 나은 소망이 없다고 지레 결론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3] I Am From The Light!
지금 나와 떨어져 있는, 그러나 시련을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여!
나는 삶과 죽음이 이름만 다른 것인줄 알았노라. 그래서 죽음을 그저 달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사람답고, 하나님과 가까운 것인줄 생각했었다. 허나 내가 겪는 시련 속에서 신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내가 가졌던 태도는 허세요, 위선이요, 내 마음의 슬픔을 가린 부정직이요, 하나님의 결론을 배제한 교만이라! 그러니 나와 같이 헤매지 마시라! 우리에게 좋은 것,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온다. 우리 자신들이 빛임을 깨닫고, 우리에게 좋은 것이 그 빛들의 아빠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알고 받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빛이니,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이다. 빛은 어둠에 정복당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에게는 그늘이 없다는 야고보의 말이 이해되는가? 빛들의 아빠이신 그 분께 어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둠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분께서 우리에게 뜻이 있어, 참말씀으로 낳으셨다. 참말씀은 예수요,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우리의 출처가 빛임을 안다. 빛이신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피가 언약궤를 흥건히 덮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었고, 비로소 우리의 삶에 예수의 숨과 피가 흐르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의 본질이 빛임을 안다. 그러니 우리가 기댈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삶에 삶을 더하고, 삶에 삶을 곱하여, 우리에게는 온통 삶만이 있다. 그러니 살아서도 삶을 위하여, 병고침과 귀신 쫓음이요, 죽어서도 삶을 위하여,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사건이 아니다. 자신이 빛인줄 알고 살면, 그 사람이 부활이다. 인격화된 부활, 죽음 이긴 삶의 현현이 우리의 현재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고 이렇게 사는 부활 사람은 곧 그의 창조 세계 위에서 새로이 창조된 첫 열매들이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이룬 창조의 결과물들이 모두 죽음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보고 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절망하고, 이제 우리에게는 비참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의사들도 그리 말하고, 과학자들도 그리 말한다. 죽음을 인정한 채, 차선책을 찾는 것이 그들의 전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환자 가족들의 오열에서 본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 그것은 죽음으로 미끄러져들어가는 옛 창조 위에서, 새로이 일어난 사람이다. 빛이다. 삶이다. 새창조다. 그래, 부활한 인격이 희망이다. 바로 신실함으로 시련을 견뎌나가는 디아스포라, 바로 나다.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