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성경 번역😊
야고보서 5:19,20, 개인번역
나의 가족들아,
만일 너희들 안에서 누군가가 이 진리에서부터 어그러졌고
누군가가 그를 돌아서게 한다면,
그는 알아야할지라
그의 어그러진 길로부터 비뚤어진 이를 돌아서게 한 자는,
그의 프쉬케를 죽음에서부터 낫게 할 것이고,
비뚤어짐들의 많음을 덮어줄 것이다.
야고보서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본문이다. 야고보는 앞에서의 논지를 마무리 하면서, 위의 권면을 덧붙인다. "나의 가족들아"는 교회를 일컫는 신약성경의 표현이다. 원문에는 "형제들"이지만, 남성으로 가족을 국한짓는 것은 오늘날에는 본문의 의미를 오도한 것이 되리라.
"너희들 안에서"로 시작되는 권면은, 이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즉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진리에서부터 어그러진"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어그러짐(πλανάω)'은 개역성경 안에서 "양의 길 읾음(마태복음 18:12,13)", "하나님 능력에 대한 오해(마태복음 22:29)", 그리고 다수의 본문에서 "미혹"으로, 그리고 바울서신에서 "속다/속이다(고린도전서 15:33, 디모데후서 3:13)"로, 히브리서에서는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함'(히브리서 11:38)"으로 번역되었다. 즉 신약성경은 진리를 "길(way)" 이미지 위에서 사고하고, "미혹", "오해", "속음/속임", "방황"은 그 길에서 벗어난 경우를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조건문을 사용하여 그가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히 한다. 즉 진리를 오해한 사람이 다시 진리를 따라 살게 될 가능성인 것이다.
본문 해석의 난점은 20절의 "그의 프쉬케"가 누구이냐인데, 돌아서게 한 사람인지, 아니면 돌아선 사람인지의 문제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의 죽음은 최종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자의 현재에 드리워져있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서 2:14,15에 기초해 있다.
히브리서 2:14,15, 새번역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현대의 이단의 경우 이 점이 참으로 모순적인데, 예컨대 신천지 교인은 죽음의 두려움을 본인들이 극복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의 공포로부터 추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죽음, 지옥, 영벌의 공포를 빈번하게 활용하고, 그 공포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 안에 머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려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
일단 방법보다 결과부터 살펴보자.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어째서 구원(나음, 온전함)이 발생하는가?'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는 생존 제일 주의를 낳는다. 생존을 추구하는 것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다. 타인을 위한 고생,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선택은 배제된다. 즉 죽음의 공포 아래서는 사랑은 제한된다.
"비뚤어짐들의 많음을 덮어줄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마지막 대목에 '사랑'이 보인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로마서 4: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베드로는 명시했고, 바울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위의 잠언 구절에 익숙한 유대인이라면, "죄를 덮어줌"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다시 '주어는 무엇인가?'라는 이 구절의 난점이 다시 고개를 드는데, 나는 이때의 비뚤어짐의 많음이 돌아선 사람과 돌아서게 한 사람 모두를 지칭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자의 과오를, 돌아서게 한 자는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고(사랑으로), 그렇게 용서하고자 하는 이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리 없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해주옵시고"
결론을 먼저 확인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진리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에스겔 33:9는 우리가 그들에게 '말'을 전해야 할 당위를, 디모데전서 4:16은 그것이 나와 너의 구원(온전함)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 : 나의 말, 너의 돌아섬, 사랑과 용서의 결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은채, 야고보서는 마무리된다. 야고보는 방향을 제시할 뿐, 말에 구체성의 옷을 입히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교회의 숙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숙제를 멀찍이 치워놓은 교회를 바라보며,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다시 무슨 말을 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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