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나 <장자>, <회남자>같은 도교문헌에서 세계상을 어찌 그리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도교에서는 '세계'가 죽어있는 무생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가 말하는 세계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 받으며 움직이며 변화하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이 '무언가를 주고 받는 방식'이 바로 '음양오행'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형성 과정은 이러하다. 먼저 태극이 있다. 그리고 이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나온다. 이 음양의 원리가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음양이 태극에서부터 똑 떨어져 나온게 아니다.(류영모 선생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유교의 폐단이었다고 말한다.) 태극으로부터 음양이 나왔으나, 이것은 태극에 속해있다. 태극은 '절대계'요, 음양은 '상대계'다. 그러나 상대계는 절대계 안에 있다. 즉 땅은 하늘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 땅은 하늘에 속해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차원과 땅의 차원을 만드셨으나, 하늘의 차원은 땅을 덮고 있다는 말이다. 다 같은 말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을 덮고, 보이지 않는 차원 안에 있는 보이는 차원의 성격은 '둘'이란 말이다. 이것이 음양의 의미다.
눈을 들어 아무 거나 들여다 보아라. 그리고 '잘'과 '못'이라는 글자를 붙여보면 상대세계의 음양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못하는 것이 있다. 잘된 것이 있다면 못된 것이 있다. 잘 있는 것이 있다면, 못 있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잘'과 '못'의 기준이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지. 다 사람마다 달리보는게 이 잘못 아닌가? 그래서 여기가 상대계요, 땅이다. 이 땅에서 하늘의 잘못마저도 가리려고 하질 않는가? 이게 인간이다.
이러한 상대계 안의 '잘'과 '못'에서 또 '잘잘못'을 가려보려는게 '오행'이다. 옛사람들은 다 하늘을 닮아 땅을 다스리고자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기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데, 그 사이에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있어, 그러니 이 다섯의 의미를 이 땅에서 가려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방위도 중앙, 서쪽, 동쪽, 남쪽, 북쪽 이렇게 다섯개로 나눴고, 색깔도 노랑, 하양, 파랑, 빨강, 검정으로 나눴고, 소리도 궁, 상, 각, 치, 우로 나눴고, 맛도 신맛, 쓴맛, 단맛, 매운 맛, 짠 맛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노자의 말을 들어보시라. 이렇게 오행에 따라 나누어놓은 이것들이 사람에게 좋지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다섯 빛깔은 사람 눈을 멀게하고, 다섯 소리는 귀를 멀게하며, 다섯 맛은 사람 입맛을 상하게 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도교의 시초격인 노자조차도 음양오행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위에 써놓은대로다. 음양오행이 태극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을 잊은 음양오행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절대'를 잊은 '상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람을 상하게 할 뿐이다. 하늘을 잊은 땅은 사람 살만한 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상대세계에서의 음과 양은 참이 아니다. 불측(不測)이다. 반드시 의심해봐야만하는 것이다. <성경>으로 말하면, 하나님 없이 선과 악을 알고자 함이다. 틀렸다.
[2]
늙은이가 하늘을 잊은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몰려다닌다. 상대세계에서의 둘로 쪼개진 사람들이 서로를 지워나가기 위한 태양이 되고자 한다. 신채호의 말대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둘로 쪼개진 우리편과 니네편의 싸움이다. 이 일에 마음이 뛴다. 누군가를 이기고, 내가 그 보다 우월해질 수 있다는 탐욕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당시에 사냥이라면 오늘날로는 스포츠다. 둘로 쪼개어 이기는 것으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들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임을 알면서도 내 심장이 반응해버리는 그 음양 말이다.
얻기 어려운 물건이니 '희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희소한 것에 높은 가치를 매겨두는 것은 상대계의 특징이다. 남들은 구할 수 없는 것인데, 나는 구할 수 있으니 귀하게 여긴다. 둘이다. 세상을 내가 둘로 재단하고서 스스로 왕이 된다. 아까 색깔 얘기가 나왔으니, 다른 생각을 또 해보자. 흰색과 검정 사이에는 무수한 색이 있다. 채도를 기준으로 하던, 명도를 기준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만 그 무한에 가까운 색을 인간 기준으로 한 번 갈라보는 것 뿐이다. 그저 검정과 흰색 사이 어드메를 뚝 잘라서, "이건 회색"이야 라고 정해버리는 거지. 그렇게 '여럿'을 만들어보지만, 실상은 '하나'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빨강만 좋아하고, 파랑은 싫어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빨강과 파랑의 경계는 사실 나눌 수 없이 모두가 하나로 주욱 이어진 하나의 색이었다. 다만 이것을 자꾸 나누다보니, 우리의 인식에서 이것이 익숙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부분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른 이를 지배하려든다면 이처럼 나쁜 것도 없다. 사냥질이나, 얻기 어려운 물건 얻고자 애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죽여 전체를 곪게 한다.
도교에서 행(行)은 '흐름'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에 조화롭게 행동이 흘러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을 둘로 내 멋대로 재단하려는 생각이 저 자연스러운 행동을 가로 막는다. 마땅히 흘러가야 할 행동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고 고이게 만든다. 왜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을까? 너와 내가 기실 하나인데,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아까워할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단절을 원할까? 왜 일까?
하나에서부터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은 둘로 쪼개는데 익숙해졌고, 절대를 모른채 상대적으로 사고하며, 이 때문에 우리의 행동은 온통 가로 막혔다. 우리는 스스로 고립되며 이제 쪼갤 것이 없어 자신의 내면을 쪼개는데 이르렀다. 우리가 하나를, 태극을,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나누는 참된 기준을 제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 최초의 이야기가 우습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를 버린 쪼갬의 시작이 거기서부터니까.
[3]
그러므로 씻어난 이는, 속에서부터 하지 눈에서부터 하지 않는다고 한다. 속에서부터 하는게 무엇인가? 속에 무엇이 있는가? 내 속에는 '숨'이 있다. 이 숨은 내 속에도 들어가고, 네 속에도 들어간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한 숨'으로 숨쉰다. 사람이 모두 그렇다. 사람만 그러한가? 도교에서 제대로 보았다. 이 세계도 그러하다. 이 세계는 만물이 같이 호흡하고 있다.
만물을 살게하고 유지시키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인간은 그토록 쪼개는 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사람에게 끊임없이 하나됨을 가르쳐주어 이 세계를 지키고 보존하는 그 보이지 않는 무엇 말이다. 생각해보라. 사랑, 정의, 평화, 진실, 아름다움...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우리가 삶 속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향해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무엇을 추구하라고 자꾸 생각나게 하며 가르쳐주지 않는가? 도대체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정체는 무어냐? 옛날 사람들은 정령들이라 생각했다. 반절만 맞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긴 있는데, 상대계에 익숙하다보니, 그저 '여럿'의 정령이라 생각했던게다. 여럿이 아니다. 하나다. 한 숨이다.
이 만물을 붙잡은 이 숨을 보라. 씻어난 이는 너와 내 속을 들락날락하는 이 하나의 숨을 보라. 숨을 본다고? 그래, 본다.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는다. 하늘을 보지 못하는,말 그대로 보이지 않은 차원을 보지 못하는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니 눈에서부터 행동해선 안돼! 눈에서부터 시작함은 태극없는 음양의 덫에 걸리는 것일뿐,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한다. 믿음으로 보라! 이 숨이 있음을 믿으면, 숨으로 호흡한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당신의 정신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청량한 그 분을 알게 되리라. 당신도 그 숨에 씻겨 새로 나게 되리라.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씻어난 이는 너와 나를 가르는 이 겉껍데기에서 떠나, '이것'을 붙잡는다고 한다. 기독인은 노자가 '이것(此)'이라 말했던 것의 정체를 알고 경험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기독은 숨 터뜨려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제여! 당신은 노자를 넘어서야 한다. 노자보다 우리가 뚜렷하게 그 숨을 쉬어야 한다. 그이 이름 아깝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