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魄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10장 전체의 해석이 갈린다. 나는 이 넋을 '공동체의 정신'으로 보련다. 사람에게는 각기 정신이 있지만, 이 정신은 모여서 공동체의 정신, 곧 집단인격을 이룬다.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천사'가 곧 이것이라 생각한다. 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spirit이다. (이런 게시물을 보라)
그 공동체의 정신을 머리에 이고 나른다. 내가 그 정신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으니 곧 섬김이다. 목적은 무엇인가? 抱一이다. 하나로 끌어안음이다. 각자 개체로서 찢기지 않고(離) 하나되게 하기 위함이다. 둘로 찢어짐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국가간에 둘로 나뉘어 싸우면 전쟁이요, 국가 안에서 찢기면 국론 분열이요, 부부끼리 둘로 나뉘어 싸우면 이혼이요, 내 맘이 둘로 나뉘어 싸우면 정신 분열이다. 이 둘로 찢긴 씨알의 맘과 몸을 하나되게 한다. 이것을 위해 섬긴다.
또한 씨알의 호흡(氣)을 살핀다. '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운(氣)', '분위기(雰圍氣)'란 말 속에 '기'가 있다. 씨알의 기운, 씨알의 분위기, 곧 민심이다. 그들이 성내어 숨을 씩씩대지 않도록, 혹은 절망하여 한숨을 내쉬지 않도록, 마치 아기처럼 고른 숨을 깊게 쉬고,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당을 쓸어주고 어두운 면을 살펴야 한다. 여기서 어두움을 나타내는 玄에 주목하라.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캄캄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캄캄함을 뜻한다. 캄캄하다고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캄캄한 중에도 더듬어 찾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 분은 어두워서 사람의 안광으로는 찾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찾아야 하는 한 분이다. 사람들이 이 '없이 계신 한 분'을 알아, 허물없이 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살펴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데, 씨알이 도둑질 할 이유가 어디있으며, 애써 죄를 짓어 자신의 삶에 허물(疵)을 만들고자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 이제 나에게 묻자. 하나. 공동체를 다스리는 일에, 내가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섬김이다. 여기서의 治가 군림이라면, 내가 한다 말하면 되지, 굳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노자는 말한다. 섬기되 숨어라. 니가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왜?
이 일은 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되게 하는 공동체 꾸림은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일이다. 마치 마태복음 18장에서 하늘을 묶고 푸는 권세를 베드로에게 주셨듯,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되게 하는 일은 하나님 이름 위해 하는 것이지, 니 이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너는 이 일에 있어서 남자가 아니다. 여자다. 돕는 베필(雌)이다. 남자들은 공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고 하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이름없이 뒤에서 수고하고 섬기어 일을 이루게 한다. 드러낼 이름은 오직 한 분의 이름뿐이요, 사람은 하나님의 조력자로서 숨고 돕는다. 하나님 나라의 신부와 같이.
그러니 이 맑고 밝은 뜻을 온천하에 전하면서도, 니 지식으로, 니 생각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 생각으로 돕는 일이 너의 일이다. 넷은 <계시록>에서도 온세상을 뜻한다. 땅의 경계를 붙들고 있는 네 천사, 네 짐승을 생각해보라. 무지로 한다는 것은 지식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델피의 신탁소는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 했다. 무지는 끝없이 앎을 추구하면서도 빈 자리 하나를 남겨두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는 열린 생각이요, 열린 마음이다. 수평적 차원의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수직적 차원의 지혜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따른다. 무지하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이룬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3] 낳고 기르는 일은 현묘한 어머니의 일. 곧 모든 것을 낳으시는 곡신의 일. 그 일을 나도 한다. 사람들의 맘에 없었던 새 소망을 낳고, 그들이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그것을 기르면서도, 그 사람들을 위에 군림하여 내 소유 삼지 않는다. 무슨 높은 직위가 생겼다고 도맡으려 하지 않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우두머리이면서도 어른 대접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현덕(玄德)'이라 한다. 곧 하나님의 덕이다. 그 분은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캄캄한 분이시지만, 그 분의 덕은 분명하다. 그 덕을 붙잡아야 한다. 류영모 선생은 '덕'을 '속알'로 풀었다. '속알' 마저도 푼다면 '속생명'이다. 내 속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마음, 곧 거룩이다. 이것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이 현덕을 마음에 두고, 현실화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