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로 몰렸는데, 수레가 되어 쓰임은 '그 없'이 마땅하기 때문이라. 진흙을 빚어서 그릇으로 쓰려는데, 그릇이 되어 쓰임은 '그 없'이 마땅하기 때문이라. 틀을 내고 문을 뚫어 집으로 쓰려는데, 집이 되어 쓰임은 '그 없'이 마땅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있'이 이롭게 쓰임은 곧 '없'이 쓰이는 것이다.
'있'과 '없'을 생각해보자. 무언가가 있다. 무언가가 없다. 이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으면 '있다'고 말하고, 지각할 수 없으면 '없다'고 말한다. 순전히 자신의 지각 능력에 의해 있고 없고를 결정한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없으면 좋겠어.'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자신에게 어떻게 지각되느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치 판단의 참다운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세상 모든 것은 지각 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레바퀴를 생각해보라. 수레바퀴에 서른 개의 바퀴살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서 바퀴살은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붙어 있다. 이 간격이 곧 '없'이다. 바퀴살은 '있'이다. 이 '없'이 없이는 '있'도 없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없'속에 '있'다. 이것이 노자가 보여주려는 진리다. 이 '없'을 무어라 부를 것인가? 있는 것들은 돈 주고 사고 팔지만 이 '없'은 모든 만물에게 존재의 토대가 되어 주면서도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수레 뿐인가? 그릇은 그 속에 뚫린 '없'없이는 아무 것도 담아낼 수가 없으며, 집도 그 안에 '없'이 없이는 사람이 그 속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있'이 이롭게 쓰여질 때는 '없'이 쓰여질 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있'이 전부라 생각할 때 아닌가? 그것도 자신의 지각을 기준으로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좁지 않다. 우리의 지각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은 팔레스타인에서 자라온 성경과 동양고전이 마주치는 자리이기도 하다. 당신은 '없'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모든 것을 있게 해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 어머니와 같은 것을 당신은 무어라 부르는가? 성경은 '숨'이라 부른다. 거룩한 숨결. 곧 성령이시다.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창조자의 숨결이자, 창조된 모든 만물 속을 관통하며 기동하게 하는 그 힘. 지구라는 성전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호흡. 그러나 보이지 않아서, 지각으로는 늘 지나칠 뿐인 세상의 진짜 주인. 더불어 '있'은 '만물'이라 부른다.
만물이 이롭게 쓰일 때는(여기서 '利'는 개인적 사리사욕이 아니다. 이 글자는 요즘 이렇게만 쓰이지만) 그 존재를 통해서 성령을 쓸 때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는 예수를 배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관통하는 피리되어, 생명의 소리를 온 몸으로 내뿜는다. 그의 손이 엄마 뱃속에서 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숨결은 새로이 창조하여, 배신자의 손을 그리스도의 손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모든 '있'이 이롭게 쓰일 때는, 그 '있'을 통해서 '숨님'이 쓰여질 때다. 곧 숨을 받아 숨을 내쉬는 있음이 참되게 있음이란 말이다. 이건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당신은 '없', '숨님', '성령'을 알고 있는가? 분명한 건, 지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각을 넘어 숨님을 마주하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